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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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이 시드니?”

지하철 역사에 걸린 어느 항공사의 호주 시드니(Sydney) 직항 노선 개설을 알리는 광고였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유명한 영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시드니는 유명한 항구 도시다. 호주 수도는 캔버라인데 시드니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정도다. 내게는 신혼여행지이기도 한데, 아직 한국 여행객이 많지 않을 때였다. 그때 본다이 비치 앞 S 호텔에 묵으며 오페라 하우스에서 식사도 해보고, 양떼 농장도 가보고, 달력 그림 같은 도시 곳곳을 잘 보았다.

며칠 지나니 너무 심심하고 사람 구경을 못해서 거기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좋은 여행이었다. 여행을 다니면 다시 오지도 못할 거면서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역시 시드니도 다시 가보지는 못했다.

우연하게도 이후 시드니에 지인이 많아졌다. 그쪽에서 살다가 오신 것 같은 믿음의 형제 자매님도 있고, 현지에도 온라인 지인들이 있다. 친한 친구 하나는 오래 전 시드니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가 현지인 교회 목회자가 되더니, 호주 여성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 또 다른 후배도 디자인 유학을 갔다가 호주인 남성과 결혼해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역이민을 온 또 다른 친구는 시드니가 성경에도 나온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했는데, 개역성경 요나서 4장 7절 얘기였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귀찮아 할 때 잠시 햇볕을 가려주던 박 넝쿨이 시들자 실망해 하나님께 분노와 원망을 발하는 대목인데, 물론 항공사 광고처럼 아재개그 같은 이야기다.

우연히 마주친 “어떻게 사랑이 시드니?”라는 문구를 지나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어 나도 모르게 답을 해본다. 사랑은 원래 시드는 거라고. 이상한 말이지만 “시드니까 사랑이다”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사랑, 남녀의 연애 감정은 반드시 시든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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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든다.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했으나 몇 년 후 시드니라….”

혹은 몇 개월 후…, 이것이 서글프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만물의 무질서도가 늘어나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점점 더 나아지는 만물은 없다. 모두 부패하고 시든다. 사람의 마음은 생물이 아니지만 똑같이 흐트러지고 느슨해진다.

시들지 않는 사랑도 있다. 정상적인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해서, 갈수록 더 애틋해질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처음에 느낀 신기함이나 놀라움과는 다른 형태로 변한다. 또한 자식이 너무 엇나가거나 배은망덕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마음이 달라진다. 사람이라서 그렇다.

자식과의 관계도 이런 형편이니 배우자와의 사랑은 더 빨리 시들 수밖에 없다. 물론 정이 들고 세월이 쌓여 깊어가는 동지애, 싸우다 정드는 전우애 등 마치 동성간 우정처럼 형제애(?)가 더해지고, 때론 서로를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로 여기다가도 문득문득 긍휼히 여기는 인류애와 박애정신까지 동원되는 것이 부부 사이지만 처음의 뜨거움이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도 시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며 세밀하게 내 삶에 함께하시던 그분이 멀게만 느껴지고, 이젠 스스로 알아서 살라고, 절벽에서 새끼를 떨어뜨려 올라오는 놈만 키우는 사자처럼 강하게 키우시려는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다.

당연히 하나님은 늘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시는데, 내가 변하고 냉랭해지며 내 마음이 시들어가는 것인데도 그렇게 느낀다.

하지만 하나님도 분명 성도에게 초심자 때와는 다른 마음과 성숙함을 요구하신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로 살기를 바라시면서 챙겨줌을 받던 사람에서 남을 챙기는 신앙인, 이젠 내 앞가림을 끝내고 은혜와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도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리광 자제를 요구하시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도 처음 것은 지나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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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부들은 신혼 때의 일을 하지 않는다. 신혼 때처럼 손을 잡고 다니거나 여전히 정다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주 똑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부부가 너무 다정하면 불륜으로 오해를 받을 정도다.

더 깊어질 수도 있는데 애정의 양상이 바뀌는 것을 사랑이 시드는 것이라고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뜨거움과 설렘과 안달복달하던 것이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시드는 게 맞는 것이다.

부부는 함께 살다가 그런 지점을 맞지만 오래 만나는 연인들은 사귀던 중에 맞게 된다. 그러면 이제 사랑이 시들었구나,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구나 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더는 만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때 헤어진다면…, 헤어졌는데 그것이 아주 시든 것이 아니고 불씨가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인생의 큰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아마 이혼한 부부들 중에도 그런 사랑이 바닥에 남아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이별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실을 본인들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갈라섰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허무하고 야속하게도 사랑은 다 시든다. 그렇게 인간적 사랑의 유한함은 여실히 드러나고야 만다. 시들지 않는 아가페(agape)의 사랑은 킹제임스 성경의 채리티(charity)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남녀의 인간적인 사랑 에로스(eros)에 무조건적이고 숭고한 사랑이 얼마나 섞여 있었는가에 따라, 관계의 건강함을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은 다 시들지만 잎과 줄기가 시들고 열매조차 말랐더라도 뿌리가 남았다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사랑을 되살려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적 사랑에 대한 환상과 기대부터 버려야 한다.

에로스가 아가페보다 더 깊고 숭고하게 그려지는 영화 같은 이야기들은 사랑에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의 사랑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에로스의 사랑 안에 숨 쉬는 아가페 덕분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사랑이 어떻게 시드니?”라는 질문, 그 안에 담긴 로망부터 접어야 한다. 그래, 사랑은 어떻게든 식는거다 하고 매일 되뇌며 상대방에게 실망할 준비를 하고, 내가 상대를 얼마든지 실망시킬 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그러지 않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오가던 사랑을 노력과 실천으로 가능하게 해야 한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 내 마음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둘 중 한 사람의 노력으로도 절반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고 상대방의 닫힌 마음도 열 수 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에 일희일비했다. 해를 가려주는 넝쿨을 기뻐했지만, 그것이 시들자 분을 냈다. 박을 시들게 한 벌레는 우리 삶에 늘 존재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화를 내며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신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 살리려 하시는 주의 마음을 느껴 보라는 의미였다. 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도 다 이유가 있는데, 조건에 따라 마음이 오락가락한다면 어느 것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사랑이 식는 것은 어쩌면 꼭 필요한 일일 수 있다. 식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남녀가 평생을 살겠는가. 처음 상대와 사랑에 빠진 상태, 그 열렬한 두근거림의 마음으로 매일을 살아야 한다면,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는 일이 좋아도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화장도 지울 수 없고, 편한 옷을 입고 아무 데서나 널브러질 수도 없을 테니까.

사랑이 시드는 것이 세상과 인간의 법칙이라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은 인간의 에로스를 시들도록 설계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뜨거운 열정과 소유욕의 사랑이 아니면 인간이 시작도 하기 어려울 테니 일단 만나서 다산하고 번성하게 한 뒤에 일정 기간을 지나면 책임감과 희생, 용서와 무소유(?)의 숭고한 사랑 즉 박애정신이 함유된 인류애로서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하고 베풀어 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시든다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실망할 필요도 없다. 바로 그때가 두 사람의 철없던 사랑을 성숙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려 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니까.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