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구스타브 도레 예수 강도
▲구스타브 도레의 ‘십자가상 예수님과 두 강도’. ⓒcatholic-resources.org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시선(視線)이란 어학사전에서 ‘눈이 가는 방향’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에서 베드로에게 예언하십니다. “네가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펄쩍 뛰면서 “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함께 있던 모든 제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뜰로 잡혀가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는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어린 여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을 시작으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 그만 양심에 가책을 느껴 통곡하게 됩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장담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갖은 수고를 같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 속에 병든 자와 고통당하는 자, 억눌린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에 시험당하는 자와 사랑에 목말라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셨고, 제자들은 이를 곁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뜻에는 관심 없이 오로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정치적으로 출세하여 한자리 꿰차려는 목적만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롯이 인간적인 시선에만 몰두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한 것입니다.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한 소녀의 질문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곧 닭이 울었습니다. 그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얼마나 처량해졌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부딪혔을 때, 스승과 제자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을까요? 자기 스승을 배반했던 사실 앞에서….

닭이 울던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고, 곧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실로 당신의 죽음이 선포된 바로 그 순간까지 연약한 제자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다함없는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닭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인간적이었던 베드로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마음으로 바뀌면서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배반한 제자를 동물의 울음소리로 변화시키시고, 머지않아 주님이 계시지 않을 세상을 위해 제자로 쓰시는 주님의 그 사랑은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의 마음 아닐까요?

이로써 베드로의 장담은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님의 예언은 완전히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이 부인하며, 예수를 희롱하는 무리들이 모인 그 자리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와 뼈가 사무치는 통곡으로 자신을 원망하며, 스승을 배신했던 자신을 나무라며 통한의 눈물을 쏟으며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길은 어두운 밤으로 치달은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새벽을 향했습니다. 무거웠던 원망을 뒤로 하고, 앞을 향해 내리 달렸습니다.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철저한 회개로 말미암아, 그는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와 같이 악한 모습으로 주님을 배반했지만, 통곡과 진심어린 회개를 통해 주님 주시는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며칠 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오순절에는 대중을 향해 반석같이 서게 됩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사건 이후 닭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는 베드로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보여주는 일 아닐까요?

우리 신앙인들은 믿음을 가진 성도로서 성공이나 좋은 일에는 ‘호산나’를 외치고 때론 ‘아멘’으로 즐거이 노래하지만, 막상 자신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실패 혹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이 가득해집니다. 저주까지 서슴없이 하고 있는 오늘날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삶은 항상 행복과 불행이 반복됨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신뢰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를 비롯해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거룩한 시선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닭 울기 전 나를 세 번씩 부인하리라는 주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닭이 울었을 때, 주님께서 쳐다보는 그 시선을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했던 안타까움은 도리어 세상을 구원할 주님의 군병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교회가 이런 회개의 잔치와 변하는 뜰의 장소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원로목사님들이 후임 목사의 일에 사사건건 지칠 줄 모르는 내정간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교회가 쪼개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진흙탕 싸움으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멸시하며 싸우는 모습은 참으로 신앙인이라 볼 수 없고 안타깝습니다.

후임 목사는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음에도, 원로목사의 잔소리와 간섭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원로목사님들이 주님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위임목사 때 하던 태도로 일관해선 안 됩니다. 후배를 위해 뒤로 물러나야 함에도 지나친 간섭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됩니다. 원로목사님이 오히려 후임 목사와 성도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한다면, 주님의 고귀한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담당기관인 노회나 총회가 나서서 수습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목사 편만 드는 지금의 노회와 총회는 주님의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입니다. 목사들의 잔치 속에 한국교회는 점점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로 지켜온 교회가 더 이상 부패되거나 망가지는 일은 이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어느 누구에나 평등합니다. 모든 이들이 다 똑같이 주님의 시선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한쪽 편 강도는 주님의 시선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오늘 밤 너와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는 확증을 해주셨습니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천국을 차지한 최고의 영광을 획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고귀한 시선의 참된 의미 아닐까요?

교회의 직분이 카스트 제도로 뒤바뀐지 오래입니다.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는 주님 명령은 뒤로 한 채, 목사에게 아부하는 성도들 때문에 초신자들은 갈 곳을 잃고, 교회는 더욱 세속화되는 현실 앞에 그저 목놓아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교회 안 권력 다툼으로 주님의 시선과 의미는 사라진 채, 오롯이 세상적인 시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말씀은 이제 서서히 막이 내려가는 안타까운 이 시대, 2,000년 전 울었던 닭의 울음소리가 지금의 교회 안에 다시 들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둔 겨울이 지나고 이제 천하 만상 대지 위에는 새싹들이 움트고, 벚꽃들의 축제가 한창 무르익으며, 봄처녀들의 노랫소리가 사방을 적시고, 희망을 노래하는 그윽한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벚꽃도 열흘을 버티지 못합니다. 비바람에 부딪혀 그렇게까지 아름다웠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 다시 내년을 기약하는 이별의 모습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금세 피었다 얼마 견디지 못하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어 탄성을 지르기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베드로의 고백처럼, 고난주간을 맞는 이 한 주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묵상 주간으로 삼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이웃에게 더 다가가는 한 주가 되시기를 기대하며, 주님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한층 깨닫는 귀한 신앙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