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한국형 ‘포괄적 문무겸전 슈퍼히어로’의 매력

입력 : 2018.07.01 22:27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마녀> (上)

마녀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 <마녀>.
◈한국형 슈퍼히어로: <로건>, <루시>, <옥자>, 그리고 <마녀>

할리우드에서 지겹도록 제작되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영향 덕에, 언제고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가 나오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한국에 슈퍼히어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뢰매> 시리즈로 대표되는 어린이용으로 급조된 괴작 수준의 작품들은 예외로 치자. 일단 올해 1월 <염력>이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는데, 연출과 서사의 개연성 모두 기대에 못 미쳐 참담한 수준으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염력>이 실패한 후 국내에서 마블 혹은 DC 슈퍼히어로 영화만큼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의 형태가 어떨지 궁금하던 차였는데, 며칠 전 개봉한 <마녀>가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듯 하다.

물론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마블과 DC 작품들에 의해 눈높이가 한없이 높아진 관객들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긴 했어도, 요소 요소에 한국적 요소들을 녹여낸 참신성이 있어 <염력>보다 볼 만한 수준인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굳이 분석해 보자면, 실험용 인공 돌연변이가 실험기관에서 탈출해 자기 삶을 찾으려 분투한다는 모티프는 <로건(Logan, 2017)>으로부터, 지능 증강을 통해 초인적 능력을 개화시키는 모티프는 <루시(Lucy, 2014)>로부터,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내는 10대 소녀가 세상에 저항하는 외로운 싸움을 수행하는 모티프는 <옥자(2017)>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수준의 독창성을 과시할 게 아니라면, 기존 영화들이 가진 매력적 요소들을 짜집기해, 볼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내는 감독들이 수두록한 판에 <마녀> 정도면 평작 수준은 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영화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입장에서 영화의 재미나 완성도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문화 속에 함축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는 것이다.

<마녀>를 보면 오늘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계 극복, 초월 개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듯 하다. <마녀>에서 확인되는 한국형 슈퍼히어로의 매력 조건은 첫째는 포괄적 만능, 두 번째는 가족, 세 번째는 농락과 복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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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포괄적 만능형 슈퍼히어로 자윤(김다미 분).
미국형 슈퍼히어로들을 상기해 보자. 그들은 항상 한두 가지 중대한 약점을 갖고 있다. 특히 계산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가장 뛰어난 지능을 가진 아이언맨이나, DC 세계관에서 가장 영리한 것으로 알려진 배트맨, 그리고 엑스맨 시리즈에서 가장 출중한 지능을 가진 프로페서 X, 비스트, 또는 악역 가운데 가장 교활한 것으로 평가되는 매그니토조차 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뭔가 항상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헐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히어로들과 빌런들이 어딘가 치밀하지 못한,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허술함을 주고받으면서 서사가 흥미로운 단계로 치닫는다. 이 때 미국형 슈퍼히어로들은 그들이 가진 지적인 허술함의 약점을 초월적 신체능력과 물리력으로 극복한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마블과 DC의 히어로들은 미국의 이상적 영웅상을 반영한다. 근육으로 무장한 채 어떤 난관과 어려움과 상처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투쟁하는 영웅, 이런 것이 미국적 히어로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슈퍼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반면 <마녀>로 대표되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는 육체적 측면만 본다면 미국의 슈퍼히어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모습이다. 물론 여기에는 헐리우드에 현저하게 못미치는 국내 영화계의 스턴트 액션과 CG 수준도 일조하고 있지만, 이런 사정을 차치하고라도 한국형 히어로는 이미 설정 단계부터 육체적 초인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적 초월욕망: <마녀>, 유교적-도가적 이상형

대신 <마녀>에 등장하는 자윤(김다미 분)이나 미스터 최(박희순)는 포괄적인 만능형 캐릭터라는 점 때문에 초월적인 존재로 인정된다. 자윤은 한국의 소시민들이 바라 마지않는 이상적 조건들을 모두 갖춘 캐릭터다.

텍스트를 보든 이미지나 영상을 보든 한 번 보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고, 그래서 항상 전교 1등이고, 노래도 잘해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주목받을 정도고, 외국어도 못하는 것이 없다.

이른바 성적과 시험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연예계에서 주목을 받으며,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어 능력자로서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인간상이 '자윤'이라는 등장인물에게 종합돼 있다.

그뿐이랴. 실험기관에서 탈출했을 때 자기를 구해주고 돌봐 준(혹은 구해주고 돌봐주도록 계획된) 노부부에게 더할 나위 없는 효녀로 사랑을 받는다. 교우관계도 돈독해서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명희(고민시 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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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주인공. 한국인들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형이 모두 투영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형 히어로는 계략과 복수에 능하다. 미국의 캐릭터형에 대비하자면 트릭스터(trickster)에 가까운데, 그보다는 장난끼와 익살스러움이 덜하고 한과 독기가 서린, 매우 한국적인 성품을 가진 히어로다.

<마녀>의 자윤은 실상 자신의 실험실 모르모트와 같이 취급당했고, 그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탈출한 사실 모두를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기억을 잃은 척, 능력이 없는 척 약점을 내보인 뒤 강력한 복수의 일격을 가한다. 이는 미국의 히어로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사실상 <마녀>의 자윤은 최근 중국과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사마의: 미완의 책사>에 등장하는 사마의의 능력과 성격을 닮았다. 굽힐 때 굽힐 줄 알고 약자인 척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의 숨통을 끊는 교활함은 난세의 간웅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러모로 보건대, 한국형 슈퍼히어로는 유교적 슈퍼히어로라 해도 무방하겠다. 신체능력과 지적능력의 포괄적 만능이라는 점에서는 '문무겸전(文武兼全)', '문일지십(聞一知十)', '백미(白眉)'의 조건에 부합한다. 효녀이자 좋은 벗이라는 측면에서는 '자로부미(子路負米)'나 '막역지우(莫逆之友)'의 조건에 부합한다. 복수를 위한 독한 심성과 계략을 갖췄다는 점에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조건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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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해 보이는 여고생에서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교활한 능력자로 변모한 자윤.
이런 유교적 이상에 더해, <마녀>의 자윤이라는 캐릭터에는 한국적 이상이 한 가지 더 추가되어 있다. 바로 <귀거래사>나 <관동별곡>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연을 벗하며 세상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에서 초탈한 도가적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이다.

모든 거사를 마친 뒤, 자윤은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물리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모든 것(자유, 수명)을 얻는다. 하지만 자윤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고 나서 누리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양부모와 친구와 함께하는 평범하고 농촌소녀의 삶이다.

이처럼 영화 <마녀>가 소개하는 한국형 슈퍼히어로는, 미국의 슈퍼히어로와 달리 충실하게 한국적 욕망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매력적인 면모를 보인다.

◈세속화된 초월 욕망: 기독교적 소망의 망각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비롯해 <마녀>와 같은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에는 기독교적 시각으로 볼 때 명백하게 불편한 요소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바로 초월욕망의 세속화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와 지성에 자립잡고 있던 극악한 유한성을 영혼 구원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극복할 것을 가르쳐 왔다. 영혼이 '하늘들의 하늘', '주의 나라',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갈망하는 것이 진정한 초월의 소망이라고 가르쳐 왔다.

이런 영적 초월 개념은, 비록 이데아의 세계, 예지계에 대한 환상을 가르쳐 온 플라톤 철학과 결합된 신학에 의해 간혹 극단화되고 왜곡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현실을 도외시하는 허상이라는 비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존속, 그리고 부활과 영생·영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성서적 가르침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초월을 향한 소망을 지탱하는 핵심 사상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이런 초월의 소망을 지상적인 한계극복과 우월감의 향유에 대한 욕망으로 변개시키는 데 일조한다. 온갖 기발한 연출을 통해 미화된 히어로 캐릭터들의 이상적 특성들은 이런 영상에 노출되는 관객들의 마음을 욕망으로 연단시킨다.

이런 면에서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들은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인의 욕망과는 다른, 미국인들의 세속적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이질감이 있고,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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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으로 비틀린 초월욕망을 담은 영화 <마녀>.
반면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는 한국인의 마음의 세속적 욕망, 한계극복의 욕망을 거침없이 파고들어 자극할 소지를 다분하게 내포하고 있다. 제법 진중한 슈퍼히어로 영화로서는 <염력>에 이어 겨우 두 번째 제작된 것에 불과한 <마녀>가 벌써 이를 확연하게 입증하고 있다.

<마녀>의 주인공 다윤은 전교 1등을 하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아무 어려움 없이 습득하고, 노래도 잘해서 방송으로 인기도 얻고,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법한 인자한 노부모에 지란지교를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

또 행복을 위협하는 적들을 얼마든지 농락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고도의 계산적 지능과 적절한 신체능력을 갖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 소시민들의 이상이 이 한 등장인물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런 세속화된 초월욕망들이 자신에게 모두 충족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구원과 내세의 영생을 얻기 위해 자기를 낮추고 죄를 자복하는 신앙의 삶을 사는 데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쉽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인간은 자고하기는 쉬워도 초월자 앞에 겸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마녀>와 같은 영화에 노출된 채 주인공에 감정이입된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일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구원과 초월의 은혜를 얻기 위해 겸비하는 심성은 잠시 잊혀지고, 오직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자기만족의 충족만 자극될 뿐안 상태.

<마녀>와 같은 영화는 이를 통해 관객의 호응을 얻어낸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로부터 발전된 욕망을 엿보게 하는데, 이는 바로 인간 개조, 휴먼 증강을 향한 욕망이다.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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