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유보자들에겐, ‘구원 상실’ 막을 특단의 조치 있는 건가요

입력 : 2017.10.12 23:19

[이경섭 칼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구원한다?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대개 구원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성경의 명백한 원리만 말하고, 세세하게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지옥 갈 사람이고를 규정하지 않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는 구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인간이 구원을 판단하는 결정권자의 자리에 앉으므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이 구원과 동일시되는 의(義)에 대해서는 자주 그리고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구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던 이유도, 그것이 구원의 서정(order Salvation)상 최종적 지위를 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가 있음에도, '구원받은 자도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호리는 자들로 인해, 부득불 구원에 대해 세세하게 확정적으로 진술할 필요성을 요구받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동시에 이로 인해 구원교리를 사변화 할까 하는 염려도 떨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상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먼저 묻고 싶습니다. 가령 누가 구원의 상실을 당한다면, 그가 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예컨대 정말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구원받은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구원받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했으면 합니다. 구원받은 사실이 없다면 구원을 잃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정말 구원 상실이 가능하다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덕분이고 상실하는 것은 누구 탓인지, 예컨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덕분이고, 구원 상실은 인간 탓인지 듣고 싶습니다. 만일 '인간 탓(because of man)'으로 '하나님 덕분(by virtue of God)'에 얻은 구원을 잃게 된다면, '구원하는 하나님 능력'보다 '구원을 잃게 하는 인간의 능력'이 더 강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약하고서야, 어떻게 시작부터 종말까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논리대로라면, 최종적 구원에 들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며, 구원에 대해 '하나님이 하셨다'거나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됩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다른 복잡한 논증들은 차치하고-보편적 접근 방식을 쫓아, '구원'의 어의(語義)부터 먼저 살폈으면 합니다. 주지하듯, '구원'이란 스스로 위기를 벗어날 수 없는 자가 타력(他力)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대 도무지 손쓸 수 없는 화마(火魔)에서 구출되었을 때, 혹은 익사 직전에 건짐을 받았을 때, '구원받았다' 는 말을 씁니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용어를 쓸 때는 언제나 자동사가 아닌, '구원받는다(to be saved)'는 수동태가 따릅니다.

여기에는 헬라어, 영어, 한국어나, 성경과 일반 문장을 불문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will be saved, 행 16:31)',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shalt be saved, 막16: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shall be saved, 롬10:13)'.

구원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롬 11:7)',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롬10:20)'.

신인협력주의자들 역시 구원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변호하려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24)'는 말씀을 잘 인용하는데, 이 역시 웬만큼의 노력으로는 구원 얻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고, 좁은 문인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뜻입니다(이병규 박사).

인간의 힘으로 의롭게 되려다가 실패한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오늘날 설교자들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구원한다'는 동양 격언을 설교에 인용하는 경우들을 더러 보는데, 구원에 관한 한 이 말은 비기독교적 혹은 반기독교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용어를 쓰는 설교자들이라면 칭의유보도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작품은 아니지만,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의 1974년 작품,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Every Man For Himself And God Against All)'는 영화 제목이 차라리 훨씬 성경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수동성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을 부정하는 수동주의(passivism)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제공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합니다(딤전 4:7). 수동주의(passivism)는 비성경적입니다.

예컨대 1904년 웨일즈 대부흥의 중심에 서 있었고, 유명한 '십자가의 도(The Centrality of the Cross)'의 저자 '제씨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1861-1927)'의 수동주의적 신앙관이나, 하나님 주권을 과도히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없앤, 숙명론의 아류인 '과도한 칼빈주의(Hyper-Calvinism)'와는 다릅니다.

구원의 수동성은,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발견한,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수동적 의를 덧입음으로서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수 있다'는 '전가된 의'의 핵심개념입니다. 이 구원의 수동성은, 행위는 물론 믿음까지도 구원의 조건이 되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동적 구원에 대한 인간의 수동적 반응(수용)일 뿐 입니다. 루터는 '인간의 선행이나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과 교환한 것이 아닌,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 증여'라고 했습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문장 구조상, 믿음이 구원을 받는 조건처럼 보이지만, 은혜 언약 안에서의 '구원을 받는 손'입니다. 부연하자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구원을 주시되, 인간의 의사에 반하여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는 구절도 같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포도주와 젖을 얻으려면 값을 지불해야 하는 조건 충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값없이 주시는 포도주와 젖을(은혜를) '믿음'이라는 화폐로 구입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은, 믿음의 여부 외에, 다른 어떤 조건들에 의해 취소되거나 상실될 수 없습니다.

구원 상실을 주장하는 칭의유보자들이 구원 상실의 근거 구절로, 혹은 구원상실의 예방책으로 들고 나오는 구절들이 몇 있는데, 이것들 역시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는 능동적인 행위보다는, 은혜의 이끌림을 받는 수동적인 개념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구원탈락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완성시키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은 귀한 구원을 소중히 여기라(히 2:3)는 뜻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4-6)'라는 말씀 역시 구원의 상실을 지지해주는 구절이 아닌, 일시적인 짝퉁 은혜만을 맛본 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벧후 2:22)' 명목상의 교인들을 뜻합니다(Matthew Henry).

'한 번 비췸'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비침을 받았을 때, 함께 동행했던 불신자들이 경험했던 비췸의 류이고(행 22:9), '하늘의 은사와 성령 참여'는 사울왕의 예언과(삼상 10:10-13) 거짓 사역자들의 이적 같은(마 7:22), 미중생자들의 일시적인 은사 행위입니다(이는 중생한 자 안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내주와는 다름).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봄'은, 미중생자들이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말씀으로 인한 환란을 잠시 견디기 까지 하는 유사 은혜 체험입니다(마 13:20-2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는, 남은 전도하고 자신은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뜻이 아니라, 남에게는 복음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Matthew Henry)를 뜻하거나, 혹은 열심히 전도사역을 하다가 영적 방종으로 사역에서 도중 하차하게 됨을 뜻합니다. 오늘도 유명 전도자들이 스캔들로 인해 머리털 잘린 삼손처럼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고, 도중하차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자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면, 구원 상실을 막기 위한 그들의 대비책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자신들의 주장대로-구원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무슨 특단의 비책이라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혹시 그들 나름대로 설정한 구원의 커트라인 같은 것이 있는지? 있다면 몇 점 정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예컨대 구원의 안정권에 들려면 선행은 얼마나 해야 하고 헌금은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전도는 어느 정도 해야 하고 성경 읽기와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 외에 또 다른 첨가 사항이 있는지? 아니면 교회사에서 이사람 정도면 구원의 안정권이라고 할 만한 인물을 천거해 줄 수 있는지? 사랑의 사도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Saint Francis of Assisi, 1182-1226)라 할지, 문둥병자의 고름을 빨아 준 성 다미엔(Damien, 1840-1889)이라 할지. 아니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일지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구원 상실을 막기 위해 실제로, 현재 어느 정도 각고의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들이 곧잘 들고 나오는  '성령을 쫓아 행한다(갈 5:16)'는 식의 막연한 답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느 정도 성화의 삶을 일구고 있는지 만인이 수긍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 지금 어느 정도의 구원 확신이 있으며, 그러한 구원의 확신이 종말 때까지 유지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피력해 주었으면 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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