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반 탈북 사역자
▲김요한 목사. ⓒ이대웅 기자
열방빛선교회(대표 최광 선교사)는 ‘G. M. I 탈북민 성경통독 100독 학교’를 통해 탈북 청년들의 신앙 훈련과 심령의 변화는 물론, 성공적인 남한 정착까지 도모하고 있다. 지난 2014년 1기 졸업생이 배출됐고, 현재 5기생들이 함께하고 있다.

5기 성경통독반 탈북민 학생들은 경기 포천 한 기도원에서 1년간 합숙하며 성경통독과 기도, 공동체 훈련을 하고 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성경통독과 말씀암송, 기도가 계속된다. 성경으로 삶이 바뀌고 있는 이들을 만나 ‘통독’과 자신의 삶에 대해 들었다. 특히 지난 8월 6일부터 1주일간 성경통독반을 거쳐간 탈북민 사역자들의 ‘홈커밍데이’에 참석한 사역자들도 함께했다.

◈탈북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성경을 함께 통독하다

김요한 목사(안산하나교회)는 대한민국 출신으로 열방빛선교회 성경통독 100독 학교를 졸업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것도 1기생으로.

“인천 주안장로교회에서 탈북민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탈북민들을 사랑하는 은사’를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10년간 사역을 하다 부르심을 느끼고 신학을 공부했는데, 말씀에 갈급함이 생겼습니다. ‘사랑뿐 아니라, 말씀으로 생명을 살려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2013년 최 선교사님에게서 1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씀을 듣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탈북민들이 대상이지만, 배우고 싶다는 소원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은 시행착오가 많은 법이다. “많은 탈북민 청소년과 청년들이 찾아왔고, 또 많이 떠나기도 했지요. 지금은 많이 안정됐지만, 그때는 내부적인 갈등과 어려움도 없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사랑의 은사가 있어서, 북한 아이들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숙식을 나누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제게 탈북민 사역의 문을 열어준 곳이 바로 통독학교입니다.”

함께 숙식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음식’이다. “오랫동안 한국인 입맛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처음 북한식 음식을 먹게 되니 입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의무적으로 먹었지만, 교제와 나눔이 깊어지면서 그들의 섬김에 감사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북한 아이들은 간식으로 무나 작은 멸치를 먹었습니다. 차츰 매일의 삶 가운데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 때의 경험은 그를 ‘탈북민 전문 사역자’로 만들었다. “10여년 후 준비가 됐을 때 탈북민 선교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계속 훈련받으면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갈급하고 필요할 때 통독학교를 알게 하셔서,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세워진 계기가 됐습니다. 말씀이 무기처럼 갖춰진다는 느낌이 들어 감사했습니다.”

통독학교 졸업 후인 2013년 12월 6일, 안산에서 탈북민 대상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시작했다. “저는 인천에서 10년 이상 탈북민들을 섬겼기에, 재정은 부족하지만 인천에서 사역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교회에 나오지 않지만, 그곳에는 제가 개척만 하면 따라올 탈북민들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안산에서 연락이 왔다. “북한 선교의 비전을 품은 어떤 분께서 교회 건물 하나와 빌라 두 채로 함께 시작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인천 지역을 품고 있었기에, ‘보름만 기도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안산으로 갔습니다.”

돌아보니, 그에게 안산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다. “평신도 선교사로 오랫동안 사역했는데, 교회에서 사례를 받거나 파송을 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마음으로 혼자 사역했기에, 모든 것이 부족하고 가정에서 아빠 노릇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안산에서의 부르심으로 아들 내외의 집 문제까지 해결됐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은사’가 궁금했다. “부모님 고향이 황해도이셨기에, 북한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습니다. 성격도 보수적이었지요. 교회학교 교사로 10년째 섬기는데, 선교에 대한 부담을 계속 주셨습니다. ‘언어 문제도 있고, 어떻게 합니까?’ 물었더니, ‘북한’에 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가 탈북민 집사 7명을 세웠지만, 따로 북한선교부도 없던 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부족한 저를 부르셔서 2년간 기도하게 하시고, 북한선교부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국내 탈북민들을 섬기다, 본격적인 탈북민 사역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2007년 중국에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하나님께서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신앙이었지요. 연길에서 이런저런 사역을 돕다가 ‘북한에 들어갈지 말지’ 사인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달 후 ‘들어갈 수 없으니, 국내 탈북민들에게 가라’는 마음을 주셔서, 그 때부터 국내 탈북민 사역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의 교회에서는 20여명의 탈북민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예배를 드린 뒤, 한 주간 삶 가운데 말씀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나눔을 갖고 있다. “탈북민들이 헌금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재정 때문에 걱정한 적은 없습니다. 정착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부침은 있지만, 오늘까지 기쁨과 은혜로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안산 지역에서는 최근 통일교 같은 이단사이비와 타종교 등에서 돈을 뿌리면서 탈북민들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선교가 쉬운 상황은 아닌 것이다. “믿음이 없는 분들을 두세 달 가르쳐서 귀가 열릴 만하면 여기저기 돈 준다는 곳으로 가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말씀으로 채워지는 탈북민들이 있다고 한다. “제 사명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기에,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교회가 안정되면 잘 준비된 탈북민 사역자에게 교회를 인수인계하고 새롭게 개척하고자 합니다. 저를 안산으로 부르신 그 분도 153개 교회 개척의 꿈이 있는 분이시고요.”

그는 한국인으로서 직접 탈북민들과 1년간 부대끼며 성경통독을 통한 그들의 변화를 직접 목격한 바 있다. “북한 사람들, 참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교회에도 처음엔 말씀을 들으러 온다기보다, ‘섬김’을 바라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성경통독을 하면서, 탈북민들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모습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6개월만 지나면 방방 뛰어요(웃음).”

탈북민을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역했지만, 그 10년의 기간보다 여기서 6개월 함께한 이들이 훨씬 믿음으로 세워지는 걸 느꼈다고 한다. “내면에서부터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걸 경험했습니다. 통독의 ‘맛’을 알고 저희 교회에서도 해 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희망자들만 1년에 두 번씩 함께 읽고 있습니다.”

김요한 목사의 비전은 최광 선교사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는 것이다. “북한 선교사 5천명을 세우는 꿈을 갖고 통독학교를 열고 계시는데,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벌써 65세인데, 시간이 마음이 애타고 안타깝습니다. 1년에 한 곳씩 개척해도 85세까지 20곳밖에 개척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죽는 날까지 그 일을 하고 주님 앞에 서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남북한 통일 후의 비전도 물론 마련돼 있다. “복음을 들고 북한 땅으로 가서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고,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며, 치유와 회복을 이루고, 그것을 넘어 열방의 빛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교회가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열방빛선교회 성경통독 100독 학교 박사라
▲탈북민들이 성경을 통독하고 있는 가운데, 박사라 씨가 앞에서 이들을 인도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한국→필리핀→미국→독일→한국

28세 청년 임일 씨는 성경통독반 2기를 졸업했지만, 작년 11월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 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역을 위해 신학교를 가고 싶었습니다. 앞서 영어공부를 하러 필리핀에 갔다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신학교를 가려고 미국 신학교에 신청하고 돌아왔는데, 비자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독일로 가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처음엔 좋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으니 예배에 대한 갈망이 커졌습니다.”

너무 힘들었던 임 씨는 탈북민들 예배 사진이라도 좀 찍어달라고 했다가, 마침 모두 미국에 와서 컨퍼런스 중이었다. 독일 선교사에게 고민을 토로했더니, 한국에 돌아가서 기도로 회복하고 오라고 했다.

돌아와서 11월 최광 선교사에게 전화해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한 달 동안 산에서 기도하고 가라는 마음을 주셨다. “기도하다 하나님이 주셨던 마음 같다. ‘숨 끊어질 때까지 하나님 길을 가겠다’고요. 일시적인 느낌인가 해서 좀 더 기다리다, 12월에 신학교 가기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2기 성경통독반 당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밖에서 험한 일을 해 왔기에, 폐가 망가져 치료를 받으면서 통독을 하다 보니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몸이 안 좋으니 1년간 몸 추스르면서 겸사겸사 해야겠다고 올라왔었지요. 열심히 통독하고 기도했지만, 그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예전엔 제가 살기 위해 공부했지만, 지금은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결단했기에 2기 때와는 완전히 마음이 다릅니다. 더 뜨거워졌다고 할까요?”

임 씨는 독일에서 예전의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난민들을 섬길 기회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에 한국 선교사님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인데, 제 느낌엔 자녀 교육이나 살기 좋아서 들어오신 것 같았습니다. 난민들이 빵과 우유를 주면 너무 좋아하고, 교회에서 매일 주겠다고 하면 다 교회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한인 목사님들은 그런 걸 신경 안 쓰시는 것 같았습니다.”

‘종교개혁의 나라’ 독일의 현실도 목도했다. “난민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는 알지만, 예수님은 모릅니다. 제가 영어와 독일어가 어느 정도 가능해서, 그곳으로 가 난민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감사하겠다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응답될진 모르지만 마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가능할 것입니다. 거기서도 성경통독 학교를 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