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김준곤 목사가 대학생선교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주요 사역을 연도별로 정리한 것이다.

* 국회조찬기도회 시작(1965.2.27)
김준곤 목사는 1963년과 1964년 미국 국회 상·하원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공식 소개되고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1964년경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와 국회조찬기도회를 주관하는 국제기독교지도자협의회(ICL, International Christian Leadership) 총무 로빈슨 씨와 국제 C.C.C. 이사였고, 미국 국회조찬기도회 담임목사였던 하버슨 박사가 한국을 방문,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국회조찬기도회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김준곤 목사는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박현숙 장로, 김종필 의원과 의논했는데, 그들은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면서 국회 사무처에 등록된 기독 의원 약 30명의 명단을 건네주었다. 국회조찬기도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초청했다.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전 국무총리)과 김영삼 당시 민중당 원내총무(전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등 20명 정도가 참석했다(모임 장소는 구 조선호텔). 이때가 1965년 3·1절을 앞둔 2월 27일이었다.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복음 안에서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린 최초의 모임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정례화시키기 위해 국가조찬기도회 조직 방법을 참석 의원들에게 물었던 바 “김준곤 목사가 임명을 해 달라”고 위임해 주어서 여당 총무에 김종필 의원, 야당 총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위촉하고, 1년 동안 매주 모이게 되었다.

* 국가조찬기도회 창설(1966.3.8)
국회조찬기도회로 모이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미국처럼 대통령 조찬기도회로 모이자는 제안이 있어 김종필 의장을 통해 박 대통령의 뜻을 타진한 바 기쁘게 참석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그래서 한국 C.C.C.가 그 준비 일체를 담당했다. 외국인 관계의 코디네이터는 나일스 베커 선교사 부부가 맡아 수고했다.

그리하여 1966년 3월 8일 7시 30분, 구 조선호텔 볼룸에서 제1회 한국 국가조찬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국가조찬기도회는 미국보다 9년 늦게 시작되었지만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렸다.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로빈슨 총무, 하버슨 박사 등 미국 ICL에서도 5명 참석)과 브라운 주한 대사 등 각국 외교 사절, 삼부 요인,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노기남 천주교 대주교 등 267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 대통령은 기도회 5분 전에 긴급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함을 통보해 옴으로써 제1회 때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2회 때부터는 계속 참석하였다.

한국 ICL 회장 박현숙 의원의 개회사로 시작된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는 김영삼 당시 원내총무가 시편 23편을, 김종필 의장이 고린도전서 13장을 봉독하고, 김활란 박사, 강신명 목사, 유호준 목사, 최태섭 장로와 천주교 노기남 대주교 등이 참석, 순서를 담당했다.

* 민족복음화의 제3의 집단, 나사렛형제들 창단 (1968.8.26)
1968년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영락 베다니마을에서 전국 C.C.C. 학사들 108명이 모여 수련회를 갖고 나사렛형제들이 창립되었다. 김준곤 목사님은 나사렛형제들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제3의 집단이 되어줄 것을 역설하였다. 정정섭 장로(기아대책 회장), 두상달 장로(칠성산업 회장), 주수일 장로(칠성섬유 회장), 손동아 목사(인왕교회 담임목사), 서일영 장로((주)핸디 회장), 이상운 장로(전 고합그룹 회장), 홍정길 목사(남서울 은혜교회), 김안신 목사(일본 선교사), 박세환 장로(예비역 육군대장), 김경수 장로(재미 치과의사) 등 김준곤 목사의 제자들은 김준곤 목사를 도와 민족복음화운동에 헌신하였다.

* 민족복음화의 최소 단위 ‘순’과 사랑방운동 전개
김준곤 목사는 민족의 입체적 복음화를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민족복음화의 가장 작은 단위로 순(筍)을 만들었다. 7명에서 12명까지를 한 단위로 하는 순은 가정(사회의 기본 단위)과 교회(영적 공동체의 단위) 사이에 사회구조론적 생세포 사이에서 새로운 단원으로서 지역별, 남녀별, 직능별, 소사이어티 특수 사명을 고려해서 다양한 형태를 형성하여 생세포 조직망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1727년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신도들이 24시간 연쇄기도를 100년간 계속했던 것처럼 기도의 불을 끄지 않는 운동이었다. 이를 통해 전국 59,000 자연 부락까지 사랑방운동을 통해 생세포적 전도와 순모임을 뿌리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리더인 순장과 따르는 사람들을 순원이라고 하여 대학과 민족의 구석구석까지 순모임이 조직되었다. 1970년대에는 마을(里) 순장, 面단위 순장, 郡순장 등까지 조직하여 민족복음화 요원 훈련을 받은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사랑방에 모여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면서 교회가 없는 마을에 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사랑방은 한국적인 문화 속에만 있는 것으로 김준곤 목사는 이를 적용하여 민족복음화를 위한 핵심요원 훈련의 공동체 훈련으로 만들어내었다. 지금도 CCC 대학생들은 공동체성 강화와 사역의 효율성을 위해 사랑방공동체훈련을 받고 있다.

* 군대복음화운동 전개(전군신자화운동, 1969)
당시 기독교를 빙자한 모 종교단체가 주관하는 승공(勝共)교육이 군대에서 확산되고 있던 1969년, 한국 교회는 그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마침 박정희 대통령은 군대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를 갖고 김준곤 목사에게 군인들의 사상 무장과 정신 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해 왔다.

김준곤 목사는 신앙전력화가 군대 내 반공 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거라며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하였다. 전군신자화운동으로 강한 정신력을 갖춘 군대를 만드는 것은 물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흔쾌한 동의로 전군신자화운동이 시작되었고, 김준곤 목사는 중령 이상 중장까지 고급 간부 2,472명에게 하루에 오전 오후로 나누어 두 차례 2시간 반씩 6일간 기독교와 공산주의, 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1973년 5월 1일에 열린 국가조찬기도회 메시지에서 “전군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으로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있다면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였다.

전군신자화운동은 현재 군 복음화를 위한 비전2020운동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즉 매년 20만 명의 군인을 전도해서 세례를 주면 2020년이 되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갖고 군복음화운동을 펼쳐가고 있다.

* 민족복음화운동 선언(1970.12.31. 0시 CBS)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1970년 12월 31일 0시,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김준곤 목사는 기독교방송(CBS)을 통해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민족복음화운동’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리고 민족복음화운동을 가속화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민족복음화요원강습회’(1970.12.31~1971.1.3. 수원 서울농대)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함과 동시에 1970년 12월 31일부터 1971년 1월 3일까지 수원 서울대 농과대학에서 450여 명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민족복음화운동요원강습회’를 실시하였다.

대전 충무체육관 1만명‘민족복음화요원강습회’(1971.8.1 ~8.5)
이어 1971년 8월 1일부터 5일까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만여 명이 모여 한국 사상 최초·최대 규모의 청년·학생 전도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민족 복음화를 위한 ‘민족복음화운동요원강습회’는 전국적으로 계속 실시하였다.

* 면 단위 교회 교사 전도 훈련(1972.12~1973.2)
전국 농어촌 면(面) 단위 교회 주일학교 교사 14,600명을 대상으로 4박 5일간 전도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후 민족 복음화를 위한 ‘민족복음화운동요원강습회’는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 읍 단위 300 시범 교회 전도훈련(1972.4.10~28)
전국 시범 교회 교역자 전도 훈련이 1972년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본부에서 열렸다. 이어 전국 시범 교회 평신도요원 전도훈련강습회가 4월 24일부터 28일까지 본부 대강당에서 서울신학대생 123명을 포함, 총 404명이 참여하여 민족 복음화의 비전을 마음속에 새겼다.

* 춘천 성시화운동(1972.7.31~8.4)
민족복음화운동의 총체적 전략을 춘천시에 결집하여 민족 복음화 이전에 한 도시만이라도 완전 복음화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비전에서 시작되었다. 춘천 성시화운동은 한 마디로 민족복음화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다.

춘천 성시화운동의 모델은 칼빈의 제네바와 낙도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대신 거지 모델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2005년 성시화운동 총재를 맡아 전국과 해외를 다니시며 성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성시화운동은 전교회가 전복음을 전시민에게 전한다.”는 3전 전략을 세워 복음전도와 함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성시화운동으로 거룩한 도시, 깨끗한 도시, 사랑이 넘치는 도시, 범죄 없는 도시를 만들기를 원하였다.

* 엑스플로 ’74 대회(1974.8.13~18)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27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는데, 32만 3419명이 등록하여 5박 6일 동안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밤에는 100만여 명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철야기도를 했고, 낮에는 전도 훈련을 받았다. 당시 숙박시설이 부족해 서울시내 5,000개 교실에서 참석자들이 잠을 잤으며, 김준곤 목사는 보일러 스팀을 활용한 대형 밥솥을 개발하여 밥을 짓는 것을 해결하였다.

특히 8월 15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의해 서거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뜨겁게 기도했다.

엑스플로 ‘74대회는 한국 교회의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74년 7월부터 1975년 7월까지 임의 무작위로 전국 1,000 교회의 주보를 모아서 분석한 결과 110만 명의 교회 출석수가 증가하여 한국 교회 전체 33퍼센트가 성장했다. 헌금은 64퍼센트가 증가했다. 또 하루에 6개씩 교회가 생겨났다.

엑스플로 ’74 대회를 준비하면서 당시 74명의 간사(전임간사 44명, 임시간사 30명)와 함께 1972년 10월 말경 입석수양관에서 3박 4일간 수련회를 하면서 엑스플로 ’74에 대한 불가능한 이유를 말하라고 했더니 74가지가 나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많은 어려움을 가능으로 바꿔 주셨다. 지금까지 5박6일간 합숙전도훈련의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 나라를 위한 40일 금식 기도(1976.12.3~1977.1.12)
베트남이 공산화되고, 북한 김일성이 중국으로 가서 모택동을 만나는 등 불안한 시국에서 19명의 간사들과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였다. 이후 김준곤 목사와 한국CCC는 매년 12월 말에 3박4일씩 나라와 민족을 위해 8,000여명의 대학생들이 도별로 모여 금식기도회를 갖고 있었다.

* ‘예수칼럼’ 신문 연재(1979.10.1~1981.9)
김준곤 목사는 한국 최초로 한국의 주요 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기독교 신앙 칼럼인 <예수칼럼>을 연재하였다.

<예수칼럼>은 1979년 10월 1일부터 1981년 9월 말일까지 만 2년간 <조선일보>에 매일 게재되었고, 1979년 10월 1일부터 1980년 8월말일까지 <동아일보>에 매일 게재되었다. 한국 일간 신문에 기독교 칼럼이 연재되기는 <예수칼럼>이 처음이었다. 예수칼럼은 파스칼의 『팡세』에 필적할 만한 현대적인 고전으로 평가받으며 단행본으로 묶여져 최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문체의 간결성과 영성 깊은 심오한 기독교 사상은 독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안겨 주었으며, 수많은 독자들과 젊은 지성인들의 영혼을 감동시켰다.

* 구국 비상회개 금식기도운동(1980.2.16~3.20)
김준곤 목사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후 우리 민족이 여러모로 긴박하고 험난한 시련을 겪고 있는 중 한얼산기도원에서 구국 비상회개 금식기도운동을 전개하였다. 7대 일간지, 2개 텔레비전 방영을 비롯한 교계지, 방송, 전단, 포스터 등 각종 매스컴을 통하여 캠페인도 실시했다.

* ’80세계복음화대성회(1980.8.12~15)-나는 찾았네’(Here’s Life)
김준곤 목사는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80세계복음화대성회 마지막 날 밤 헌신예배 때 한국 주도의 선교사 시대를 열 것을 역설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참석자들에게 (1)외국 선교 위해 기도할 것, (2)선교 후원에 참여할 것, (3)대신 헌신할 것, (4)본인이 장·단기로 헌신할 것 등 네 가지를 도전했다. 그때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장·단기 선교사로 서약 헌신하였고, 지금 세계 선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 ’84 세계기도대성회(1984.6.6~9)
1984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영락교회에서 각국 교회 대표와 국내 교역자, 평신도 지도자, 부녀 지도자 등 4,000명이 모여 국제기도세미나를 개최했다. 6월 6일부터 9일까지 뚝섬공원에서 70여 개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 한·일 목회자 전도훈련(1985.5.20~24)
1960년대 초부터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고 국제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와 함께 일본의 주요 대학을 순회하며 순회강연을 했던 김준곤 목사는 한국과 일본 목회자 각 300명씩을 초청하여 C.C.C. 부암동 훈련원에서 전도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개인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자매결연을 맺어 한일 협력선교의 계기를 마련했다.

* 엑스플로 ’85(1985.12.28~1986.1.1)
전세계 95개 도시 동시 위성 집회인 엑스플로 ‘85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김준곤 목사는 서울 장충체육관, 광주 실내체육관 등 우리나라 6개 주요 도시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이 기간 중 빌 브라잇 박사는 서울에 오셔서 전세계에 말씀을 전했다. 전세계 95개 도시에서 인공위성을 통해 집회를 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뉴 라이프 마닐라 2000(1990.7.6~8.13)-최초 단기선교
김준곤 목사는 필리핀 마닐라에 3,000여명의 대학생 단기선교팀을 파송했다. 이는 한국 교회 최초의 단기선교이자 공식적으로 대학생과 평신도 단기선교사의 시대를 열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단기선교 사역을 하고 있으며, C.C.C.는 매년 10여 개국에 3천여 명의 대학생들을 여름과 겨울 방학에 파송하여 단기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 SM2000대회(1995.5.20) -10만 대학생통일봉사단 입단식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7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학생통일봉사단 입단 헌신서약식에서 대학생통일봉사단은 ‘한 손에는 복음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쌍손선교) 북한선교와 세계 선교에 헌신했다(서명자 수는 10만 명). 그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4,000여 명의 지도자들도 함께했다.

* 세계선교대회(GCOWEⅡ, 1995.5.17~5.25)
기독교UN 총회라고 불리는 세계선교대회(GCOWEⅡ)는 전세계 165개국 4,500여 명의 지도자가 참석하여 횃불센터, 충현교회에서 모여 세계 선교의 전략을 논의했다. 3,000여 명은 숙식까지 제공했다. 김준곤 목사는 준비위원장을 맡아 봉사했다.

이에 앞선 1994년 6월에는 여의도광장에서 40여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 기도의 날 집회를 가졌다.

* ’99 한국교회원단비상구국금식기도성회(1998.12.30~1999. 1.2)
1997년 11월 IMF 국가부도사태가 터지면서 나라가 어려워지자 한국CCC는 1998년 12월 30일부터 1999년 1월 2일까지 서울 여의도 에어돔(중소기업 전시관)에서 3박 4일간 전국 331개 대학 C.C.C. 회원 1만 2천여 명이 모여 민족의 위기극복과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한 금식 기도 성회를 개최했다. 이 성회에서 대학생 등이 헌금한 1억 원을 불우이웃을 섬기는 10개 단체에 기탁했다.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로 활동(1998~2006)
김준곤 목사는 “생존권이 소유권보다 우선한다”, 예수님께서 뱃새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처한 백성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던 가르침을 따라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시작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전개하면서 “밥을 같이 먹으면 식구입니다.”라는 말씀으로 한국 교회, 특히 보수 기독교계가 북한 동포에 대한 마음을 열고 돕도록 도전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 대표를 맡아 김수환 추기경,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 강문규 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회장,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기아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 앞장을 섰다. 특히 2002년 2월에는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서경석 목사, 강문규 회장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 엑스플로 ’99 인천대회(1999.6~7)
한국CCC는 인천기독교연합회와 공동으로 6월에 300여 개 교회 전도 훈련을 실시했고, 인천 시내를 행진하며 시민들에게 홍보 전단을 나눠 주며 성시화운동 캠페인을 전개했다. 김준곤 목사는 준비위원장을 맡아 이 일을 주도하였다. 또 7월에는 인천대학교에서 밤에는 1만 5천명의 CCC 대학생과 인천지역 교회 성도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열었고, 낮에는 LTC, 선택특강, 특별활동 등 다양한 활동의 시간을 가졌다.

* 기독교동서화합운동(1999.1~) 전개
김준곤 목사는 우리 사회가 동서간 갈등과 남북간 대치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동서화합운동본부를 창립하여 대표를 맡아 1999년 3월에는 이원설 박사 등을 강사로 힐튼호텔에서 동서화합운동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이후 명칭을 기독교민족화합운동본부로 개칭하였다.

*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2000.7.6)
CCC는 1999년 8월 젖염소 300마리를 북한에 보낸 후, 2000년 7월 6일, 전국 350여 개 대학 1만여 대학생들이 굶주림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젖염소보내기운동을 결의하고 10,342마리(32억 원)를 작정했다.

그 후 매년 젖염소를 보내고 있으며 2005년 4월 현재까지 53억이 작정되었고, 21억이 모금되어 2,000여 마리의 젖염소와 착유 설비 등을 북으로 보냈다. 향후 10년 내에 북한의 190만 7천 호 농가에 젖염소 한 마리씩을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결과 2006년 5월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리에 “CCC은정젖염소목장”이 완공되었다.

*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예배 (2000.6.4 여의도 고수부지)
김준곤 목사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2000년 6월 4일 주일 오후에 한국교회 116년 역사상 최초로 보수 기독교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진보 기독교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공동으로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예배의 준비위원장을 맡아 섬겼다.

* 2002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 맡아 활동
김준곤 목사는 2002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를 맡아 한국교회가 2002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이를 위해 KS CHO운동(친절, 봉사, 청결, 정직, 질서)을 전개했다. 2001년 10월 25일에는 장충체육관에서 월드컵 개최 10개 도시 대표자를 초청해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 CCC 국가대표직에서 물러남(2003년 2월 17일)
김준곤 목사는 2003년 2월 17일 한국CCC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김준곤 목사가 1958년 한국CCC를 창설한 후 CCC를 통해 훈련 받은 수만 30만명이 넘는다. 그들 대부분은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시국사건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특히 CCC 학생대표를 역임한 박성준(서울대), 부회장이었던 한명숙 (이화여대, 전 국무총리) , 서경석 목사(서울대, 경실련 창립자), 김근태 전 의원 등은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김준곤 목사가 주도하신 엑스플로 ‘74대회 등 여러 집회와 훈련을 통해 350만명의 평신도가 전도훈련을 받았다.

김준곤 목사는 가끔 “사과 속의 씨앗을 셀 수 있어도 씨앗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당신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민족복음화의 환상과 비전을 심어주었다.

* 성시화운동 세계총재로 사역(2005. 6~)
김준곤 목사는 1972년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춘천성시화대회를 개최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2005년 6월 성시화운동 총재를 맡으셔서 성시화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전교회가 전복음을 전시민에게 전하는 3전전략을 통해 한국 교회가 복음전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도록 도전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특히 한국 교회 70퍼센트를 차지하는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을 살리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사역을 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교회가 가진 인적 자원과 재정과 자원을 교회에서만 사용하지 말고 미자립교회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물탱크가 아닌 파이프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