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의 양대 지류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헤브라이즘은 구약이 주체인 히브리를 중심한 성서문학을 근간으로 하며,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를 중심한 철학사상이 근본을 이룬다. 헤브라이즘은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에 모든 언어 표현이 성서처럼 직관적이고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는 문학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교회 현장에서는 문학에 대하여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


근본적으로 문학과 공존해야 할 기독교가 이처럼 문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진정 인간의 상상력의 결과로 창작되는 문학 작품은 기독교의 교리나 교훈에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것일까? 이 또한 기독 작가에게는 풀어야할 과제 중 하나다. 문학적 상상력과 성경적 세계관 사이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위해서도 그러하거니와 기독교적 생활 원리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실은 서양문화에서 문학을 부정한 것은 헬레니즘 전체가 아니라 플라톤의 철학과 도덕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에 의해서였고, 기독교 사상 역시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여 신학을 체계화하면서 동시에 그의 시인추방설로 문학을 부정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플라톤의 시(문학)에 대한 관점을 보면, 시인이란 부도덕하고 무가치한 것들을 모방하는 사람이었다. 보이는 현실 세계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을 모방하기 때문에 결국 진리와 선만이 실현되어야 할 그의 이상국에서 추방돼야 했다.

그의 진리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그것은 순수한 이성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이데아(Idea)의 세계다. 반면 시가 추구하는 세계는 현실세계, 즉 본질의 그림자일 뿐이며, 시인은 이 그림자를 모방하는 자로 봄으로써 문학은 단지 감정적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합리적인 원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해독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초기의 기독교 신학은 철학이나 지식과는 구별되는 복음주의 순수 신앙이었다. 그러나 이교도적 철학적 사변의 도전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이성적인 희랍철학을 차용하여 증명하려 하였으며, 그 관점에서 플라톤의 철학이 중요한 논거의 자료가 됐다. 이 때문에 플라톤의 문학부정론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그 영향의 한 예로 어거스틴(Augustine)의 문학과 예술에 관한 고백을 들 수 있다.

그는 연극이 관람객에게 주는 감정적 영향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영향을 ‘비참한 광태’라 하였고, 문학은 본질적으로 교훈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미덕보다는 죄악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문학의 허구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그가 신앙과 문학 사이에서 얼마나 심한 갈등을 겼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가 학생이었을 때 수사학을 공부하는 것은 싫어하고 ‘트로이성의 연소’나 ‘무사와 목마’의 이야기를 더 듣기를 좋아했던 일을 깊이 참회하고 있다.

중세의 교부들 역시 영국 고대 서사시의 영웅 베오울프(Beowulf)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좋아한 것을 통회하고, 수도원에서는 음악 소리나 피리 소리가 들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경건함과 거룩함만이 존재해야 했으며, 그 외에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진리에 위배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 후 청교도 역시 문학보다는 더 많은 결실이 있는 학문들을 옹호하는 한편, 문학은 거짓말의 어머니라든가 악폐의 유모로 치부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는 문학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이 바로 서양의 경우 이성중심주의 헬라철학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이성으로만 이해한데서 비롯됐음을 말해준다. 지나친 도덕중심의 경건주의와 청교도적 사고가 빚은 결과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유교적 도덕주의가 문학의 감성적 요소를 거부했으며, 이 전통위에 개신교를 받아들인 한국교회가 문학에 대해 맹목적인 부정의식을 갖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을 부정하는 이 모든 논리의 오류는 문학을 단순히 내용으로만 보았다는 점에 있다. 문학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아낼 수 있다. 문학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며, 삶을 담는 용기다. 그리고 ‘허구’는 내용을 잘 전하기 위한 표현 수단이다. 기독문학도 허구를 사용해 기독교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잘 표현하려 한다. 기독문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담는 그릇이다.

따지고 보면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잘 알리고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인 사랑을 잘 표현하는 수단이며 도구가 아닌가. 나는 이 때문에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문학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기독문학 만이 진정한 의미의 문학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송영옥 박사는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클럽 정회원이다. 창작집으로는 <미운 남자>, <하늘 숲>, <해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閃 囚구를 떠돌고 쏀덛>,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와 영한시집 , 그리고 문학이론서 <기독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International Director for Y'Menettes)을 두 차례 역임했고, 신문·잡지의 연재계약으로 전 세계 60여 나라를 여행, 문화 예술 기행을 했다. 현재 대신대에서 기독문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