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광장 베드로 동상
▲로마 바티칸 광장에 있는 베드로 동상.
1. 대부분 학교에서 시험이 끝났습니다. 시험기간은 공부를 한 학생이든 아니든 긴장하게 되는 기간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가 있습니다. 어느날 먼저 “삼촌, 나 다음 주가 시험이야. 학교가기 싫어”라고 했습니다.

저도 늘 그랬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신기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읽기 싫던 신문 사설도 재미있어집니다. 갑자기 책상 정리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험만 끝나봐라 하면서 시험 끝나고 할 일들을 적어보곤 하는 것조차 재미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험지를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시험을 안 받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내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령이 사탄에게 시험 받으라고 내몰았다고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령이 인도했다고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말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향해야 할 대상은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는 것을 인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함께하면 사탄의 시험도 없겠지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언제나 매우 다양한 사탄의 시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2. 제가 참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C. S.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환자(그리스도인) 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방법을 편지의 형태로 보냅니다. ‘사랑의 편지’가 아니라, ‘사탄의 편지’이지요.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그리스도인을 유혹해서 원수(예수님)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을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몇 주에 걸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험들을 잘 이겨내기 위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시험을 잘 보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시험 날짜입니다. 중요한 시험일수록 날짜는 미리 공지됩니다. 시험 시간을 알아야 벼락치기라도 합니다. 의외로 벼락치기 효과는 짭잘합니다.

둘째로 시험 범위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번 ‘사랑의 편지’에는 언제 시험이 오는지, ‘시험 시간’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디 이 편지를 통해 언제가 시험인지를 눈치채서, 긴장하고 바짝 깨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4. 예수님은 친히 시험 시기를 세 가지로 알려주셨습니다.

1) 결핍이 강할 때입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누가복음 4:2)”.

배가 고플 때 사탄의 첫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배가 고픈 것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핍 상태입니다.

그런데, ‘주리신지라’로 번역된 동사 헬라어 ‘페아니오(πεινάω)’는 열렬히 어떤 것을 욕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결핍 상태일 때 비로소 내 욕구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결핍 상태가 필요합니다. 내 욕구가 정말 무엇인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결핍은 다시 말해 채우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신혼부부 모임에서 한 형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면, 그건 이별 직전 상태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무엇이든 구하려구요. 그런데 정말 뭘 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습니다. 정말 결핍해질 때 정말로 하나님 나라를 원하는지, 세상의 것을 원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정말 내가 누군가를 채워주는 것을 원하는 사람인지, 그 사람을 삼키고 싶은 사람인지도 그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채워주고자 내어주시지만, 사탄은 우리를 삼켜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못먹는 그때가 시험의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랬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어지니, 하나님의 은혜를 잊습니다. 물이 먹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지니, 홍해를 가르셨던 기적도 잊습니다. 물이 중요한 것도, 고기가 중요한 것도 아닌데 더 중요한 걸 놓칩니다.

그런데 그 욕구는 나의 결핍 때문에 생겨납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8번째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한, 인간은 육체적으로 풍성하고 활기차며 쉽게 감동하는 시기와 무감각하고 결핍된 시기를 번갈아 겪어야 한다. (중략) 예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우리한테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식량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이와 전혀 다르지. 우리가 원하는 건 키워서 잡아 먹을 가축이지만, 그분이 원하는 건 처음엔 종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들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빨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는 내뿜고 싶어하지. 우리는 비어 있어 채워져야 하지만 그는 충만해서 넘쳐 흐른다! 그는 충만해서 넘쳐 흐른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합니다. 광야에 와야, 비로소 내가 애굽에 의지했음이 드러납니다. 결핍 상태에 이르러 보니, 내 정말 욕구가 뭔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결핍이 강해지면, 사랑하는 듯 해도 욕구가 강해질 때가 많습니다. 내 뜻대로 돼야 사랑합니다. 성령은 반대입니다. 부족한 사람을 만났을 때 채워주고 싶어집니다. 내가 내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사람은 관계로 살아갑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삼키려는 자인지 내가 채워주려는 자인지는, 내 욕구가 좌절될 때 드러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채우는 자로 착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연의 모습은 모든 것이 좌절되고 거절되는 광야, 배가 고파 주리게 되는 그 순간 정말 인정받고 싶었던 것밖에 없고, 사랑받고 싶었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2) 위기와 고통 뒤에 시험이 옵니다.

누가복음 4장 2절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사십일을 금식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선한 욥도 고통이 오자 자신의 믿음 밑천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이르러 물과 고기가 없자, 비로소 믿음 없음이 드러납니다.

내 기준에서 어긋난 사람들을 보면서 “저 이는 믿음이 부족해”라고 말하며 정죄하는 우리 모습에는, 향유 옥합을 드리는 여인을 시기하며 정죄했던 유다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있습니다. 위기가 오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혜민 스님의 책이 유행했지만, 그 의미를 그리스도인은 고통으로 재해석하면 알게 됩니다. ‘고통이 오면, 비로소 멈추게 된다’고 말입니다.

조금만 아프면 우리는 “아!” 소리를 내면서 멈춥니다. 고통이 와야 우리 방향이 수정됩니다. 십자가, 가장 큰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부활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편하게 드린 것이 아니라,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할 때, 즉 기도가 고통이 될 때까지 기도해야 하나님 뜻을 수용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정말 힘들어 봐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편안하면 사실 잘 안 찾습니다. 예배는 드려도, 하나님도 그저 내 삶 속 편의주의 장치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배드려도 예배드린 즉시 편한 삶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마음이 편하려고 예배드리니까, 불편하면 안 드립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정말 무서운 시험이 있습니다. 언제 시험이 시작되었는가? 사십일 금식기도가 끝나고부터 시작됐습니다.

3)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일(그 외 어떤 것이든)이 다 끝났다 생각할 때, 본격적인 시험이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리고나서부터,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신앙 생활을 오래 하거나, 본인 스스로 ‘내가 이 정도면 예배는 정말 열심히 드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직분이 있으면 특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사역자라면 명심해야 합니다.

예전에 카페에서 나눔을 하고 있을때입니다. 주변에서 MBTI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도 들리고, 교회 이야기도 하는 겁니다. MBTI가 워낙 핫하기도하지만 강사 자격을 위해 공부했던 탓인지 교회 이야기만큼 잘 들립니다.

안타까웠던 일은 그 이야기를 빗대어 사람들을 비난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누구누구 집사님은 T가 많아. 그래서 안돼. 그래서 나랑 안 맞아’, ‘누구누구 전도사님은 ~’ 하면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흉입니다. 남의 흠집내는 것을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이 공중에 전파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한다” 했는데….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세상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일 때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에게는 회개요, 타인에게는 용서입니다. 남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잘 드린 뒤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비난하고 있는 모습이 온 공간을 지배합니다.

예배가 끝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험이 시작됩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되뇌이며 그렇게 다짐했건만, 예배가 끝난 직후 들어오는 편한 사람과 자연스레 눈이 마주치며 발걸음은 그리 향합니다.

불편함을 멀리하는 순간, 내가 유일하게 1주일에 한번 다가갈 수 있었던 그 사람과의 만남은 멀어집니다. 스스로 가진 자책을 회개로 돌리기에는 고통을 멀리하고 싶은 우리는, 다시 그 회개의 언어를 비난과 핑계의 언어로 삼습니다. 타인과 환경의 탓을 하며 말입니다.

예배가 끝난 직후 곧바로 다가와 인사를 나눠주는 살갑고도 믿음 좋은 언니, 오빠, 형, 누나 집사님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사탄의 교묘한 시험은 시작됐습니다.

예배뿐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중요한 섬김과 봉사가 끝난 직후, 시험이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어떠한 섬김과 봉사를 ‘일’처럼 여깁니다. 하나님을 향한 봉사, 성도들을 위한 봉사의 정신이 아니다 보니 ‘보상’을 기대합니다.

금전적 보상이 오지 않으니, 그 상태는 심리적 보상을 요구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나와 같이 봉사하지 않는 이들은 믿음이 없고, 불성실하며, 공동체 의식이 없는 이들처럼 보입니다.

내가 교회와 공동체에서 섬기던 일이 끝났으니 나는 완벽하게 이번에도 잘 해냈다는 자의식이 점점 높아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와 서로 사이에 담장을 쌓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억해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열심히 디베랴 호숫가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마치시고, 식사까지 다 끝낸 후 하셨던 일을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도, 디베랴로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갈래”라며 무리들을 이끌고 갔던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약속했던 것을 곧바로 내다버린 사람입니다. 가장 감정적이고 가장 인정받고 싶었던 베드로의 자존심은 얼마나 상해 있을까요? 아마 그는 “차라리 안 보고 말겠다” 다짐했거나, 예수님과의 만남 자체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편한 디베랴로 갑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광야를 만납니다. 밤새도록 허탕을 칩니다.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광야 없이, 베드로는 무엇이 자기의 진짜 욕구인지를 볼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그저 물고기 말입니다.

실은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옆자리가 필요했던 자기 모습 말입니다. 나를 채워줄 수 있는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감정적인 베드로는 급하게 수영쳐 왔지만, 결국 말 한 마디 못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언어가 기억나야 합니다.

“넌 왜 그 모양이냐”가 아니라, “아침밥 먹자”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명까지 완벽하게 모든 것을 끝내신 예수님이, 아무것도 못하고 자기 스스로의 고백도 저버린 베드로에게 하신 언어는 “밥 먹자”입니다.

조반상을 차리시고 같이 음식을 다 끝내신 예수님의 언어는 또한 어떻습니까? ‘사랑’, 결국 우리가 행하고 있다고 착각한 사랑의 차이 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을 물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날 사랑해줘”라고 그 사랑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베드로의 수준, ‘필레아’의 사랑으로 내려가셨던 채워줌의 사랑이었던 순간입니다.

스스로 했던 수많은 고백이 거짓말이 된 채, ‘이제 나는 못한다, 할 수 없다’고 무기력해지고 자존감이 바닥난 베드로. 아니 디베랴라는 바다의 광야에서 자신의 현 모습이 여실없이 드러난 고통 앞에, 자기 자신을 포함해 그 누가 베드로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베드로를 향해, 모든 것이 다 끝난 예수님의 그를 향한 언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 양을 네게 맡긴다. 내 양을 치라.”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부활 이후 “난 다 끝났어” 하고 가셨다면, 초대교회 역사로 이어지는 사도행전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도들의 역사도 우리는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이 끝났다 생각할 때 조심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준에서 끝내지 못한 채, 베드로처럼 방황하는 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넌 왜 니 약속을 못지키니?” “넌 왜 또 거기에 있니?” “넌 왜”라고 말하는 언어를 중단하십시다. 그것은 실은 내 자신을 향한 자아 비난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야말로, 내가 끝났다 생각하는 기준을 스스로 정한 채 예배를 드리거나 섬김과 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끝나면 우리야말로 내가 편한 곳으로 향하는 베드로요, 언제나 내 노력으로 살려고 바둥거리는 디베랴 호숫가의 베드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자기가 정한 선에서만 사랑했던 베드로이기 때문입니다. 실은 가슴 속에 온갖 상처로 가득차 있어, 남도 그렇게 바라보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 베드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을 수 없는 우리를 주님은 오늘도 믿어주십니다. 그렇게 너를 보내주십니다. 나로 똘똘 뭉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나에게, 너를 보내주심은 곧 기적입니다. 그 나와 너 사이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배가 행위로, 섬김과 봉사도 행위로만 끝내고 결국 내 만족에만 그치게 되는 우리의 믿음, 그것을 시험하는 사탄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를 믿어주신 하나님처럼 너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너를 믿고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 수준에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소망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다 무너진 디베랴 한복판의 베드로에게 꿈이 될 것입니다.

류한승
▲류한승 목사. ⓒ크투 DB
류한승 목사
생명샘교회, AMCM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