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며칠 전 아침, 출근 시간이었다. 35살의 한 남성이 아내와 9살, 7살 난 두 딸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출근하고 있었다. 동일한 시간에 중국동포인 40대 여성도 총총히 출근길에 있었다. 여성은 빨간불인데도 불구하고, 신호등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결국 그 여성은 달리던 승용차에 치여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잠시 후 한 운전자가 차를 세우고 쓰러진 여성을 향해 뛰어갔다. 출근하고 있던, 육군 제9공수특전여단 소속 정연승 상사였다. 도로 중앙으로 달려가 피해 여성의 상태를 보니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도로 가운데 사고 현장에서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그렇게 1분 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신호를 위반하고 달리던 트럭이 두 사람을 덮쳤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2차 사고로 아까운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안타까운 건 정 상사가 구호를 하고 있을 때 20대의 차량이 모두 그냥 지나쳐 버렸다는 것이다. 급하고 바쁜 일이 있었겠지. 출근 시간이니 늦지 말아야겠지. 가다가 멈춰 서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무심한 우리네 마음이 한스럽다. 누군가 도로 상황을 통제만 좀 해주었더라도 2차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불법과 무심함이 결국 비참한 참사를 낳았다.

정 상사는 특전단부사관으로 16년간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누구보다도 남을 배려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10년 전부터 부대 부근에 있는 요양원이나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여유가 없는 빡빡한 월급에도 매달 10만 원씩 결식아동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주말이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학생을 찾아가서 학용품을 사다주기도 했다. 이 시대에 흔치 않은 아까운 사람을 잃게 된 게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데가볼리에 있는 가다라 지방으로 가셨다. 이곳은 이방인 지역이다. 유대인들은 꺼리는 곳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전날 하루종일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시느라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광풍과 거친 파도가 일어나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곳을 향해 가셨는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떼신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은 과연 누굴까? 더러운 귀신 들려 비정상적이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수없이 많은 군대귀신이 들려 무서운 행동을 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조차 그를 쇠사슬로 묶어 죽은 시체들이 득실거리는 무덤 사이에 두었다. 동네에서 쫓겨난 그는 버림받은 인생이요, 가족들에게조차 소외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만나기로 선택하셨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나길 원한다.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위신을 좀 세워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으로 인해 무엇인가 누리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택하려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 수 있는 사람을 굳이 찾아가신 것이다. 선택의 가치가 다르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선택하는 게 다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하셨다.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갈릴리 바다에서의 죽음을 감수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2,000마리의 돼지를 희생시켰다. 동네 사람들은 돼지 떼를 잃은 게 아까워서 예수님에게 ‘우리 동네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영혼을 위해 엄청난 대가 지불도 아까워하지 않으셨다. 돈보다는 한 영혼에 집중하신 게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저런 사람에게.’ 그러나 예수님은 저런 사람이라도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그를 위해 허비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셨다. 아니 거룩한 투자를 하신 게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대가 지불이라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손해 보는 장사처럼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상관없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으신 분이 아닌가?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받고 죽으면서도 한 사람을 살려내려고 애쓰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에 모든 것을 집중하셨다.

사람들은 거라사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두고 말할 게다. ‘거라사 사역은 실패한 거야.’ 사실 힘들게 찾아온 거라사 사역이 어땠는가? 한 사람을 위해 사역한 게 고작이다. 그것도 귀신 들려 미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위한 사역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나 인생은 함부로 단정 짓는 게 아니다. 어떤 일을 두고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더구나 주님이 하시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다.

거라사 광인은 예수님을 만나 온전하게 회복되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가족들에게 주님이 행하신 큰일을 드러내고 증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회복되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신에게 사로잡혔으나 스스로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에. 그들을 복음의 빛으로 천국의 통치 아래 살게 하기 위해. 집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알고 있는가?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한 사역을? 자기 가족들 뿐 아니라 데가볼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행하신 큰 일을 증거했다. 한 사람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비록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 안에 천국 간증을 담으면, 주님이 얼마든지 위대하게 쓰실 수 있다.

예수님은 한때 이 세상 신에게 사로잡혀 광명의 빛을 몰랐던 나에게도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셨다. 이 세상 신으로부터 벗어나 성령의 지배 아래 살게 되었다. 거기서 천국의 간증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더러운 귀신이 들려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예수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한 영혼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한 영혼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