00
1
2
3
4
5
6
7
8
9
10

지난해 12월 25일 밤 10시. KBS1 채널은 성탄특집 다큐로 '일사각오 주기철'을 방영했습니다.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주요 포털에서는 '주기철'이 검색 1위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으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시작은 대단치 않았습니다. 13살이 되던 1910년 성탄절에 그는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습니다.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아닌, 그저 사탕과 선물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때 그가 선물로 받은 성경책이, 본인의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그땐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1922년 평양신학교 입학하고 1925년 목사 안수를 받은 주기철 목사는, 1926년 1월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합니다. 그는 스스로 사례금을 70원에서 60원으로 깎고, 땅 6천 평 가량을 조금씩 팔아서 구제에 사용합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걸인과 나환자의 벗이 되셨나이다
존귀하신 당신이 그토록 낮아지셨으니 비천한 저는 어디까지 낮아져야겠습니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나는 나환자의 발을 핥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발 앞에 짓밟히는 먼지와 티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기철 목사의 <겸손하기 위하여(1939)> 중에서

1936년,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는 부임 후 첫 설교에서 신사참배 금지를 선언합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범하는 죄'. 이것이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유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1939년 12월 평양노회 임시총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파면을 당하고, 1940년 3월 24일에는 평양 산정현교회가 강제로 폐쇄되기에 이릅니다.

1940년 9월 20일, 일본 경찰에 잡혀가던 주기철 목사는 거리에 서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설교를 전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외면했다가 이 다음 주님이 '고난의 십자가는 어쩌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난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당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주기철 목사를 고문하는 간수의 조롱에, 주기철 목사는 답합니다.

"나는 내 힘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는게 아니오. 오로지 그분의 존재와 사랑 때문이요. 나도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주님이 내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소."

기독교가 비판을 받고 있는 요즈음,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이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그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개와 신앙적 순결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은 오늘날 그와 같은 기독교인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는 신앙적 순결을 도매값으로 여기고 혼합주의와 타협주의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주기철 목사는 당시 항일정신을 가지고, 본인이 십자가를 지고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끝까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삶과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소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