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감람산 아래 있는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가 즐겨 찾아가셔서 기도하시던 처소 중 하나였다. 예수는 밤이 깊어진 후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다(마 26:36). 이날 밤 아홉 제자를 동산 어귀에 남겨두고 예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기도하신다. 감람산은 올리브를 짜는 곳으로 예수는 자신의 진액을 다 짜시면서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셨다.

1. 십자가를 앞두고 고뇌에 빠진 예수

예수는 세 수제자들보다 더 깊숙이 들어가 기도하셨다. 예수는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7)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발견한다. 십자가 죽음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이다. 피흘리는 고통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여태까지 하나님에 대항하는 인간의 불순종인 죄와 대결해야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 속에 있는 자율성의 의지, 이 죄의 세력은 마지막 극복되어야 할 원수이다. 예수는 인간성 안에 있는 이 원죄의 뿌리와 대결해야 했던 것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요 목회자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예수가 고민한 이유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의 비참함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예수의 괴로움은 그의 죽음을 무서워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예수를 본받아 도리어 노래를 부르며 그 마지막 잔을 두려움 없이 맞이했다. 예수로 하여금 이렇게 안타깝게 부르짖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죄였다. 모든 세상의 수치와 모든 인간의 짐이 죄 없이 결박당하신 주님으로 하여금 그 참담을 맛보게 했다. 죄의 차디찬 공포, 그 지긋지긋한 모습,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역, 이것들이 그를 괴롭혔다”(James Stuart, 상게서, 214). 올바른 해석이다.

2. 생명의 진액(津液)을 다 바치는 예수

감람산은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아서 감람산이라 불린다. 여기서 주민들은 감람나무 열매을 압착하여 올리브 기름을 짜낸다. 그처럼 예수는 자신의 진액을 다 바쳐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 드리신다. 간절한 기도로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되었다. 누가는 예수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기도한다. 인간적으로 이 무거운 짐을 벗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이 때 천사가 예수의 기도를 도와준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 22:43). 이 때 예수의 기도는 너무나 간절하였고, 자기희생적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3.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는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예수는 두번째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드리신다: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예수는 간절히 기도하신다. 그 기도의 내용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기도 중의 모범적인 기도이며, 기독교 기도의 핵심이다. 기도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예수는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 십자가의 잔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가 반드시 마시고 받아야만 하는 세례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자기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도록 결단하였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었다. 그것은 승리의 기도였다.

4. 예수의 인간성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기도로 씨름하셨다는 것은 인간 예수의 역사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영지주의가 말하는 바 고난에 대하여 초연하고 무감각한 초연한 태도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예수는 다가오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특히 세 제자들을 향하여 요구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이들에게 격려하시기를 자기 곁에서 기도하면서 이 시련의 순간을 이겨내라고 하신다. 예수의 기도는 간절하여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 예수는 그의 모든 진액을 다 바쳐 기도했다. 여기에 인간 육신을 입으신 예수의 인간성의 중요성이 있다. 영지주의는 영지(gnosis)만 중요시하고, 육신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한다. 영(靈)인 그리스도는 저급한 육신의 고통을 맞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신과 영의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바로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시험을 받으셨고, 그의 육신으로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5. 육신이 연약한 제자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제자들의 태도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예수는 첫째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願)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 두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마 26:43). 제자들은 인류의 대속이 걸려 있는 이 밤의 중대한 기도의 시간 아직도 구속사의 중대한 시간이 온 줄을 알지 못하고 육신이 약하여 잠들어 있다. 이것이 제자들의 한계였고, 영적 무지였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6. 체포되심

기도를 마치신 후 예수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에 의하여 체포당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팔리게 됨을 미리 아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신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5-46).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무리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왔다. 이들은 칼과 창과 몽치를 들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께 입 맞추며, 예수를 잡도록 신호를 한다. 무리들은 예수를 체포하고자 한다. 이 때 베드로는 칼을 휘둘러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다. 예수는 이를 제지하고 말씀하신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 26:55). 복음서 기록자 마태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 26:56). 이 때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의 하수인들이 와서 예수를 체포하니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그리고 자기들의 스승이 체포되자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뿔뿔히 흩어져 버리고 만다.

7. 베드로의 배신

예수가 잡히시고 난 후 도망쳐 왔으나 수제자 베드로는 자기 스승이 어떻게 되시는가 걱정이 되어 멀리서 따라 다닌다.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마 26:58).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른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6:69).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른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마 26:70).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6:71).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른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른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마 26:73). 이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른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 마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4-75).

여기에 마음은 간절하나 육신이 약한 베드로의 믿음의 한계를 본다. 그에게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었고 예수에 대한 충성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의 스승이 잡혀가니까 본능적으로 자기는 살아야겠다는 자기보존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다시 복권의 기회를 받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다짐하는 질문을 받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질문으로 대답한다.

8. 나약과 실패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겟세마네에서 진액이 마르도록 기도하신 후 예수는 체포당하셨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외면적으로는 동산에서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은 무산되는 것 같이 보인다. 예수는 실패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의 체포는 십자가로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제자들의 흩어짐, 특히 베드로의 경우 세 번이나 예수 부인(否認)은 나중에 실패를 딛고 일어나 예수의 증인이 되고 순교적 전도자가 되는 데 기여한다. 하나님은 항상 세상적인 성공을 통해서만 일하지 아니하신다. 세상의 죄를 구속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미련한 방법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으로부터 “너의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시냐?”라는 조롱을 당하시기까지 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약한 방법, 미련한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방법이다. 인간적인 나약과 실패와 좌절 속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눈 앞에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숨기신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무능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진정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홀로 존귀하시고 높으시므로 인간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들이 외면하고 배척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7월 첫째주와, 둘째주는 교수님의 해외 출장관계로 휴재합니다. 7월 셋째주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