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 예장 합동 총회 주최로 서울 강남구 총회회관에서 ‘회심준비론 및 능동적 순종 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이 공청회에서 중심교회 원로 서문강 목사님이 발표하신 ‘회심준비론 소고’ 원고를 2회로 나눠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회심준비론 능동적 순종
▲(왼쪽부터) 서문강 목사와 김효남 교수가 공청회에 참석한 모습. ⓒ서창원 교수 페이스북
오늘 공청회의 주제가 되는 두 교리,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회심 준비론’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200년 이내 기간 중 나름의 치열한 쟁론 과정과 개혁주의 신학의 목회적 체험 속에서 정돈되어, 그 후 지금까지 300여 년의 개혁교회들 속에서 견지된 교리들이다.

개혁주의 교리 중 신학적 치열한 공론을 거치지 않고 정립된 교리는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역사는 교리사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그 교리사는 사람들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알다시피 개혁주의 교회는 그런 반석 같은 교리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어째서 이런 논란이 일었는지. 제가 알기로 우리와 같은 칼빈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두 교단, 고신과 합신 교단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을 이미 끝낸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느 경로로 야기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한국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대중추인 그리스도의 순종을 더 깊게 공부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을 태한 백성들에게 적용하여 회심, 또는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의 방식을 더 학습하게 하시려는’ 의중을 가지신 것으로 받아, 경외 어린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

제게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회심 준비론’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리의 맥’을 상세하게 진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저는 어거스틴과 칼빈과 청교도들과 그 후 이어지는 교회사의 맥락 속에서 정돈되고 적용된 이 교리의 논리의 중요한 핵심 몇 가지를 짚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그 교리를 정립한 청교도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우리 장로교단과 청교도들은 무관한 것같이 말하는 이들도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증거 충분한 역사적 팩트들(facts)을 무시한 관점이다.

우리를 포함하여 전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단이 신학과 신앙의 표준문서로 받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대소요리문답과 예배 모범과 권징조례를 작성한 경위는 우리로 하여금 청교도들에 바른 시각을 갖게 한다.

그 표준문서 작성은 1643년에 시작하여 1648년에 잉글랜드 의회에서 공포하기까지 5년이 소요되었는데, 그것을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는 정회원 목사 121명과 평신도 대표로 참여한 의원 30명, 도합 15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그 최종 문서를 결론짓기 위하여 무려 1천 번이 넘는 회의와 공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목사회원 거의 대다수가 청교도적 관점을 가진 자들이었고, 의원들 대다수가 청교도적 노선에 서 있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온 언약도 6명(그들도 청교도들과 같은 신학적 관점을 견지하였음), 영국국교회 대표 3명이 참여하였다.

로이드 존스(D. M. Loyd Jones) 목사는 필자가 번역한 <청교도 신앙 : 그 기원과 계승자들>이란 책에서 ‘사도 시대 이후 그 믿음과 행위에 있어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감히 그 로이드 존스의 말에 찬동하는 증인으로 여기 서 있다.

‘증인’이라 함은 ‘어떤 일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자’인데, 저는 주님의 은혜로 ‘대표적인 청교도 저작들’을 여러 권 번역한 사람이다. 정직한 번역 작업은 책의 한 문장도 빠짐없이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 번역자로서 감히 ‘청교도들의 증인’으로서 증언하고 있다는 이 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필자는 존 칼빈의 설교집 2권, 16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청교도들, 특히 청교도의 대표적인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오웬의 대표작 4권, 존 플라벨의 ‘그리스도의 구속을 택한 백성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은혜의 방식’을 말하는 책 1권, 토마스 보스턴 1권,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3권, 조지 휫필드 3권, 그리고 제가 번역한 나머지 70여 권의 책들 거의가 바로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 전통에 속한 책들이다.

그들의 책은 거의 다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진술이며, 강단에서 직접 외친 설교문들이다. 그들은 거의 모든 책들 속에서 사도가 말한 복음의 진수와 그 능력을 말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필자는 그들의 책들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요약된, 실로 아무도 변박(辯駁)할 수 없는 개혁주의의 견고한 진리와 은혜의 터를 만났다. 그들의 책들의 지면마다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 그럼에도 긍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뜻을 세우시고 이루시고 적용하시어 당신의 이름을 위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영광을 맛보았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력이나 공덕을 발판으로 삼아 하나님께 자신을 분발시키는 알미안적 발상이나, 은혜를 빙자하여 방자하게 구는 도덕폐기론이 자리할 수 없게 한 성경을 제대로 강론하였다. 우리가 총신 신대원에서 배운 개혁주의의 실천적이고 권능 있는 실제, 곧 성경의 은혜와 권능을 필자는 그들의 책 속에 발견했다.

그들이 말하는 어느 교리도 ‘인간 편에서 행하는 도덕적 열심이나 개량이나 준비’가 ‘자신을 하나님께 회심하는 데 기여한다는 식의 논리’가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사람이기에 어떤 미세한 표현들 속에는 미흡해 보이거나 오해를 낳게 할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책 전체와 그 맥락은 ‘성경과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1. 그러므로 ‘회심 준비론(doctrine of preparation for the conversion to God)’에 있어 ‘준비’에 대한 강점은 ‘사람이 사람을 준비시켜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들이게 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 ‘준비’는 ‘성령께서 사람을 하나님께 회심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기 전에 그 회심을 위하여 그 사람을 내면적으로 준비, 또는 예비하게 하시는 은혜’에 강점을 두고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가 믿음을 갖게 하시기 전, 성령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을 절박성을 인식하기 위한 예비적 역사를 그 사람 속에서 하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앞에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세례’를 주시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기 위한 예비 단계를 주셨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옥토’는 씨 뿌려지기 전에 이미 준비된 밭이었다.

자주 장사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마음을 여시는 주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사도행전 기자 누가는 그녀에 대하여 뭐라 하였는가?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이 말씀은 바울로부터 그녀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정식으로 믿기 이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준비’는 그녀가 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배운 자마다 다 내게 온다”고 하신 말씀에서, ‘택한 백성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전에 그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부터 배우는 일이 선행된다’는 논리와 같다.

물론 그 ‘성령의 선행적 예비적 은혜’는 웨슬리의 알미니안적 ‘선행 은총론’과 판이하게 다르다. 알미니안의 ‘선행 은총론’은 ‘보편 구속론, 그리스도께서 인류 전체를 위하여 구속하셨다’고 전제한 개념이다. 그래서 ‘선행 은총을 만민에게 차별 없이, 심지어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은 나면서부터 종교심을 주시어 하나님을 향한 회심에 대한 의식을 갖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회심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그 사람 자신의 의지의 선택사양에 달린 것이다.’ 이 ‘선행 은총론’은 ‘인간에게는 아직도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분발시킬 수 있는 이지와 의지의 여력’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회심케 하시는 성령의 준비적(예비적인) 은혜’는 죄와 허물로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어 있어,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 선도할 수 없는 인간의 완전 무능을 전제한다. 그들은 스스로는 ‘죽어 있는 자’를 주권적 은혜로 각성하고 일깨우시어 회심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주목했다.

웨슬리의 ‘선행 은총론 대상이 인류 전체로 보편적’이라면, 청교도들의 ‘성령의 회심 준비 사역은 택하신 백성들에 한정적’이었다. 전자가 ‘인간 의지의 선택 사양에 결과를 맡긴다면,’ 후자는 ‘회심의 시작과 결과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적 사랑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행사’에 집중시킨다.

2. 그래서 청교도들은 진실로 중생 또는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는 자는 사람마다 그 나타난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각성(conviction of sin)’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그 연장선에서 ‘구원에 대한 걱정과 열망’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절대적 필요를 알게 된다.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공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받을 가망 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한 사람의 택한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영적 행사에 대한 스토리가 아닌가. 번연 자신도 회심하기 전 깊은 ‘죄의 각성과 지옥에 대한 공포’로 한 동안 고심하였다. 그는 천로역정에서 ‘죄짐을 지고 수고하고 무거워 애타는’ 크리스천을 자서전적으로 그리고 있다. <계속>

서문강(중심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