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키프리안

1.1.1.1. 생애

▲키프리안
키프리안(약 210-258)은 터툴리안처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으로 그리스어보다는 라틴어를 사용한 교부입니다. 카르타고는 지도에서 보다시피 로마와 매우 근접해 있는 도시입니다. 지도에서 한 번 확인하도록 하지요. 아마도 제가 ‘한니발’을 설명하면서 지적한 것으로 여깁니다만… 생각이 나지 않으시면 여러분들이 잘못 배운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허허허. 한번 지도를 볼까요?” 하시면서 교수님은 지도를 펼쳐 보이신다.


“이제 카르타고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핍박을 설명하면서 키프리안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아무튼 키프리안은 카르타고 출신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키프리안이라 하면 카르타고를 기억하는 동시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라는 것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키프리안은 약 210년에 카르타고에서 이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카에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입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는 웅변가, 즉 수사학자로서 법률을 배웠습니다. 그 후 그는 카르타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락과 명예로 만족하지 못한 키프리안은 245년 카르타고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제인 카에실리아누스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종 시기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245~248년이라 여겨집니다. 개종한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제로 수임을 받았습니다. 249년 초 그는 도나투스를 이어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독직을 9년 동안 유지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250년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의 핍박으로 인해 카르타고를 떠나 인근 지역에 피했기 때문입니다. 데시우스 핍박에 관해서 ‘핍박들’이라는 주제로 설명해 드렸는데 혹시 기억하고 있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기억이 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잘못 가르쳤으니깐요…”하시면서 웃자 모두들 빙그레 웃었다.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는 교회의 감독들과 지도자들에게 명하여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충성을 맹세하라는 의도였죠. 그만큼 제국이 불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 군사들은 마을을 다니면서 황제령을 시행했습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도주했던 것입니다. 핍박의 시기 다음 해인 251년 봄, 카르타고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배교자들’(Lapsi, 랍시) 문제를 직면하게 됐습니다.”

“교수님, 배교자들이란 누구를 일컫는 말인가요? 강의를 통해 짐작하건대 핍박과 관련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데요…”하며 진지하게 질문하는 곽기섭 씨였다.

“좋은 질문입니다. 배교자들이란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임을 부인한 자들을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담대하게 제사를 드리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낸 ‘고백자들’도 있었습니다. 핍박이 두려운 자들은 돈을 주고서라도 희생제를 드렸다는 증거를 구입했습니다. 그 증서의 이름이 ‘비렐룸’(libellum)이라 부릅니다.

배교자들의 문제에 있어 키프리안은 어려움을 직면했습니다. 왜냐하면 겁쟁이처럼 도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로마 감독에게 고발했습니다.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키프리안에게 글을 써서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자신의 도주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신적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도덕성과 관련되어 일어났다기보다는 배교자들에 관련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배교자일지라도 공식적인 회개를 하는 사람들을 다시금 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이자고 키프리안이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키프리안이 도주했던 시기 동안 장로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임명한 펠리키시무스 집사는 키프리안의 제안을 정면으로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키프리안은 그를 파직하고 출교를 명했습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는 노바투스의 지원을 받고 반대파들을 이끌면서 분파를 자행했습니다.

그러자 251년 키프리안은 『배교자들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고 카르타고에서 감독자들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펠리키시무스를 정죄하고 키프리안의 권면을 채택했습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를 따르는 자들은 키프리안을 반대하고 감독을 선출하여 분파를 또 이끌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감독까지 선출해 점차 노바티안을 따르는 자들의 분파는 심각해져 갔습니다. 그러자 키프리안은 교인들의 도덕성에 관한 글들을 써서 권면하며 분파자들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16세기에 그려진 ‘역병’에 관한 그림
“252년과 254년 간 역병이 카르타고에 몰아쳤습니다. 이 역병은 전 로마제국을 15년 동안 휩쓸었던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데시우스의 아들 호스틸리안도 이 역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죠. 이에 대해 키프리안은 『역병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역병으로 인해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이 동일하게 역병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그 후의 삶은 다르다고 강조했습니다.

255년 다시금 키프리안은 다른 문제를 맞이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주재한 세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감독 스테판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스테판은 이단자들의 세례도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합법적으로 행했다면 그 세례가 정당하다고 했죠.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단자들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257년 8월 새로운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의 핍박이었죠. 이 핍박으로 인해 논쟁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판과 그의 후계자가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핍박에서 키프리안은 담대하게 자신의 양떼들과 함께 맞섰습니다. 그러자 그는 쿠루비스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 후 258년 그는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키프리안은 앞서 배웠던 터툴리안의 작품들을 탐독한 자였습니다. 그렇지만 터툴리안과는 다른 온건하고 친절한 성품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터툴리안이 열정적이었다면, 키프리안은 참을성 있고 균형 잡힌 인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