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여기서 믿고 받아들이고 참으로 깨닫는 그 상황을 자세하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게 주신 자들’이라는 말이 17장에서는 많이 나온다.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오신 자의 말로 받고, 참으로 깨닫고 알고, 그 말씀을 계속 믿고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귀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바로 여기서 아버지께 기도해 올리신 대상들이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신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대충 믿고 나서 믿었다고 하지 않기 원한다. 그것은 속임 당하는 것이다. 이왕 시간을 투자하고 에너지를 투자하고 모든 것을 투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이 그대로 적용되고 체험되고 이뤄지는 생활을 해야 가치가 있지, 대충 믿는 것은 소용이 없다. 최고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이는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거룩하신 주 예수는 그분의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의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다. 주님은 열한 제자도 아버지께서 주셨다고 분명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영광을 받았다고 고백하신다. 그 적은 무리에게 아버지를 알리시고, 그들이 믿게 되었을 때 주님은 기뻐하셨고 그들에게 영광을 받으셨다고 기도하신다. 그 크신 하나님의, 이 얼마나 낮은 마음이요 겸손인가?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을 읽다 보면 읽기는 쉬운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내용이 심오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어디서 이러한 기도를 드리셨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요한은 주 예수님이 아버지께 깊고 간절하게 기도하신 내용을 기억했다가 이렇게 기록한 것을 생각하면, 역시 주님 가까이에서 주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헤아리고 만질 수 있던 제자였음을 느끼게 된다. 문체는 매우 평이하고 쉽지만 읽을 때마다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요한복음 17장이다.

주님은 떠나시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땅에 있기에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기도했다. 그들을 보전하고 지켜 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본성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에서 멀리 계시다. 또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지켜 달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주셨다. 이름이란 아버지의 인격이며 아버지의 생명이고 아버지 자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계셨던 아들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에 ‘내가 돌아가더라도 그 아버지의 이름은 여전히 이들을 보전해 주셔서 하나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부터 택한 백성들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셨다. ‘보전한다’는 것은 영어로는 ‘keep’, 즉 지킨다는 뜻이다. 시편 121편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분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노래한다. 이사야 27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사 27:2-3). 하나님은 포도원지기가 포도원을 지키듯 이스라엘을 보호하신다. 주님은 아버지의 생명과 능력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켜왔는데, 이제는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여전히 제자들을 지켜주셔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셨다.

‘우리와 같이’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의 하나됨은 단지 서로 만나서 악수하고 웃으면서 인사하는 그런 하나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내면적으로도 그 깊은 속에서 한 마음이 되고 한 뜻이 되고 같은 사랑이 되어 서로 안에 거하며 깊은 속에서 통할 수 있는 그러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두 사람이 어디로 보내심 받더라도 여전히 한 사람 같았다. 열한 제자가 있지만 여전히 한 사람 같이 기도할 수 있었으며 다락방에서 오순절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 같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힘입은 교회들의 특징은 성도들이 연합하고 하나되는 것이다.

서로 싸우고 다투고 분열되는 것은 주님의 기도의 효력을 맛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지키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되는 특징이 있다. 주 예수님의, 보전해 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그 결과로 하나를 이루게 된다. 분열되며 서로 당을 짓고 헐뜯고 싸우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성도들과 하나됨을 떠날 때 보장이 없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진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 안에 머무는 것이다.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으로 지킨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셔서 그 역사를 행하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들을 지켰다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에 세상에 빠지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 슬쩍 슬쩍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늘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들은 죄를 짓지 않고 지금까지 이렇게 경건하게 생활하시는 것이 본인의 능력이라 생각하시면 안 된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셔야 하기에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사 …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따로 떨어져서 혼자 있는 사람은 죄를 짓기 쉽다.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성도들과 하나로 연합한 사람은 지켜지기 쉽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았지만 오직 ‘멸망의 자식’ 하나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팔아 넘긴 유다이다. 열 한 명만 주님이 보전하시고 하나는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 말씀만 지켜도 배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도들의 충만한 기쁨

지금 주님은 십자가로 가시는데, 죽으러 간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다. 교회가 하나된 성도들로 연합한 상태로 있으면,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보전된 상태이며 그 속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다. 초대교회, 성경에 있는 교회에는 기쁨이 많았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 그들 가운데 기쁨이 충만하였다고 말한다. 신약에서 ‘기쁨, 기뻐하라 (카이레인, 헬)’는 말이 70번 넘게 나온다. 복음은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듣고 진리를 듣고 말씀을 들으면 성도들은 기쁘다. 돈을 번 것도 없고 잘 된 것도 없고 일이 풀린 것도 없는데 말씀을 들으면 기쁨이 온다.

사역이란, 사역자란, 성도들의 마음에 기쁨을 더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는 혹 우울하거나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왔더라도,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는 기묘하게도 마음 속에 기쁨이 생긴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다.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부터 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얻은 이 기쁨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이것이 어떻게 왔는지 잘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출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 하나될 수 있는지, 어떻게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는 모두 주님의 기도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