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수는 성벽에 가까이 오셔서 우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예수의 예언은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에게 다가올 미래적 재난과 황폐에 관한 예지적 통찰이다. 예수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들에게 다가온 평화의 소식, 메시아의 오심을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신다. 이들은 정치적 메시아, 즉 영광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다가올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예고에서 예수에게 있는 예언자적 예지와 메시아적 통찰이 드러난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인간에게 임하는 재난과 파멸에 대하여 연대하시는 하나님의 공명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

복음서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신다”(눅 19:41). 예수는 예루살렘 성(城)과 그 주민의 비참한 운명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여기에 예수의 메시아적 통찰이 있다. 그것은 다가오는 미래를 직관하는 예언적 통찰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평화에 관한 일”이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자신에 관한 복음의 소식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일이다. 이 유일회적 구속사적 사건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주민들에게는 숨겨져 있다. 이들의 마음은 제도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어, 나사렛 예수라는 무명 종교인의 권세있는 새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성(城)의 미래적 파멸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눅 19:43-44). 예루살렘은 그후부터 종말에까지 이방민족이 그 곳에 거하고 지배함으로써 거룩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파멸(破滅)의 원인은 주민들의 하나님 섭리를 헤아리는 지식의 부족이다.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4). 하나님의 행동은 그 때가 있다. 그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 바로 메시아의 오신 날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들은 누구든지 메시아의 오심에 관하여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공된 구원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권고하다”는 말은 “돌보다”(눅 1:68, 눅 7:16)와 상응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신 메시아의 날을 알지 못한다. 오신 메시아에 대한 믿음도 없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정치적 메시아에만 관심이 있지 고난의 종으로 오신 구세주 메시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성은 파멸될 것이다. 예수는 예언적 통찰을 통하여 이러한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시고 우신 것이다.

예수는 나중에 체포되어 끌려가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시는 도중에도 앞으로 예루살렘에 다가올 재난에 대하여 예언을 하신다. 누가복음에서 역사적 예수는 자기를 따라 오면서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그들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눅 23:31). “그들”이란 예수를 사형에 처할 로마 병정을 가리키고 있다. 이 구절에서 푸른 나무란 예수 자신을 가리키며, 마른 나무란 열심당원을 가리키고 있다(Oscar Cullmann, Jesus and the Revolutionaries, 고범서 역, 예수와 혁명가들, 범화사, 1984, 64). 이 말씀은 로마군에 의한 잔혹한 십자가 처형이 예수 자신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이 열심당원에게 가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의 공감성, 연대성을 발견한다. 그는 단순히 초인간적인 신인(神人)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지닌 인간으로서 예루살렘에 다가올 재난을 예지하시면서 우신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예루살렘에 다가올 참혹한 멸망의 미래를 보시고 그 속에 같이 멸망할 하나님 백성의 참혹한 미래를 내다보시고 우신 것이다.

성전(聖殿)의 종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 파멸에 대한 예수의 예언(막13;1-2, 눅21;5-6)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제자 중 하나가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라고 말하고, 누가는 어떤 사람이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눅21:5) 라고 말한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 21:6). “날이 이르면” 이란 다가오는 40년 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역사적 멸망을 시사한다.

성전이 황폐화되는 것은 이미 성전이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 의해 건축된 유형적 건물인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쫓으시면서 변질된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중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헤롯이 주전 20년에 개축한 제2성전 벽의 서쪽 부분이다.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른다. 디도 장군이 제2성전의 다른 부분을 모두 파괴하고 유독 이 벽만을 넘겨 놓은 이유는 후세 사람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킬 수 있었던 로마 군대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기 한 것이었다. 이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곳으로서 옛 성전의 마지막 유물로 추앙하는 곳이다,

성전 청결의 권위를 묻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는 “종말론적 성전”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눅 19:46), 하나님의 율법을 강론하는 처소이다(눅 19:47). 성전 청결에 대한 권위에 관하여 질문을 받자 예수는 대답하신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당시에는 아직도 제자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부활절 이후에야 깨달았다고 요한은 해석하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2).

예루살렘 성(城)의 종말

누가는 예루살렘 성(城)의 종말에 관한 예수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0). 예루살렘의 멸망이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었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눅 21:22).

복음서 저자 누가는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에 관한 예언(막 13:14)을 주후 70년 초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와 관련시킨다. 황폐 자체는 그 해 여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성전의 점령및 파괴와 관련된다(눅 21:20):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눅 21:23).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때가 있다. 예루살렘이 무한정 황폐되지는 않는다. 그 때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이다.

예수의 예언이 있은지 약 40년 이후인 A.D. 70년 초순에 유대 열심당이 무력적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전면전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군의 실제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유대의 열심당원들이 로마에 대해 무력 반란을 일으킨 것이 그 원인이었다.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을 유린당한다. 성은 돌 하나 돌 위에 남기지 않고 폐허에 이른다.

세대주의적 성경(예루살렘) 해석의 위험성

오늘날 이스라엘의 성지(聖地) 예루살렘에 가보면 솔로몬의 성전도 헤롯의 성전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 이후 40년 만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로마 하드리안 황제가 성전 자리에 이교도(異敎徒) 신전(神殿)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7세기에 무슬림이 이곳에 왔을 때 성전산은 폐허로 변한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성전산의 큰 바위에서 마호메트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691년 황금사원으로 불리는 바위 돔을 건설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오늘날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성전이란 성지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성전이요, 신약의 신령한 성전인 교회로서의 성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신령하게 변모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신자의 마음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베드로는 여기서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너희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 복음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것은 세대주의적 성경읽기(무디및 스코필드 성경 등)로 예루살렘을 유대 민족에게만 연관시키는 해석이다. 그리하여 세대주의자들(dispensationalists)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예루살렘에 관한 모든 성경의 기록을 민족적 유대와 유대주의적 성지(聖地)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구속사적 의도를 유대 민족주의적으로 편협화하는 시도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를 향한 인격적 신뢰를 표명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칭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신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리고 오히려 유대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갈 것을 예언하신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2). 이 말씀은 신약교회의 탈유대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믿음을 지닌 자들이며, 메시아인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유대백성들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마가복음도 같은 의도를 가르친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을 여행하실 때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한다. 예수는 처음에는 유대 민족 중심의 대답을 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긍휼을 믿는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이러한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에 예수는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 예수는 이방여인과 그 딸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도 혈통으로 난 유대인과 하나님의 뜻으로 난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유대인들은 말씀으로서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혈통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분명히 유대일변도 성경 해석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령한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관한 성경의 의미를 세대주의자들이 읽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의 이분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새 예루살렘: 믿음 안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실재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종말론적 상징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사라져 버린 옛 세상 대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들어서는 묵시를 기록하고 있다. 바다라는 혼돈의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리어 다가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환상으로 보고 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0-11).

새 예루살렘은 상세히 묘사된다(계 21:12-21). 이 도시의 성벽은 거대한 정육면체(피라밋 형태의 답)의 형체를 띠었다. 그 크기는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이다. 이러한 수치는 실제 규모이기보다는 완전성(정육면체) 또는 우주적 규모를 상징한다. 이 도시는 새로운 세계이다. 이 성벽의 크기에 관한 정보에는 12라는 상징적인 수(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열두 사도, 계 21:14)도 들어 있다. 이 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한다. 이 도시는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 진주, 정금 등 각종 값비싼 보석으로 건축되었다(계 18-21). 그러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전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 양이 친히 그 도시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옛 예루살렘은 본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성전 가운데 임재하시던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구원과 소망의 도시는 음모와 분쟁과 싸움과 파괴,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도시를 우리들에게 주신다. 새 도시는 인간이 건설한 도시가 아닌 하나님이 건설하시는 새로운 천상의 예루살렘 도성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계, 21:23-25). 이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소망할 수 있는 종말론적 실재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옛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종말론적으로 능가되고 추월되고 있다. 그래야만 옛 언약의 실재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이 천상의 새 예루살렘은 만국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계 21:26). 그러나 누구나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속된 자이나 가증한 자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로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만 들어간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오늘 우리는 옛 눈을 가지고 분쟁의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성지(聖地) 예루살렘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인 우리들에게 타당한 구속사적 의미이다. 옛 예루살렘은 다가오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예표로서만 우리들에게 의미를 지닌다. 옛 예루살렘은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