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터넷은 온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한국교회의 설교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기도 하고, 어느 교회 설교든지 청취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여러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몇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게 된다. 그러니 깊이 살펴 이 논지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저 본문과 설교의 내용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문을 읽었지만 제목과도 부합되지 않고, 내용은 더욱 더 다른 데로 흘러가는 것을 많이 듣게 된다. 본문 따로 내용 따로인 것이다. 애석하게도 한국교회에 이러한 설교의 빈도 수가 너무 높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설교를 하는 것은 목회자의 특권이다. 백성들을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임 있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 특권은 책임 있는 내용으로 선포할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한다. 그 메시지의 결론은 언제나 신자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모든 설교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아마도 ‘축복’과 ‘은혜’와 ‘성공’일 것이다. 신앙의 목표는 은혜와 복을 받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과 복은 세상을 향한 헌신과 이웃을 향한 섬김을 목표로 하여 모든 인생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데, 성경의 기본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둘째, 오늘의 설교의 내용을 이 사회와 처음 온 비신자들이 들었을 때에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설교의 공공성을 상실하고 지극히 성경의 내용을 말하면서, 실상은 성경의 내용도 일목요연하지 못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 설교의 대부분은 논리성이 부족하다. 감성에 호소하고 “할렐루야”로 두루뭉수리하게 처리하는 일들이 많다. “믿습니까?” “아멘”에 만족할 것이 아니다.

어떤 설교에는 몇 가지 들을 만한 내용과 예화가 있다. 본문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잡다한 지식들이다. 원어풀이로 지식을 전해 듣고 ‘아 그랬구나’ 하지만, 오늘의 내용과 큰 일치가 없고, 곁가지를 치다 보면 핵심을 상실하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본다. 설교의 목표가 없고, 획을 긋는 내용이 정리가 안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대부분 중소교회에서 설교 중에 종종 사생활이나 가정의 이야기, 자녀들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설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지만, 듣고 있노라면 공적인 시간에 사생활을 실례로 드는 것은 공공성을 사적인 것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듣게 되면 아무런 감흥도 이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회중은 그러한 사적인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오류를 종종 범하게 되는 것은 설교의 공공성을 의식하지 못한 때문이요, 교회가 지극히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들의 아성에 근거한 때문이라 생각도 해 본다.

넷째,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거의 없다. “은혜 받으시기를, 복된 생활이 되시기를,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부분 끝이 난다.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도전이나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만 만족하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끝이다. 항상 적용 가능한 메시지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한두 번은 적용 가능한 메시지가 선포되어 목회자와 성도의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메시지가 현장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좋은 내용이 되어야 하지만, 세상과 비신자들을 향하여 처음 나온 사람들이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되도록, 더 깊은 고민과 설교의 대상을 넓히는 작업이 한국교회에 절실하다고 본다.

다원화된 현대 종교는 너 나 할 것 없이 종교의 도그마에 갇힌 내용을 세속적인 언어로 풀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종교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독특성을 주장하면 백성들이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이 종교적이 되어도 누가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목적인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구원을 얻고 삶의 변화를 유도하고 영생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 내용과 메시지의 선포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메시지는 대부분 현장의 예화를 사용하시면서 백성들의 이해를 돕지 않았던가?

매주일 수많은 한국교회가 동시에 백성들을 가르치고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사회에 이렇게 백성들을 지도하고 가르칠 수 있는 기관이 있는가? 공산주의에도 이러한 조직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한국교회는 이 기회를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지 않는가? 지상파를 타고 흐르는, 품위 있고 번지르한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그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정도의 내용으로 돈을 주면서 내보내는 이유가 말이다! 필자도 이해가 안 되는데 하물며 세상이 어떻게 알 것인가?

설교가 주관적이던 것을 공공화시켜야 하고, 내 교회를 향한 선포지만 세상을 향하고, 신자들을 대상으로 전하지만 불신자들도 알아듣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내용으로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를 향한 역할이고 선교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이제는 울타리를 벗어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여, 사회의 변혁과 문화의 변화을 시도하고 국가가 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길들을 제시하여 영적 리더십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무너져 가는 세속 사회와 민족을 구하는 길이고, 오늘의 아픔과 비극을 통하여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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