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열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각 연회가 소위 ‘창조세계의 부흥을 이끄는 녹색연회‘로 진행되는 것과 관련, 총회 출간 가이드북에 소개된 ‘2024년 녹색연회를 준비하며’라는 장석근 목사(선교국 환경선교위원장)의 주제 해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이선희 전 목원대 교수님의 글을 연속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녹색 연회
▲감리회 선교국 발간 ‘녹색연회’ 가이드북 표지.

15쪽: 김민석 목사의 주장 “창조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에 대하여

전편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김 목사는 웨슬리의 설교 ‘God’s Approbation of His Works’를 인용해 현재 피조세계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여전히 금사슬로 연결되어 있다고 웨슬리가 주장한다고 보았으나, 웨슬리는 그 설교에서 “창조 당시 위대한 조물주께서 모든 피조물 전체를 내려다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던 그 때의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 창조 당시에는 금사슬로 … 모든 존재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I,14). … 그러나 태초의 세상은 지금 우리 눈에 비친 세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 지금 그것들은 태초의 모습이 아닙니다”(II,1)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의 설교 ‘The General Deliverance’에서 “낙원에서 하나님의 모든 복 주심이 인간을 통하여 그 아래의 피조물들에게 흘러들어갔던 만큼, 즉 인간이 창조주와 인간 이하의 동물 피조물들 사이의 소통의 큰 통로였던 만큼, 인간이 이 복 주심을 전달할 능력을 스스로 상실했을 때, 그 소통은 필연적으로 끊어졌던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 목사는 자신의 주장이 웨슬리의 설교에 의해 입증된다고 보았으나, 사실은 반대로 웨슬리의 설교에 의해 그의 주장은 명백히 반증되고 있다. 김 목사는 주장의 근거를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인즉, 그 주장은 사실 플라톤의 주장이었다고 웨슬리도 말하고 김 목사 자신도 말하였으니,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가지고 생태신학의 근거를 삼은 것이다.

즉 이 주장이 그의 생태신학의 중요 근거라고 보이는 바, 그렇다면 그의 생태신학의 정당성은 웨슬리 신학으로도, 성경으로도 입증이 안 된다. 그렇다면 그의 생태신학은 적어도 플라톤의 철학적 개념에 근거한 세계관일 뿐이다. 이런 이교도적 사상을 가지고 감리교 각 연회에서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했던 것인가?

그대는 생태사상에 정신을 잃은 까닭에, 성경의 하나님 말씀도 잃고 성경에 일치하는 웨슬리의 가르침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감리교 교리와장정에 있는 종교강령 25개 조항을 어기면서까지 세계관이나 사상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6쪽: 김민석 목사의 주장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모든 피조물을 향해 있다”는 주장, 소위 “생태정의”에 대하여

이 주장은 일반 철학이나 종교학 또는 윤리학, 사회학의 주장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이 사실을 웨슬리는 그의 설교 ‘인간 이하 동물 피조물들을 썩어짐에서 건지심(The General Deliverance)’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물의 아버지께서 그의 가장 낮은 피조물에게조차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신 것과 그런 까닭으로 그들이 현재의 멍에 밑에 있는 동안 당하는 모든 고난에 대한 큰 보상을 해 주실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이 그들과 인간에 대하여 동일한 정도의 관심을 갖고 계신다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만물의 주님으로서 영웅이 망하는 것이나 참새가 떨어지는 것이나를 공평한 눈으로 보신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문장은 시로서는 참 멋있지만, 완벽한 허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진리와 한없는 은혜와 더불어서, 그의 모든 피조물 위에 다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주로 그의 총애하시는 피조물, 즉 인간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가장 비천한 피조물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인간들 가운데 최고의 인간과 동물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낮은 피조물을 동일하게 간주하시지 않는다. …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을 각각 그 자체의 질서에 따라서 귀하게 여기시며,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그 위에 인치신 정도의 비율에 따라서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써 충분하다”(III,5).

그렇다면 소위 ‘생태정의’라는 것은 적어도 웨슬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완벽한 허위일 뿐이다. 그것은 웨슬리의 개인 의견이요, 성경과는 상관없다고 말하려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렇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하기 전까지 그대는 감리회의 창시자요 ‘한 책의 사람’이고자 평생 노력했던 웨슬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이제 그 권위에 맞서는 그대의 권위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그냥 근거도 없이 웨슬리도 인정치 않는 것이요, 웨슬리가 일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신하는 바의 그 성경도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그대의 ‘생태정의’라는 것은 성경과 기독교와는 상관 없는, 그냥 하나의 세계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감리회 각 연회가 예배드릴 때 참고해야 하는 하나님 말씀은 아닌 것이다. 감리회는 일반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성경과 웨슬리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리회가 왜 여느 사람들의 개인적 세계관을 믿고 설교하고 따라야 하는가? 그대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그대의 양심과 이성에 물어 보시기를 바란다.

존 웨슬리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조지 롬니(George Romney)의 그림(1801).

18쪽: 김민석 목사의 주장 “자본과 경제가 지구를 손상시키는 일을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일어나서 고통받는 모든 피조물들을 대신 해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에 대하여

자본주의가 지구를 손상시킨다는 주장은 현실적 사실에 맞지 않는다는 점은 위에서 이미 말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도 지구를 손상시키는 것은 마찬가지다. 공산주의 체제가 경제를 다루는 일에 있어 크게 실패했기 때문에 사실 지구를 더 많이 손상시키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예컨대 북한의 산들은 땔감을 산의 나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경제 수준으로 민둥산이 됐고, 산에 농경지를 만들어 식량증산을 꾀한 미련한 정책으로 산이 폐허가 된 것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든, 현 인류의 한계는 지구를 손상시키는 길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 생태신학으로써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발상조차가 그냥 가상할 뿐이다.

생태신학이 나온지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이 문제가 어느 정도나 해결됐다고 보는가? 혹시 기독교 신앙의 패러다임 변화를 그냥 시도하는 재미에 빠져 있는가? 우리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복음적 증거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인간을 사랑하게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 전체와 웨슬리의 가르침이며, 감리교인의 본분이다.

20-21쪽: 양재성 목사의 가설, 지구의 위기와 교회의 위기는 상호관련성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양재성 목사는 특히 지구 위기 앞에서 교회는 정신과 영성도 상실하여, 세상의 상식과 윤리적 판단에도 부끄러운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교회가 정신과 영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이 가이드북 분위기로 봐서 생태신학적 정신과 영성을 상실했다는 뜻으로 보이며, 그 정신과 영성을 회복하면 교회의 위기가 극복될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생태신학은 서구신학에서 먼저 시작했다. 예컨대 필자가 1980년대 초부터 8년 동안 유학했던 독일에서도 그 때 이미 신학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지구 환경, 생태 환경 문제로 시끄러웠다. ‘Die Gruene(녹색당)’라는 공산주의·사회주의·환경운동 정당이 있을 정도였다. 그때 이미 독일 신학자들은, 예컨대 몰트만 같은 이들은 환경신학(oekologische Theologie) 책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Die Gruene’ 정당은 필자가 있었던 8년 동안 유권자의 5% 전후를 오가는 지지를 받을 뿐이었다. 기자들 외에 일반 사람들은 생태·환경 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생태신학에 힘을 쏟은 독일 교회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상식과 윤리적 판단에서 합격 점수를 받고 부흥하였는가? 오늘날 독일 교회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공히 이미 30% 이상 문을 닫았고, 그 추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양 목사의 이 가설이 얼마나 눈물날 정도로 허망한 가설인가를 알고 가슴 아파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섭리란 그렇게 희망적인 가설로써 설명되거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가설이 허망한 것이라면, 양 목사의 이하 주장은 마찬가지로 허망할 것으로 예측된다. 분석해 보면 과연 그럴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백히 이단적 사상이라고 판단되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21-22쪽: 양 목사의 주장, 예수의 꿈인 “하나님 나라는 요즘 언어로 번역하면 생명 평화의 나라이다”에 대하여

양 목사는 이 말의 뜻을 “결국 생명을 살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인 셈이다”라고 정의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과연 이런 것일까? 이 땅에서 평화로운 세상 건설로 끝나는 것일까?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벧후 3:10-13)이 바로 이것일까? 그러면 예수는 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심판하여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로 처한다고 말한 것일까(마태 25:31-4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되리라는 것(롬 8:17)도 결국 이 땅에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말인가? 양 목사의 주장대로 한다면 성경에 들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영생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는 말씀들은 모두 무시해 버리거나 아니면 억지로 왜곡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과연 건전한 신학인가? 아니면 성경과 상관없는 세계관을 억지로 성경과 일치시켜 보려는 미련한 시도인가? 그렇게 무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과 판단력이 미약한 사람들을 속여서라도 소위 생태신학적 세계관을 갖게 하여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류의 시도들을 우리는 사이비종교 내지 이단적 종교라고 부른다.

이선희 박사
전 목원대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