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가졌으니’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질그릇은 그 자체로 별 가치가 없습니다. 흙을 이겨서 만든 질그릇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요사이 그냥 돈 안받고 줘도 귀찮다고 가져갈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를 담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 질그릇 속에 꿀을 담으면 꿀질그릇이 되어요. 금을 담으면 금그릇이 되어요. 은을 담으면 은그릇이 되어요.

문제는 질그릇에 있지 않고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배와 질그릇은 하나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보배로운 신분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을 철폐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바로 이 예수님이 우리 형편없는 질그릇 속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그릇 같은 여러분 속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보배가 되어서 들어오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보배로운 그릇이 된 것입니까?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모시면 질그릇과 삶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여러분은 옛사람이 아닙니다. 새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플러스 예수님 보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의 외부 모습만 보고 저 질그릇 같은 사람, 저 촌놈,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못난 사람 그렇게 비평할지 모르지만 몰라서 그래요. 진짜 자기가 무식해서 그런 소리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속에 보배인 예수님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총이 허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은총 중에 얼마간은 오늘 성경에 말했는데

<본론>

1.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음

첫째로,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아 놓으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이런 것이 우리를 우겨쌉니다. 여러분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 스스로를 살펴보면 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있어요. 왜 내가 이 말 하냐면 저도 있는데요. 이제 은퇴를 해서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다 떠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아직 있어요. 그것을 보면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동안에 누구든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이러한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주위를 감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겨싸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능력이 있어요. 아무리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니까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하고 정신병에 걸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능히 극복하고 살아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욥이 당한 시련처럼 우리가 시련을 당해도 욥이 인내를 하므로 이긴 것처럼 우리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스 땅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소유물은 양이 7천마리요, 낙타가 3천마리, 소가 5백겨리, 암나귀가 5백마리, 종도 많이 있었고 동방 사람 중에 제일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목축업이 돈많고 적은 판가름을 하는 업이 되었기 때문에 이 욥은 목축업에서 손꼽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욥을 참수했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하는 일은 참소하는 것입니다. 따라 다니면서 우리 개인 삶을 늘 참소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로 말미암아 아내를 제외하고 자녀들, 종들, 재산, 건강, 다 잃어버리고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견딘 결과에 욥기 42장 10절로 13절에 보면 “야훼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야훼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야훼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더라”.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니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했을 때 인내하면 하나님은 그 기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더 위대한 삶을 살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나 또한 이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가득하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가득하지 않아요.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가득해도 그것을 이길 능력도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 고통을 넉넉히 이길 힘과 능력의 근원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수가 없어요. 여기 가겠다면 엘리사가 먼저 하나님 계시를 받아서 왕에게 이스라엘 왕에게 이야기를 해서 방어하게 합니다. 저기 가겠다면 먼저 와서 방어를 하고 이스라엘을 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도록 군대를 보내서 첩첩이 둘러쌌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엘리사를 섬기는 종이 밖에 나가서 기지개를 켜고 눈을 비비고 보니까 아이구 온 산에 아람 군대의 군기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혼비백산해서 방에 뛰어 들어가서 “주인 어르신 큰일 났습니다. 아람의 군대가 우리를 완전히 첩첩히 둘러쌌으니 이제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그렇지 않다. 우리하고 같이 있는 분이 아람 군대보다 많다. 하나님이여 이 청년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하나님이 청년의 눈을 열어 주시니 청년이 보니까 아람군대와 엘리사 사이에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가득하게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람이 군대를 보내어서 엘리사를 포로로 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사에게 모두다 포로로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 보기에는 약하게 보여도 주님께서 그 은혜로 우리를 첩첩히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할 자가 없느니라”(엡 2:8~9)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고, 불의와 추악에서 해방을 얻게 하고, 질병에서 치료받게 하고, 가난과 곤궁에서 해방되게 하고, 죽음과 멸망에서 건져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첩첩히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우리를 점령할 수가 없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가 우리 가운데 계시므로 주의 능력과 권세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데 누가 우리를 점령한다 말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리므로 그 공로를 통해서 마귀의 권세를 다 멸해 버린 것입니다.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 속에 계신 예수님께 의지하고 감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2.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음

둘째로, 이 성경은 말하기를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한다.

답답한 일 당할 때 많지요? 저는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이 다 나가고 저도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저의 옆에 어떤 자매님 한분이 앉아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참 특별한 기도를 해요.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보리 보리보리 가을보리 /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보리보리 보리보리 가을보리.

하나님 봄보리는 있는데 가을보리는 모르겠어요. 봄보리는 있는 가을보리가 뭡니까?”

그래서 내가 자매님! 무슨 기도를 그런 기도를 합니까? 그러니까 깜짝 놀라더니 “아이구, 자꾸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가을보리를 믿으라고 하는데 봄보리는 있는데 가을보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가을보리가 어디 있는지 좀 가르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구 답답해. 내가 답답해. 봄보리 가을보리가 아니고 갈보리라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 이름인데 거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산이에요. 어디 봄보리와 가을보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구 그렇게 간단한 것을 안 깨닫게 해주시니까 답답했지요.”

답답하려면 봄보리, 가을보리라도 답답해져요. 우리가 이 세상에 계획하고 바라는 일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잘 풀려가면 답답할 일이 하나도 없지 안풀리니까 답답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사실 답답할 때 자기 혼자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조언을 구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이웃의 조언을 구하십시오. 여러분 개미 보십시오. 개미가 개미집을 짓고 건축을 하는데 참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도 없고 인도자도 없어요. 저그끼리 다 모여가지고서 어떻게 의논을 하는지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혼자 하려고 하면 안돼요. 많은 사람이 개미처럼 모여가지고서 서로 힘을 합쳐서 살면 답답해 답답해 답답해 할 필요없이 일이 잘 풀리는 것입니다.

수많은 답답한 일을 당해도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될 것은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 답답한 일을 당한다고 낙심해서 됩니까? 우리가 성경에 보면 요셉은 굉장히 답답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인 것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마지막 열한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해서 채색옷을 지어 입히기 때문에 다른 아들들이 다 시기를 했어요. 그런데 꿈을 꾸는데 꿈을 자기가 제일 잘되는 꿈을 꾸었어요. 아침 밥을 먹을 때 “형들아 내 말 들어라. 형들과 내가 추수하러 갔는데 내 단은 가운데 서고 열한단이 나를 둘러서 절을 하더라.” 아이 형들이 기분 나뻐 할 것 아닙니까. 나라도 기분 나빠요. 형들이 밥먹다가 숟가락을 던져버리고 “야 이 자식아, 네가 우리 임금이 된다 말이가? 건방지게..”

그런데 요셉이 좀 답답하기는 답답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 다음에 또 아버지하고 형들하고 다 함께 아침 식사하는데 “여러분 내 말을 들으세요. 내가 어제 저녁에 꿈을 꾸는데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나를 향해서 절을 합디다.” 해와 달은 아버지, 어머니고, 열한별은 형들 가족들 아닙니까? 그러니 아버지조차 화가 났습니다. “야 이놈의 자식아, 무슨 말을 그런 말을 하느냐? 애비가 너에게 와서 절한다 말이가?” 그런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아버지 심부름으로 먹을 음식 들고 목축을 하는데 방문하러 갔다가 잡혀 가지고서 아라비안 대상에게 종으로 팔렸습니다. 20냥 받고 형들이 종으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머나먼 객지에 종으로 가서 바로왕의 경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또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게 요셉에게는 인생의 승리의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시므로 보디발의 집에서 하는 일마다 잘되니까 보디발이 가정 총무를 삼았습니다. 가정총무를 삼아서 이제 가정 일을 보는데 아침 해가 돋을 때쯤 되어서 안청에 볼일이 있어서 일보러 들어갔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늦잠을 자고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에서 온 총각이 일보러 들어왔거든 그런데 이 요셉이 절세 미남이라. 인물이 좋았어요.

요사이 우리 텔레비에 보면 텔레비 광고에 옛날에는 인물 좋은 여자들만 쓰더니만 요새는 인물 좋은 남자들도 많이 써요. 냉장고 광고, 김치광고…. 이게 여자들만 쓸 곳에 남자들을 써요. 남자들이 요사이 잘 팔리는가 봐. 아 그런데 요셉이 절세 미남이라 이 보디발의 아내가 반해 있다가 요셉을 보고 “야, 종들 다 밭에 일하러 가고 우리 남편도 이미 출근했으니까 나하고 같이 즐기자.” 옷을 잡고 “우리 방으로 들어가자.” 요셉이 “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절대 그런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뿌리쳐 나오니까 옷이 그 손에 잡혀서 옷이 벗겨졌어요. 옷이 벗겨진 채 요셉이 도망을 쳐 나왔으니까 이제 죽었지 뭐. 부인이 고함을 치면서 “사람 살려라. 요셉이 나를 겁간하러 왔다가 내가 고함을 치니까 옷을 벗어놓고 도망을 쳤다.” 그리고 웃옷을 흔드니까 뭐 변명할 수가 없어서 실컷 얻어맞고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답답한 일만 자꾸 당해요. 시위대 뜰에 열심히 또 일을 하니까 간수장이 너무 일을 착실하게 하는지라 감옥의 일은 다 요셉에게 맡겼어요. 그런데 거기에 희한한 장관도 있지요. 애굽의 술 장관과 떡 장관이 모의를 하다가 잡혀 가지고서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술 장관이 있고 떡 장관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들의 꿈을 요셉이 해석해 주었는데 꿈대로 되었어요. 꿈대로 떡장관은 교수형을 당하고 술장관은 복직이 되었는데 그 다음 바로왕이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을 못해요. 그런데 이 술 장관이 무릎을 탁 치면서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이라는 이스라엘에서 온 청년이 그 꿈을 해석했는데 그대로 되었다.”고 하니까 “빨리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요셉이 수염을 깎고 옷을 잘 차려입고 인물이 훤한 청년이 바로왕 앞에 서서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는데 “이 나라에 7년 풍년이 오고난 다음에 7년 흉년이 올 것입니다. 바로왕께서 특별히 머리 좋은 사람을 세워 7년 풍년 때 곡식을 다 쌓아 놓았다가 7년 흉년 때 그것을 풀어 놓으면 안 굶어 죽고 이 나라가 삽니다.”

그러니까 이 바로왕이 요셉의 꿈 해석을 듣고 너무 놀래가지고서 말도 못해요. 그러더니만 무릎을 치면서 “그 지혜로운 사람 너밖에 더 있겠느냐? 오늘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명하노라.” 참 사람팔자 시간문제라. 이것이 요셉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세상을 따라 낙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셉은 거듭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며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온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기근이 드니까 형들이 가족을 다 데리고 왔을 때 요셉에게 형들이 엎드려서 절을 할 때 요셉이 하는 말이 “형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죄를 다 용서해 주고 그리고 가족들을 다 먹여 살려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참 훌륭한 사람이지요. 요셉은 사랑이 있었어요. 사랑이란 여러분 무엇이냐면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허물을 펼쳐놓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고지고지 다 펼쳐서 고자질하는 것은 미움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허물을 덮어주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상처를 싹 갈겨서 헤치지 않습니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리고 욕하지 아니하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찾기가 참 힘들어요. 그런데 요셉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로 21절에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답답한 일을 당할수록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냥 편안하면 좋은 일이 안생겨나요. 답답한 일이 있어야 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로 5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인생의 잔이 넘치게 되려고 하면 답답한 일을 당해야 돼요. 평범하면 그렇게 안돼요. 답답한 일을 당하면 주께서 속에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내 속에 보배가 있는데 가만히 있는 보배는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어려울 때 보배가 빛을 발해야지. 여러분이 답답한 일을 당할 때 주님께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답답한 일을 당해도 그것이 나의 생애 속에 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답답한 일을 당할수록 우리가 계급이 높아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3.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음

셋째로, 박해를 당해도 버린 바 되지 않는다.

박해를 가하는 목적이 뭡니까? 버림받게 하기 위해서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우리가 형제간 중에 박해를 받으면 제일 대접을 못 받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박해를 하면 죽여 버리려고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믿는 자들을 얼마나 박해합니까? 죽여버리려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얼마나 박해합니까? 멸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보배를 가진 사람은 박해를 받을수록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더 왕성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온 세상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우리를 박해해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이기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을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성령 받고 나니까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박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역사해서 베드로가 하루 전도에 3천명, 그 다음날 5천명, 구름 떼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들어와서 예루살렘 교회가 컸습니다. 박해를 당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더 도움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박해를 받을 때 더욱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요.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난당할 때 박해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박해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더 주시고 더 은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박해하는 원수 앞에서 우리를 축복해 주고 용용 죽겠지 용용 죽겠지 이렇게 하나님이 조롱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목전 앞에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가 와야 하나님이 그 목전에서 밥상 차려줘요. 그러므로 원수가 한길로 오면 나중에 일곱길로 도망을 치고 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밥상 차려 주므로 우리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원수가 우리보고 겁을 내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로 12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세계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배를 가진 우리는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박해를 하는 것은 멸함을 받으라고 박해를 하는데 오늘날 세계 거의 전체 문명국은 다 예수 믿는 나라입니다.

지도 펴 보세요. 내가 거짓말 하는가. 이 세상에 인류 세계 국가, 인류 문명 국가는 다 예수 믿는 국가에요. 북한하고 남한을 비교해 보세요. 북한이 잘삽니까? 남한이 잘삽니까? 똑같이 잘살려고 노력했는데 우리가 이처럼 북한보다 엄청나게 잘사는 이유는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2백만이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북한에서 기독교를 그렇게 박해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큰 축복을 준 것은 북한이 박해하기 때문에 북한 앞에서 용용 죽겠지 하고서 주님이 밥상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하므로 기독교가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문화와 문명을 이끌어가는 주체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기독교인들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잘되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한마디라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예수 안 믿는 사람 기도하는 것 봤어요? 예수 안 믿는 사람 나라와 민족 위해서 기도하는 것 봤어요? 나는 아직 못 봤어요. 여러분은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예수 믿는 여러분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시는 이상 이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4.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음

넷째로, 이 성경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최근 8월 23일 필리핀에서 12년째 빈민사역을 해 온 조태환 선교사가 괴한의 총탄에 거꾸러졌습니다. 야~ 거꾸러졌으니까 저 사람은 이제 망했구나. 아니요. 성경은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요 14:1~3)

예수님이 필리핀에 있는 조태환 목사님이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 와서 손잡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조태환 선교사 망한 것 아닙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사는 것도 좋지만 이 땅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것이 더 좋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인데 죽고 난 다음에 주를 의지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고 주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면 부자처럼 아무리 기도해도 그때는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천국을 예비해 놓았으니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하늘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언제나 흥하지 망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흥하게 하시지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지 실패하고 낭패하고 패배하고 빈 손 들고 버림받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놓지 않습니다.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신데요.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천국과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 주님이신데 주님은 십자가의 권세를 통해서 우리와 같이 계신데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지요. 불의와 추악을 멸하셨지요. 질병을 멸하셨지요. 저주와 가난을 멸하셨지요. 죽음을 멸하셨지요. 주님이 멸하신 성령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5.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짐

그 다음 다섯 번째, 예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항상 우리 몸에 짊어진다. 어떻게 짊어지느냐. 우리가 생각을 통해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영생 내 영생.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께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께서 내 안에 살으셔서 언제나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 것은 우리가 생각을 통해서, 꿈과 환상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을 짊어지면 짊어진 만큼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죽음을 위해서 죽은 것 아닙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었으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예수 죽음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 죽음을 바라보고, 예수 죽음 내 죽음이라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음이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 죽음이 지금 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은 마땅히 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속에는 넘치는 기쁨과 소망과 사랑과 능력이 있습니다.

6. 예수를 위한 죽음으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남

그 다음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4장 11절로 12절에 있는 말씀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꼭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해놓았는데 이 성경에 보세요.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넘겨지는 우리가 사는데 감기가 들리고 혹은 암이 들리고 관절염, 신경통, 고통, 죽음에 넘겨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를 위해서 그런 병이 온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다. 예수를 위해서 그런 병이 온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다. 예수를 위해서 그런 것이 온다. 이것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입니까? 그것 상당히 발전적인 신학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고통당할 때 마귀가 와서 우리 고통당하니까 우리 대적하자 그러는데 좀 더 발전적인 신앙을 보면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 왜냐,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그릇이 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만 하지 마십시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빛이 되는 것입니다. 환한 대낮에 촛불이나 등불 들고 올라가봤자 아무 효과가 없는데 어두워지면 효과가 있거든. 그러므로 어둠이 나쁘기는 나쁘지만 필요한 나쁜 것입니다. 필요악이에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목마름은 나쁘지요. 그러나 목마름이 있어야 물이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지 않으면 물이 필요 없어요. 그러나 목마르면 물이 감로수에요. 배고픔도 배가 고프면 음식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배가 부르면 음식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 이 세상 일이라는 것이 다 전 플러스, 마이너스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어떤 자매님이 내게 와서 목사님, 이 세상에서 제일 짝이 안 맞는 것이 자기 짝입니다. 남편에게 제일 실제로 짝이 안 맞는 것이 아내고, 아내에게 제일 밉상 꾸러기가 남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 그렇게 안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 줄 알고 사세요. 내가 설교를 들었다고…. 그런데 가만히 그 자매님이 가고 난 다음에 생각해보니 참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남의 밥에 콩이 더 커 보인다고 남의 남편이 더 훌륭하게 보이고 아내가 더 훌륭하게 보이는데 또 실제 그 집에 가서 물어보면 또 안 그래요. 물론 대답은 안해 주겠지만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 서로 정반합이 되는 거에요. 이러므로 우리가 병이 들면은 그 병 덕분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우리 살아있는 사람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병이 안 들면 신유가 소용이 없어요. 아무리 예수님 병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있어도 내가 병이 안 들었으니까 그 권능 나타낼 여과가 있습니까? 병이 들어줘야지. 예수님을 위해서 병이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야~ 병 좀 들어다오. 그래야 내가 한번 병고쳐서 주님이 병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게 병 좀 들어다오.

그래서 이 성경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으면 주님 빨리 영광 나타내시옵소서. 자 병들어 놓았으니까 주님 빨리 고치시옵소서. 자 배가 고프니까 빨리 음식 주시옵소서. 목 마르니까 물 주시옵소서. 가난하니까 빨리 부요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예수쟁이 칭찬받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빛을 나타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를 위한 고통이기 때문에 그 고통 속에만 있으면 아무 효과가 없어요. 여러분이 병 낫고 축복받고 은혜 받아야 예수님이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끝까지 고통 받는 것이 신앙이다. 끝까지 괴로움을 받고 끝까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다. 천만에요. 그렇게 있으면 사람들이 보고서 예수쟁이 아무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저렇게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다가 착 나아야 와~ 대단하다 대단해!

베드로가 미문가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일어나니까 하루에 5천명이 회개를 했어요. 앉은뱅이는 예수의 영광을 위해서 앉은뱅이 된 것입니다. 지 팔자가 나빠서 앉은뱅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앉은뱅이 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 없었으면 못 일으켰지요. 못 일으켰으면 5천명이 안 믿었지요. 그런 사유가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 병들었거든 영원히 그 병에 들어있으면 안돼요. 큰일나. 나아야 돼. 병 나아야 예수님께 영광이 되지. 낫기 위해서 병들어 있는 거에요. 낫기 위해서 병들어 있으니까 나을 줄 확신 하십시오. 부자 되기 위해서 가난한 것입니다 지금.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위해서 여러분이 그 그릇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죽음이 육체에 나타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게 항상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한 그릇이므로 좋은 것이다. 나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안믿는 사람에게도 좋고, 다 좋다. 하하하.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때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못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쓰시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도 가만히 설교하려고 기다리면서 저는 이 설교하러 아침 6시에 나옵니다. 이 4부 설교는 1시에 하는데 1시 설교하기 위해서 새벽 6시에 나와가지고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기다리면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얼마나 못난 촌놈인데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31번지에서 태어나서 시골에서 아주 못난 놈이요. 오늘날 그래도 사람들이 알아주는 주의 종이 되고 세계가 알아주는 주의 종이 된 것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노? 내가 나를 바라볼 때는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대답은 하나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으면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 온통 예수 생명인 것입니다. 온통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자좋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요, 외로운 사람도 아니요, 주께서 같이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보배이신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고 예수님이 여러분의 보배인 것을 꿈꾸고 그것을 믿고 예수가 내 보배라고 입으로 시인하고 찬미하며 사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