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회 기독교학술원 창조론
▲조덕영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1. 기독론 속 신비주의

정통 기독교와 달리 이단들이나 사이비의 신비 체험에서 나타나는 주관적인 현상은 다양한 신앙 교리의 훼손이 일어나는 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과 직무와 인격을 다루는 기독론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후기성도(예수)그리스도의 교회(일명 몰몬교)나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들이 기독론을 손상 시키는 것은 교주의 주관적 신비 체험에서 비롯된다. 개혁교회는 항상 성경 자신이 곧 성경 해석자였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또한 어거스틴이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어거스틴이 정통 신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그의 (신비한) 목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교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와 모두를 향한 신비한 그리스도의 "사랑"(caritas)과 관련된다.

그런데 몰몬교의 창시자 요셉 스미스(Joseph Smith)는 다르다. 그에게는 새로운 초월적 해석이 주어졌다. 제 7일 예수재림교(일명 안식교)에서 엘렌 지 화이트는 모세와 같은 특별한 계시를 받은 여선지자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를 성육신하신 참 하나님(vere Deus)으로 보지 않으므로 기독론을 손상시켜 버린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의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보다도 못한 상대적 계시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성경을 이탈하여 기독론을 손상 시키는 신비 체험을 가지고 신자들을 현혹하는 일은 금물이다. 이들이 개혁신학이나 어거스틴과 다른 이유이다.

2. 구원론 속 신비주의

기독론의 손상은 필연적으로 구원론의 손상을 가져온다. 무함마드에서 비롯된 이슬람교가 예수를 이슬람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신비주의 계시를 통해 예수가 아닌 무함마드를 알라의 마지막 선지자로 본 것은 이슬람이 근본적으로 기독교 이단들과 다를 것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의 유일한 성경(Sola Scriptura)에서 이탈한 새로운 특별계시를 수용한 종교임을 보여준다.

610년부터 632년까지 23년간 마호메트(무함마드, Muhammad)가 간헐적으로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 가운데 직접적으로 계시 받은 것으로 인정되는 설교나 이야기를 모은 꾸란을 알라의 완성된 마지막 계시라 주장하며 예수를 선지자로 격하 시키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성경의 모든 구원의 도(특별 계시)를 가볍게 무산시켜 버린다. 꾸란은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종이며 예언자임은 사실이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며 최후의 예언자는  예수 다음에 이 땅에 온 무함마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이슬람은 새로운 계시인 꾸란를 통해 성경 전체를 변질시키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슬람의 이 같은 복음 아닌 '내가복음', '자기복음'의 행태는 이단들이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자가 복음' 형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3. 교회론 속 신비주의

교회(church)는 '주님에게 속한다'는 의미의 헬라어 '퀴리아코스'에서 유래한다. 구약에서는 '카할'이 '회중의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종교적 대상(대상 30: 23)이나 세속적(렘 26:17)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4 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복음에 나타난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으심에 대해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 고백한 것을 기초로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신데 기반한다(마 16:18). 그리고 이 단어는 "한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마 18:17)에도 적용되었다. 예수는 친히 교회에 대해 가견적 교회 공동체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보다 완전한 의미의 교회란 제도적 실체가 아닌 초자연적 실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교회 사역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속시키고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혈력하여 천상의 새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로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아간다. 이 같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의 본질 안에서 바른 말씀 선포와 성례와 권징을 세 가지 표징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 같은 교회의 본질과 표징을 외면한다. 퀘이커교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로부터 시작된 초기 퀘이커교는 가견적 교회의 배교(딤후 3:1-5)를 통해 외형적 신앙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우주의 내면의 빛(요 1:9-18)만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았다. 당연히 교회의 성례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순결한 내면의 예배에 부적절한 옛 언약의 잔존물이라 하여 배척해버렸다(요 4:24). 교회와 더불어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전가된 의와 전적 부패와 삼위일체 같은 교리들도 모두 부정되었다. 오직 퀘이커 교도만이 "빛의 자녀들"이요 "진리의 친구들"이었다. 다른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보이듯 이들도 자신들만이 특별한 빛을 받은 선민들이요 자신들은 오직 조용한 기도와 참 빛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직접적 은혜의 설교를 체험한 신자들이었다. 이후 보편적 빛의 교리를 찾아 퀘이커들도 분화되었다. 일부는 복음주의자로 돌아선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근본은 교회론을 이탈하여 신비주의적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교회관을 배격하였다면 조지 폭스의 퀘이커교는 프로테스탄트 의 교회관을 뒤집어버리고 멀리 나가버린, 결국 교회론으로부터 비롯된 신비주의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거듭난 성도라도 하나님 앞에 여전한 죄인의 성품을 지닌다(simul justus et peccator).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인 교회가 여전히 완전한 모습을 지니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고 교회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이 아니다.

4. 종말론 속 신비주의

신비주의적 종말론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시한부종말론에서 문제가 된다. 시한부 종말론은 세대주의를 근간으로 파생된 종말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세대주의는 주로 인류 역사의 세대 구분과 문자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본으로 한다. 대개 6-7 가지 세대로 구분하는 세대들은 문자적 1천년을 기본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시한부종말론의 딜레마에 다다르게 된다. 그래야 문자적 천년왕국(계 20:2-7)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대 구분은 젊은지구론의 창조과학과도 커넥션을 가질 수 있는 데 건국대 쥬영흠 박사가 창조과학 운동을 세대주의적이라고 한 것이나 마크 놀이 창조과학을 과학적 세대주의라고 한 것이 모두 이 두 운동의 종말론이 서로 창조 연대 6천년이라는 일치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문자적 천년왕국을 믿는 세대주의자들은 지구가 창조된지 이미 문자적 6천년을 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인류 휴거와 종말이 곧 올거라는 조바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재림에 대한 무리한 소망은 재림의 재촉과 초조함으로 다가온다. 이 같은 세대주의적 갈망은 종말에 대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신비주의적 합일의 체험을 주장하는 일부 종말론자들을 양산하게 된다. 무화과 나무를 이스라엘로 해석하여 이스라엘 독립의 해인 1948년에 희년(50년)이나 이스라엘 포로 귀환 기간(70년)을 합산하여 1992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18년 등을 재림과 휴거의 때라고 주장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재림의 갈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재림의 때와 시(時)를 규정하는 이 같은 시한부 종말론이 문제인 것이다. 종말을 갈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무리한 환상적 신비 체험을 재림이나 휴거의 날에 꿰맞추려는 무리한 집착의 경향을 보인다. 이들 시한부 종말설들은 모두 건전치 못한 세대주의의 파급 효과라 할 수 있다. 세대주의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급박한 휴거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좀 더 명확한 표적으로서의 신비 체험이 동원되게 되는 것이다. 비성경적인 주관적 시한부 종말론은 이렇게 신비주의와 조우하게 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