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역사적 예수는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제자들과 작별의 만찬(晩餐)을 하신다. 그 가운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눠 주시면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려주신다. 떡과 잔은 예수의 생명을 의미한다. 떡은 예수의 살이요, 잔(盞)은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 떡과 잔을 주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교하셨을 뿐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시고 사시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역사적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의 죽음으로 그가 가르치시던 사랑의 계명이 무엇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신다.

1. 예루살렘의 다락방

마가의 다락방은 최초의 전도자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집이었다. 이 다락방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즐겨 자주 사용하시던 곳이었다. 예수는 제자 둘에게 이르신다: “성내(城內)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막 14:14). 이 객실(客室)은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시던 처소로서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다. 마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와 유월절 준비를 하고는 만찬이 끝날 때까지 어둠 속에 서서 기다렸다. 마가는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힐 때 “베 이불을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난” 청년이다. 그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자이다.

2. 성만찬 :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복음서 저자 마태(마 26:17-29)와 누가(눅 22:7-23)는 이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성 안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신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일로서 이집트의 종 되었던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마다 죽음의 사자(使者)가 해(害)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어린 양의 피는 죽음의 세력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죄(贖罪)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오실 메시아 예수를 상징하는 예표(豫表)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오심을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고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는 것은 구속사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신다(마 26:17). 제자들과 식사하시는 가운데 예수는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신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신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공식적으로 나누는 이별의 만찬이다. 이 만찬은 단지 스승과 제자의 정을 나누는 자리를 넘어 예수의 죽음이 갖는 대속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자리이기도 하다.

3. 십자가 달리심에 대한 신학적 해석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후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살해 음모에 관해 요한은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죽음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 가야바는 말한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49-50). 가야바의 말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구속사적 해석을 가한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2).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단지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는 종교 운동으로 봤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로부터 오는 정치적 책임 추궁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이에 반해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냉소와 무의식 속에 예수의 죽음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에 관해 예언하고 있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냉소하고 멸시하면서 유대 종교의식 차원에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 즉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유대인 종교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고와 행하는 행동을 그의 주권으로 관장(管掌)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의 간섭이 있다.

4. 죄 사(赦)함의 언약 종교: 대속(代贖)의 종교

예수의 최후 만찬은 그가 당하실 십자가 죽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진리를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신 것이다. 예수는 떡과 잔을 나눠 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그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증언하신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떡과 피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는 몸과 흘리시는 피, 즉 예수의 생명을 상징한다. 죄인인 인류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들의 희생제물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기 17장 11절을 따라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증언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에서 짐승을 죽여 희생제물로 드리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제물드린 자의 죄를 속(贖)함 받았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옛 언약으로, 다가오는 새 언약의 그림자였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히 9:12-13).

신약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은 죄의 사(赦)함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4-15). 우리의 죄는 어린 양 되시는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드리신 속죄 제물로 인해 사함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고난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이다.

5. 예수의 종교는 피의 종교, 즉 생명의 종교

예수는 종교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속죄(贖罪)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 예수는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을 통해 당신의 죽으심의 의미, 즉 대속의 진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종교를 세웠다. 이 예수의 종교는 그가 흘리신 피의 공로 위에 세워졌다. 피는 희생을 말한다. 이 피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의 흘리신 피, 생명의 증여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를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 피가 죄를 속하는 마술(魔術, magic)의 힘이나 발휘하듯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가 속죄해주는 것이 아니라, 피는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예수의 생명이 증여돼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赦)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생명을 지불함으로써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우리들에게 증여해 주신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어린 양 되신 예수의 피에 의한 구속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어린 양 되신 예수의 피로 우리는 속죄(贖罪)함을 받았다. 그리하여 속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 regeneration)으로 하나님 아들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신자의 마음 속에 주어졌다. 이 생명을 받아 우리 영은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속 사람은 영원히 사는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6. 피의 대속의 능력은 피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생체물리적으로 피에는 생명이 있다. 피가 없으면 인간의 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피의 대속 능력은 피 자체의 능력에 있지 않고 피가 성례전적 능력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 그러므로 성례전(聖禮典)에서 자료로 주어진 떡과 포도주 자체는 그냥 물질에 불과하다.

이것을 성례전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제정(制定, institution)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시에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는 제정의 말씀을 하셨다. 이 제정의 말씀에 의해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은 단지 물리적 자료임을 넘어서 예수의 대속을 상징하는 성례전적 존재(sacramental being)가 된다. 오늘도 역사적 예수는 우리들에게 과거에 속하나, 그분을 기념하는 성례전적 행위를 통해 성례전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 마음 속에 현재화 하신다. 이것은 성례전적 신비(sacramental mystery)다. 주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가 믿음으로 성례전에 참여하는 자의 마음 속에 하나의 신비로운 실재와 사건으로 일어난다.

[김영한 교수 칼럼 연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