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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23절


지구촌에 발생하고 있는 이상 현상들

우리나라는 지금 홍수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나고 제방뚝이 터지고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긴 곳도 있습니다.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렇게 피해를 입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이 폭우와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두 달째 폭우가 쏟아진 중국은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은 5,480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고, 우리나라 국토의 절반 정도가 물에 잠겼습니다. 재산 피해액만 우리 돈으로 무려 24조 6천억 원이라고 합니다.

인도와 네팔, 방글라데시 역시 폭우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나라의 1/3이 물에 잠겼습니다. 지난 8월 4일 미국에는 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이사이아스’가 상륙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9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8월 5일은 캐나다 북극의 만년설 두 곳이 5천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위성사진을 인용해 CNN이 보도했습니다. 또 이른바 ‘얼음왕국’이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시베리아에는 8만년에 한 차례 있을 법한 고온 현상으로 곳곳에서 산불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현재 136개 산불은 폭약이나 인공강우로 진압하고 있지만, 나머지 159개의 산불은 속수무책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은 1955년 기록 작성 이래 65년 만에 42도를 기록했고, 영국도 37.8도로 역대 세 번째로 더운 날이 관측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상 현상이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고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뿌린 대로 거두고 있다

지난 3월 27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우석영 환경철학자의 ‘인간이 초래한 어떤 오래된 질병’이라는 칼럼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미 1980년대부터 기후과학자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이야기했고 일부 생태학자, 역사학자, 감염병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신종 감염병의 위험을 역설해 왔다. 이제야 그들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역사의 표면 위로 올라와 우리의 귀에 쟁쟁할 뿐이다.

1920년 아프리카, 침팬지를 식용한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침팬지가 보유하고 있던 특정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다. 에이즈였다. 1976년 콩고의 에볼라 강변, 원시림이 파괴 되면서 인간과 야생동물 사이의 접촉으로 88퍼센트의 감염병이 속출했다. 에볼라였다.

비극은 계속된다. 1998년 말레이시아, 숲속의 돼지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가 옮겨온다. 인간이 숲을 침범하여 양돈 농장을 확대한 결과였다. 원인은 박쥐가 떨어뜨린 과일 조각을 돼지가 먹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외에도 대부분의 전염병의 출연의 뒷 배경에는 항상 인간이 존재한다. 우리가 숲을 파괴하고 자연의 조건을 헤집어 놓을수록 우리는 더 크게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결국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가 감염병과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현 시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회사상가이자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후 변화가 모든 팬데믹의 원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라도 예측했습니다.

인간은 지금 뿌린 대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왔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직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원이 고갈되지 않을 것처럼 사용하였고, 현재의 편리한 삶을 위해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지구는 계속해서 아프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은 그것을 무시해 왔습니다. 인류는 지구의 아픈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직선의 삶 & 곡선의 삶

많은 사람들이 끝은 그냥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은 바닥이며 절망이고 좌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직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끝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할 때까지 끝이 아닙니다. 하루의 끝에서 내일이 시작됩니다. 주말에서 주초가 시작되고 월말에서 월초가 그리고 연말에서 연초가 시작됩니다.

끝은 영원한 종착역이 아니라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또 다른 출발선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오늘의 끝이 안 좋더라도 오늘의 끝에서 새로운 내일을 꿈꾸면 됩니다.

한 번의 시도 끝에 맞이하는 기대 이하의 성과도 또 다른 성취를 위한 출발선의 교훈으로 삼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삶입니다.

곡선은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새로운 출발입니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가 곡선의 세상입니다. 반면 직선은 시작과 끝만 존재하고 결과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입니다. 때문에 과정에서 즐기는 여유로움과 운치는 생략되고 오로지 결과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직선적 삶에서는 호기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직선의 여정에는 약간의 변수가 작용하긴 해도, 비교적 규칙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곡선으로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세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지만, 그 속에는 기다림과 설렘이 있습니다. 모험심과 도전정신을 가지게 됩니다.

곡선의 삶이 아름답다

이준관 시인의 《구부러진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 시인이 말하는 구부러진 길을 가는 것이 바로 곡선의 삶입니다. 곡선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나무가 더 멋스럽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 굽이굽이 휘어진 강줄기가 더 정겹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길보다 산 따라 물 따라 구불구불 가는 길이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둥글둥글한 사람, 넉넉한 사람이 좋습니다.

광야 길이 곡선의 삶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까지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블레셋 사람의 길입니다. 이 길은 해안을 따라서 가는 길로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거리상으로 볼 때 250km 정도 됩니다.

이 길을 이용하면 1주일 이내로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통과하려면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둘째, 술 길입니다. 이 길은 바란 광야와 네게브 지역을 거쳐서 가는 길인데 이 역시 전쟁의 위험이 있는 길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왕의 대로입니다. 이 길은 시내반도 중앙부를 가로질러 모압 평지를 경유하여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에 도착하는 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 길 중 어느 길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대로를 통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시내반도 남단까지 내려가는 완전한 우회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직선의 길이 아니라 곡선의 길인 광야의 길을 가게 하신 이유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4)”.

하나님께서 광야의 길이라는 곡선의 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로 세우시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빨리 가는 직선의 삶보다 곡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곡선의 삶을 선택한 바울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눈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둥글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얻고자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 왔다 갔다가 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여러 가지 옷을 입은 것입니다.

진리는 동일하지만, 그 표현 방식을 다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곧 바울은 여러 사람을 구원하고자 직선의 삶이 아닌 곡선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곡선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곡선의 삶은 공감하는 삶이다

첫째, 곡선의 삶은 공감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얻기 위해 유대인 같이 되고 약한 자들을 얻기 약한 자들처럼 되었다는 것은 그들과 공감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직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공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 이야기만 하려 합니다. 하지만 곡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공감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공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내려놓고 판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다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아주 따뜻하게 안아주면 내 생명이 하루 더 연장된다.” 물론 이 말이 사실인지를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세상에 치여 상처받고 힘들 때 누군가 나에게 왜 힘든지 그 이유를 구구절절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따뜻하게 안아주는 포옹이야말로 더 큰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너의 아픔을 내가 대신할 수 없겠지만 너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 포옹 속에 담긴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아무런 말없이 그냥 안아 주는 것, 같이 눈물 흘려주는 것이 바로 공감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감의 대가다

신학 용어 가운데 ‘성육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육신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 가운데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겪어야 하는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셨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예수님께서 체휼하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도 다 아시기에 같이 아파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다 아시기에, 함께 기뻐해주시고 즐거워해 주십니다. 같이 공감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현장에서 음행하다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령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이 말씀에 양심을 가책을 받고 사람들은 다 떠나갑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음행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을 공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감의 대가셨습니다.

아무도 똑바로 삶의 길을 걸어온 사람은 없다

예전 눈 오는 날,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한참 걷고 난 이후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하얀 눈 위에 제가 걸어온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발자국은 똑바르지 못했습니다. 저는 똑바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비뚤비뚤 했습니다. 제 발자국만 그렇겠습니까? 제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제 발자국과 삶의 발자취만 그렇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당당하게 나는 똑바로 삶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휘청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곡선의 삶입니다.

곡선의 삶은 삶의 시야를 넓히는 삶이다

둘째, 곡선의 삶은 삶의 시야를 넓히는 삶입니다. 승용차를 운전하는 것이 쉬울까요, 트럭을 운전하는 것이 쉬울 까요? 트럭을 운전하는 것이 쉽습니다. 승용차는 운전자가 볼 수 있는 시야가 좁고 트럭은 넓기 때문입니다.

여성분들이 승용차를 운전하시는 것을 보면 양손으로 꼭 움켜잡고 운전을 합니다. 승용차를 운전하면 시야가 좁은데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고 가니까 옆에서 차가 끼어드는 지도 모릅니다. 옆도 살펴야 하는데 앞만 보고 가니까 사고의 위험도 높습니다.

바울은 전도의 대상을 유대인으로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전도여행을 통해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삶의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직선의 삶을 사는 앞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야가 좁습니다. 곡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나의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환경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속도를 줄이고 시야를 넓혀라

리더십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김성희 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1막과 2막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진도를 빨리 나가는 속도(速度)의 경쟁이었다면, 이제 인생 3막은 진정한 자신의 내면과 꿈의 방향을 만들어나가는 밀도(密度)의 경쟁이다.”

속도는 남과의 경쟁이지만, 밀도는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속도는 빨리 가는 방법에 관심이 많은 반면, 밀도는 내면의 결핍된 욕구를 채우는데 더 의미를 부여합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삶의 속도를 줄이고 삶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속도가 빨라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듭니다.

마라톤 경기를 보면, 시종일관 선두권을 유지하는 선수들에게는 오로지 출발선과 골인지점만 보입니다. 오로지 1등을 해야 되겠다는 긴장감과 선두권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반면 선두권에는 끼지 못하지만 후미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생각하면서 사색의 달리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인생을 사는 목적은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1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품고 그 곳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시야를 넓히는 곡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곡선의 삶은 부드러운 삶이다

셋째, 곡선의 삶은 부드러운 삶입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종을 앞둔 스승이 제자를 불러, 자신의 입안을 보여 주며 물었습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혀는 있고 이는 없는지 아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럽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그것이 세상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이제 더 이상 네게 줄 가르침이 없구나.”

바울은 강한 면도 있었지만,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이라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남자가 강한 것 같아도 여자의 부드러운 사랑에 힘없이 무너집니다. 물은 부드러워 어디든지 스며들어 갑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방탄복의 원리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방탄복이 어떻게 강철도 뚫고 나가는 빠른 총알을 막을 수 있는 것일까요?

현대식 방탄복은 미국의 섬유기업 듀폰에서 1972년 ‘케블라’라 부르는 질기고 강한 실을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케블라는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약 5배 정도 더 튼튼하다고 합니다.

케블라로 짠 천을 손으로 만져보면 얇긴 하지만 부대자루처럼 거칠고 뻣뻣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방탄복에는 강철과 같은 단단한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케브라로 짠 수십 겹의 천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총알이 방탄복에 맞으면서 그물과 같은 케브라로 짠 천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방탄복의 원리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또 하나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곡선의 삶은 부드러움이 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세상의 힘이 강한 것 같아도, 주님을 향한 영적인 부드러운 힘이 이깁니다. 겸손의 힘이 강한 권력의 힘을 이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마귀를 이깁니다. 우리는 부드러움으로 세상과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인생은 지도 만들기다

인생은 ‘지도 만들기’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에는 낯선 길을 가려고 하면 지도가 필요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지도 만들기가 쉽습니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그 자체가 지도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 시대 우리나라 지도를 그렇게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지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수없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바른 길로도 갔을 것이고, 곡선의 길로도 갔을 것입니다. 익숙한 길로도 갔을 것이고, 낯선 길로도 갔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도는 만들어집니다.

우리 인생의 지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때로 우리는 직선의 삶을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직선보다 곡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곡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요, 바울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우리는 직선보다는 곡선의 삶을 통해, 아름다운 인생의 지도를 그려가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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