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고단 선교사 유적지

순천 선교부의 프레스톤(변요한) 선교사는 선교사 휴양지 및 회의 장소를 찾던 중 지리산의 중덕 노고단을 찾게 되었다. 프레슨톤 선교사는 이러한 시설을 마련키 위해서 1921년, 1922년, 1923년 3차에 걸쳐서 회의했던 내용을 갖고 선교부를 대표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전남도지사 등과 협의하며 토지의 매입, 임대, 사용 허가원, 영구 임대에 대한 신청 등에 대한 기록과 함께 1923년 여름 지리산 캠프허가를 받았다.

그 후 이곳에 1922-1931년에 32동의 건물과 한국인의 숙소까지 모두 52동이 완성되었다. 이 건물이 완성되자 주한 선교사들은 물론 중국(만주 포함) 각지에 주재하는 미국, 영국인의 피서자 총수가 149명이나 되었다.

이곳은 레일놀즈(이눌서) 선교사가 구약 예레미야서를 완역했던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에 돌집으로 숙소를 잘 건축하고 유용하게 사용하였지만, 신사참배의 문제로 1941년 완전 철수하게 됐다. 이러한 역사적인 현장이 민족의 비극인 순천 여수 14년대 반란사건과 6. 25전쟁을 만나면서 다 파괴되었다. 그중 유독 우리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 건물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강당과 회의실의 건물이다.

“여러분들 중 교인이 계시면 이곳에 한번 올라가보세요”

누군가가 이렇게 외치고 있을 때 교인들은 그 역사적인 현장을 보았다면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슬픈 것은 한국교회가 세계적으로 대형교회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 노고단에 자리를 잡았던 그 선교사들의 휴양지는 언제 복원할지 그 누구도 나서고 있지 않아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더욱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그 건물마저 철거해야 한다는 지역 불교계와 자연환경운동가과의 마찰도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연 원상회복이라는 이름으로 그마저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방이 되자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을 하게 됐다. 여전히 풍토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자 1962년에 린톤 선교사의 아들 인휴(Hugh M. Linton) 선교사는 지리산의 1,500m 정상인 왕시루봉에 비로소 콘센트 건물 12동을 신축하였다. 여름철이면 사용하던 이 대지가 서울대 농대로 넘어가자 서울대 농대와 계약을 하고 40여년간 임대료를 지불하고 사용하였다.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서울대 농대에서 출입 금지 및 사용 불가를 논하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인휴 선교사의 아들인 인요한 선교사(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 소장)가 최근 발견한 간판의 내용에는 “선교사들이 자연을 파괴한 현장이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말하는 곳”이라는 정체불명의 안내문이 서 있다고 한다. 왕시루봉 사용료를 지불해 달라는 서울대 농대에 2003년도까지 임대료 3,300,000원을 지불하였는데 그 영수증에는 변상금으로 기록이 됐다. 이제 선교사들의 생명을 지키면서 살았던 이들의 흔적을 말살하려고 하는 당국의 처사에 그냥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 동안 이 일에 앞장선 인휴 선교사의 아들 인요한 선교사는 4대째 선교사로 이 땅에서 노고단 복원과 왕시루봉을 문화유적지로 보전하고자 하고 있다. 그 귀한 뜻을 한국교회가 함께 협력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수진 목사(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전문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