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한 장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문을 적은 것이다. 마태복음 6장에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도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기에 사실은 제자들의 기도문이다. 우리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나 17장은 주님께서 직접 아버지께 드린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야말로 주님의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은 매우 긴데,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5절은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다. 6-19절은 당시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그리고 20절부터는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예수를 믿을 모든 사람, 즉 우리까지 포함한 기도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나아가시기 전, 아버지께 이러한 긴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를 통해 주님은 과연 그 마음 속에 어떤 것을 가지고 계셨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터는 이 기도에 대해 “진정 한량없는 따뜻함과 온전한 마음을 기울인 기도이고, 매우 정직하고 순전하고 깊고 부요하고 넓어서 아무라도 그 깊이를 잴 수 없다”고 말하였다. 루터와 함께 사역했던 멜랑히톤도 “이제까지 하늘에서나 땅에서 성자께서 하나님께 직접 드리신 기도만큼 고차원적이고 거룩하고 그만큼 열매가 있는(오늘날 우리도 다 열매이다) 그렇게 고상하게 들렸던 기도는 없다”고 했다. 또 주석가 벵겔은 “이 기도는 문체가 쉽지만 그렇게 심오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듯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놓고 감탄했다. 또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울 때면 이 기도를 읽으면서 묵상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원하심

우리도 그렇지만 주님도 기도를 하실 때는 어떤 갈망이 있고 마음 속에 소원이 있으시다. 그래서 17장에는 주님의 거룩한 갈망(desire)이 있다.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I do ask)”, 20절 “내가 비옵는 것은(간절히 빈다는 뜻)”, 24절 “원하옵나이다(Father, I desire, 내가 갈망하옵나이다)”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잘 해야 하는데, 기도를 하려면 선한 갈망을 갖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위 상황들을 살피며 선한 마음으로 선한 뜻을 갖기를 원해야 한다. 그럴 때 좋은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중보자가 될 수 있다. 또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말씀과 함께 좋은 서적들을 잘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면 전에 없었던 영적인 소원이 생겨난다. 그럴 때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겠다.

영광을 위한 주님의 기도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이 기도를 드리실 때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죄나 문제로 인하여 아버지와의 교제가 깨진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고개를 들고 아버지께 기도하실 수 있었다. 물론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은 세리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늘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께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주님은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을 먼저 하셨다. 주님은 ‘때’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셨다. 당시 주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지금 이 지점에 오셨을 때에는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때를 알아서 일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주님이 복음서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늘 때를 알아서 하신다. 우리도 성령 안에서 생활할 때 이렇게 때를 알게 된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이는 결국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뜻이다. ‘아버지여 나는 나를 비워서 세상에 왔습니다. 나는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으려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하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리고 내가 원래 가졌던 영광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영광스럽게 되는 길을 통해서 나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이 지점에서 바라시는 것은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로부터 오는 영광이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첫째로 아들이 마음 속에 품었던 소원, 갈망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려고 창조하셨다(사 43:7). 이 ‘영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독사’인데 ‘도케오’라는 말이 어원이다. ‘도케오’는 ‘~같이 보인다, 견해, 칭찬, 평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빛이시며 거룩이시고 또 의로우신 분이신데, 이러한 하나님의 어떠함이 ‘아, 영광이구나’ 하면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날 때 그것이 영광이다. 하나님 같아 보이는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빛이나 광채로 눈이 부셔서 아무도 그 속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계셨던 분이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 영광을 비우고 오셨던 것이다. 만일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의 영광을 그대로 가지고 오셨다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을 썼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가 첫 번째로 영광을 나타내신 일’이라고 했고, 요한 사도는 우리가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다. 영광이라는 단어 하나도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라는 말은 백성들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분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셔야 했던 것이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독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셔서 십자가에 그렇게 처참하게 죽게 하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 바이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진리와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최대한 나타난 것이다. 이를 우리 주님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표현하시며, 앞으로 당할 십자가 사건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피땀 흘리면서 돌아가셨지만, 그 본질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레위기 1장의 번제가 의미하는 바이다. 번제는 속죄제나 속건제와 그 본질이 다르다. 번제는 온전히 제물을 불사르는 것인데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먼저는 속죄가 아니고, 온전히 순종의 제물로 자신을 불태우셔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를 성경이 아니고 어떻게 알겠는가? 그분의 온전한 순종은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게 하였다. 우리가 어떻게 이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영광 돌린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선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다는 것을 아셨다. 사람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주님은 당신에게 주신 선물인 사람들을 귀하게 생각하면서 지금 기도하신다. 그 중에는 나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영생(eternal life)’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로, 인간이 원래 갖고 태어나는 그 생명이 아니다.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이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 갖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또 내세에까지 이 영생은 이어진다.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은 그 나라에서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임무는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 영생을 주게 하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만민(all flesh)’, 즉 믿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인류(all mankind)를 아들이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신 뒤에도 이 말씀을 하셨다(마 28:18-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왜 아들에게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