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본지 편집고문인 김명혁 목사님(강변교회 원로)이 2012년 11월 12일과 16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로 가고 오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김명혁 목사님이 지금의 시대에 한국교회와 본지 독자들에게 꼭 들려 주고 싶은 이야기라며 보내와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을 심판하신다고 가르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분부를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을 때 심판을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시는 홍수 심판을 내리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관영했을 때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내려 다 엎어 멸하시는 불 심판을 내리셨다. 예수님께서도 죄를 범하는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을 심판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또한 죄인들이 죄를 고백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고 복 주신다고 가르친다. 죄인 다윗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라고 눈물로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놀라운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은혜로 그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는 놀라운 복까지 베푸셨다. 입술이 부정한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처절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복 주셔서 메시야의 탄생과 사역과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만드셨다. 결국 다윗과 이사야는 상하고 통회하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가장 귀중한 제사라고 고백하며 ‘통회’를 예찬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신약성경이야말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놀라울 정도로 큰 은혜를 베푸신다고 가르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약성경은 의인들을 위해서 쓰인 책이 아니고, 죄인들을 위해서 쓰인 책같이 보인다. 특히 네 복음서들은 거의 전부 죄인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입어서 구원함을 받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복음서에 기록된 죄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듬어 살펴 본다.

첫째로,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백부장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본다. 그 백부장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증오하던, 이방인이고 로마인이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은 자기가 멸시를 받을 만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는 예수님에게 직접 나아갈 수도 없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도 없는, 멸시를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달았다. 이미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유대인의 장로 몇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병중에 있는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서 그 종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하셨을 때, 백부장은 자기는 멸시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자기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며, 예수님에 대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놀라운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 7:9). 그 종은 즉시 고침을 받았다. 놀라운 은혜가 계속해서 임한 것이었다. 의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은혜가 임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죄인들에게만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복이 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인들에게만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와 복이 임하는 것이다.

둘째로,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본다. 문맥으로 보아서 그 여자는 길거리의 부도덕한 여자였을 것이다. 만인의 멸시와 천대와 증오를 받던, 돌에 맞아서 죽어야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을 때, 죄인인 그 여자는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했을 것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복을 받았을 것이다. 무척 놀랍고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범한 지난날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그 여자에게 귀하고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여자는 바리새인의 집으로 달려갔다. 물론 초대도 받지 않았다. 그저 달려간 것이었다. 낱낱이 다 고백하지 못한 지난 날의 숨은 모든 죄를 예수님 앞에 눈물로 고백하며,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인인 그 여자는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 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저는 돌아 맞아 죽어야 할, 개 같은 죄인입니다. 저는 한두 번 또는 일곱 번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수없이 계속해서 더러운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지었습니다. 저는 죄 덩어리입니다.” 그 여자는 자기의 모든 죄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자기를 멸시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 시몬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 여자에게 귀하고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더 크고 더 놀라운 은혜와 칭찬과 축복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 여자의 행위 하나하나를 귀중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 여자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눅 7:47).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48). 사실 죄 사함은 한 번 받고 마는 것이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받는 것이다. 그 여자는 오늘도 죄 사함을 또 받았다. 주님께서는 또한 주님을 향한 그 여자의 사랑이 많음을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셨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사랑을 알아 주시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는데, 주님께서는 죄인인 그 여자의 사랑을 알아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은혜가 죄인인 그 여자에게 임했다. 바리새인 시몬에게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임할 수 없었다. 너무 의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오직 멸시와 천대와 증오를 받던 개 같은 죄인에게만 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랍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죄인들에게만 임하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필자가 이상한 죄인들의 이야기만 골라서 이상한 말을 한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인들을 너무 선호하고 정당화한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복음서에는 이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이상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더듬어 살펴 보려고 한다.

셋째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본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종교 생활을 잘 하는, 윤리적으로는 흠잡을 것이 없는, 바리새인과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세리 한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리새인은 감사의 기도를 멋지고 길게 드렸다.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한 곳은 의인인 바리새인이 감사 기도를 멋지고 길게 한 곳이 아니고, 죄인인 세리가 처절한 회개의 기도를 짧게 드린 곳이었다. 결국 세리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눅 18:14).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참으로 모순되는 듯한 일이었다.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종교인의 생활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했던 바리새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죄인 세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한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 뿐이었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편애하시는 것인가!

넷째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세리장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본다. 삭개오는 세리 중의 세리인 세리장이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혹시 예수님께서 자기도 부르실 수는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많은 군중 속으로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가까이 오셔서 바라보시면서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늘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삭개오는 참으로 놀라고 참으로 놀랐을 것이다. “정말 맞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구나! 지금 나를 부르고 계시는구나!” 삭개오는 무척 놀라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그 동안 남의 물건과 돈을 너무 많이 빼앗았습니다. 부정부패를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내가 이제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임했다. 주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임했다. 이와 같은 감격적인 놀라운 은혜는 의인들에게는 임하지 않는 것 같다. 오직 멸시와 천대와 증오를 받는 죄인들에만 임하는 것 같다.

다섯째로,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 본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맥클라렌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가지 대표적인 죄악의 늪에 빠져 도저히 소생할 가능성이 없었던, 죄인 중의 죄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 쓰레기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쓰레기 막달라 마리아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신 것이었다. 그녀를 저주하시고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녀를 일곱 가지 귀신에게서 건져 주시기 위해서였다. 가까이 하기만 해도 죄가 묻어날 것 같이 느껴지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죄인 막달라 마라이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구원하신 것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죄인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봉사자로까지 삼아주신 것이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1-3).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다. 지난날 자기가 저지른 수많은 종류의 죄악들을 생각하면서, 수많은 죄악의 늪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인간 쓰레기 죄인을 사랑하시되 무척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다. 부활의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일곱 귀신 들렸던 자기에게 먼저 나타나신 사실을 생각하며,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울고 또 울고 또 우는 눈물의 사람이 되었다. 이와 같은 눈물과 사랑의 은혜는 의인들에게는 결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인간 쓰레기 같은 죄인들에게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여섯째로,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와 포악한 로마 군인들과 강도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 본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했던 것과 비슷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가 나타났다. 자기가 죄인임을 묵묵히 인정했을 뿐, 아직 죄 청산의 열매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도 말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포악한 로마 군인들은,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께서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심으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가 나타났다. 자기들이 죄인임을 묵묵히 인정했을 뿐 아직 죄 청산의 열매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도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던 강도들은, 자기들의 죗값을 치르면서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도 한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가 나타났다. 그가 한 말은 자기가 강도짓을 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을 부른 것 뿐이었고, 아직 죄 청산의 열매를 하나도 나타내 보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도 말이다. 진리와 공의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모순되는 일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하게 책망하시며 정죄하신 일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같이 하시면서 죄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따뜻한 손길을 펴시곤 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0-13). 예수님께서 한두 번 아주 심하게 책망하시면서 정죄하신 대상은, 죄인들이 아닌 의인들이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9, 33). 자칭 의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모른다. 차라리 멸시와 천대를 받는 죄인이 되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일곱째로, 배신자 베드로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를 살펴 본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높아지기를 좋아하는, 자신만만하고 교만한 죄성을 지닌 못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제자로 택하시고 놀랍도록 축복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바로 알고 바로 고백한 것은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기는 했다. 그것이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고백이라기보다는 하늘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비롯한 고백이었지만 말이다. 죄인들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되 무척이나 놀랍도록 칭찬하셨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 19). 베드로가 정말 그런 놀라운 복을 받을 만한 고귀한 신앙인격을 지녔던 사람은 결코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교회의 초석이 되고 천국의 열쇠를 가질 만한 위대한 사람은 결코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조만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할 배신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베드로가 배신의 죄를 뉘우치며 울면서 회개한 후에도, 부활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만난 후에도, 또 다시 주님의 분부를 거역하고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갈 것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런 배신과 불순종의 죄를 거듭해서 범할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를 택하시고 그토록 놀랍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을까? 왜 지극히 연약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교회를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리고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주신다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하셨을까???

한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고귀한 신앙 인격을 지닌 의인이 아니고, 허물이 많은 죄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의인을 택해서 사용하신다면, 결국 그는 교만해져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게 될 것을 예수님께서 잘 아셨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베드로는 거듭거듭 울고 회개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겸허하게 수행하게 되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울면서 회개한 베드로는 120명과 함께 기도하면서도 울며 회개했고, 오순절 3천여명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울며 회개했고, 고넬료의 집에서 자기가 멸시하던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긍휼과 복된 손길을 펴시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울며 회개했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울며 회개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눈물과 사랑과 헌신과 순교의 은혜는 의인들에게는 결코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배신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또 범하는 죄인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배신자가 될 베드로를 잘 아시면서도 그를 택하시고 칭찬하시고 놀라운 축복까지 하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놀랍고 놀랍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여덟째로, 핍박자 사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를 살펴 본다. 사실 사울은 주님의 택하심을 받을 자격을 추호도 지니지 못한 죄인이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예수를 핍박했고, 교회를 핍박했고, 교인들을 잡아서 옥에 가둔 악독한 죄인이었다. 그런 악독한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은 복음 신앙과 십자가 신앙에 역행하는, 반역죄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는 핍박자요 포행자인 악독한 죄인 사울을 찾아 오신 것이었다. 그를 만나 주신 것이었다. 그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만나 주신 것은 아니었다. 죄인 중의 죄인인 사울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찾아 와서 만나 주신 것이었다. 죄인 중의 죄인인 사울을 자기의 증인이자 사도로 삼으시기 위해서 찾아 와서 만나 주신 것이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5, 16). 주님은 정확하게 아셨다. 의인을 택해서 증인으로 사용하면 그는 조만간 교만해져서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게 될 것을 잘 아셨기 때문에, 죄인 중의 괴수인 사울을 택해서 사용하셨다고 생각한다.

사실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고,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고, 애굽과 앗수르와 로마와 같은 저주받아 마땅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같은 멸시와 천대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울과 같은 죄인 중의 괴수를 택하셔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옳은 길이라고 주님께서 생각하셨을 것이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셨던(빌 2:7, 8), 멸시를 받아 싫어 버린 바 되셨던(사 53:3) 십자가의 주님을 바로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죄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아 싫어 버린 바 된 죄인을 택해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올바른 길이라고 주님께서 생각하셨을 것이다. 주님의 선택은 참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을 택해서 사용했을 때, 사울은 시간이 갈수록 더 낮아지고 더 낮아졌다. 시간이 갈수록 사도 바울은 이전보다 더 처절한 죄 고백을 했다.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을 들으시면서 주님께서는 매우 만족해 하셨을 것이다. “나는 만삭 되지 못해서 태어난 죄인입니다”(고전 15:8). “나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죄인입니다”(엡 3:8). “나는 물건과 같은 존재이며 없는 것과 같은 존재입니다”(고전 3:5, 7). “나는 만물의 찌끼같은 존재입니다”(고전 4:13).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롬 7:1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즉 저주 받을 죄인입니다”(롬 7:24).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딤전 1:15).

후세의 수많은 종류의 죄인들이, 죄인 중의 괴수였던 사울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얻어, 회개하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육체의 정욕과 이단에 빠졌던 죄인 어거스틴도 있었고, 불교와 선도에 빠졌던 죄인 길선주 도사도 있었고, 마펫 선교사를 돌로 쳤고 장대현교회당을 때려 부쉈던 죄인 이기풍 깡패도 있었다. 이와 같은 죄의 경력과 처절한 죄인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야말로, 의인들이 아닌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다. 성 프란시스가 자기는 작은 벌레와 같은 가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한평생을 울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환자들에게로 가까이 가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고, 포악한 죄인들에게로 가까이 가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고, 포악한 동물들에게까지 가까이 가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고, 나중에는 무슬림과 이단들에게까지 가까이 가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다. 사실 의인들은 죄인들에게로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니느웨로도, 로마로도, 가이사랴로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북한으로도, 아프가니스탄으로도, 타 종교인들에게로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땅끝은 이와 같은 어두운 곳들인데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처절한 회개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방지일 목사님께서 저에게 전화를 거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제 회개 기도 모임에서 한 회개가 죄 고발이지 회개야? 난 아멘 하지 않았어. 김 목사는 아멘 했어?” 그렇다. 죄 고발은 난무하지만 처절한 죄 고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시청 앞에서 행하는 기도회도 순수한 참회보다는 과시적인 정치성을 다분히 띠는 것 같다. ‘죄인 의식’이 사라지고 ‘의인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모습보다는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모습을 지니며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들은 속히 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며 협박까지 한다. 자기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내세우는 개인이나 교단이나 단체나 신학을 정죄까지 한다.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심정을 지니는 대신 모든 죄인들을 향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심정을 지니셨던,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 싶어진다. 저들은 모두 자신들을 극심하게 핍박했던 일본과 북한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심정을 지니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심정을 지니고 살다가 죽었다. ‘의인’보다는 ‘죄인’이 보고 싶어지는 시대이다. ‘의인’보다는 ‘죄인’이 되고 싶어진다. 예수님께서 많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면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셨던 것처럼, 부족한 나도 죄인이 되어서 여러 종류의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고 싶다.

기도를 바로 하지도 못하고 기도를 바로 할 자격도 없는 죄인이 날마다 1백여 번 이상 중얼거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날마다 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오늘도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오늘도 나의 모든 죄악을 도말하시고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오늘도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주시고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이런 기도를 자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지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기도도 자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물 될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실 만한 제물로 만들어주시고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 특히 북한 사람들이나 무슬림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할 뿐이다. ‘의인’보다는 ‘죄인’이 보고 싶어지는 시대이다. ‘의인’ 보다는 ‘죄인’이 되고 싶어진다. 부족한 나도 죄인이 되어서 여러 종류의 죄인들과 어울려서 죄인들과 함께 살다가 죄인들을 위해서 죽고 싶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오늘의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의인’보다는 ‘죄인’을 보고 싶어하실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을 해 본다(2012년 11월 12일과 16일, 미국 플로리다주 올란도로 가고 오는 비행기 안에서).

***첨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영훈 목사님에게
어려운 시대에 한국교회를 위해서 귀한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아가시기를 바라며 기도 드립니다.
지난 주 미국 올란도에 갔다 오면서 쓴 글을 목사님에게 보내 드리고 싶어서 지금 보내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11월 20일 김명혁 목사

존경하는 목사님!
보내주신 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죄인보다는 의인이 많은 시대에
용서와 사랑과 긍휼보다는 분노와 증오와 정죄가 난무하는 시대에
목사님의 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고 주님의 눈물이 가슴을 적셨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목사님 마음 항상 감사드립니다.
더욱 강건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이영훈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