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오피니언/칼럼

6.25 전쟁시 인민군의 협력으로 예배 드린 중화동교회

그 무서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됐다. 삽시간에 서울이 점령되었으며, 당시 황해도 옹진군에 속해 있던 백령도도 인민군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여러분들, 안심하고 예배를 드리세요, 우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헌법에 신앙의 자…

“내가 죽거든 무덤 만들지 말고 거름이나 되게…”

1. 무궁화 운동을 일으켰던 남궁억 장로 남궁억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성형무소에 구금되어 옥살리를 하고 있는 동안 기일 선교사가 번역했던 [천로역정]을 읽고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윤치호를 감옥에서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출옥 후 …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 마시고 싶소”

주기철은 1897년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에서 출생하였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멀고 먼 정주 오산학당에 진학을 하였다. 그곳에서 설립자인 이승훈 장로와 교장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받으면서 애국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오산학당을 졸…

두 아들을 잃고도 감사헌금을 했던 손양원 목사

2. 손양원 목사 우리 일행은 여수 남면 우학리를 떠나서 애양원으로 향하였다. 관람자들의 눈에 띠는 부분은 손양원 목사 순교관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박종구 목사의 시가 우리 일행들을 뜨겁게 맞이해 준다. 그 내용을 살피면 이렇다. 손양원 목사를 그리며 …

“아직 내 턱에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1907년 9월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한국인 목사 7명이 탄생하였다. 이 일이 감사하여 독노회에서는 이기풍 목사(1865-1942)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그의 부인 윤함라와 함께 평양에서 인천으로 해서 목포까지 배편으로 갔…

4대째 이어온 선교와 선교유적 보전의 뜻

순천 선교부의 프레스톤(변요한) 선교사는 선교사 휴양지 및 회의 장소를 찾던 중 지리산의 중덕 노고단을 찾게 되었다. 프레슨톤 선교사는 이러한 시설을 마련키 위해서 1921년, 1922년, 1923년 3차에 걸쳐서 회의했던 내용을 갖고 선교부를 대표하여 조선총독부(朝鮮…

머슴은 목사가 되고, 지주는 그의 설교를 듣고

2. 6.25의 불바다에서도 건재한 금산교회 금산 기역(ㄱ)자 교회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자리잡고 있다. 금년이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기에 금산교회의 출발은 190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데이트(한국명, 최의덕)는 김제 금산 마방(馬房)에 자신의 말을 …

원수되었던 이들이 사랑으로 껴안는 순교 현장

전남 영광 야월교회는 배유지 선교사가 1908년에 설립한 교회로서, 금년이 100년 되는 해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야월교회는 6.25전쟁으로 전 교인 65명이 처참하게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관계로 3년 동안 없었던 교회는 안창건 전도사가 미 남장로교 선교부의 …

독립운동과 기독교, 그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

2. 천안독립기념관 충남 천안에 위치하고 있는 독립기념관은 기독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이곳은 누구나 천안만 찾아가면 쉽…

묻혀 있던 애국자들을 알린 ‘작은 애국자’

경기 화성시 발안면 제암교회에서 29년째 시무하고 있는 강신범 목사는 아주 특별하다. 그가 이 교회에 부임할 때는 교인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아 강신범 목사가 가족과 함께 이삿짐을 날랐다. 이유인즉 “이곳에 부임한 목사는 곧 또 이사를 갈텐데 나가서 무엇 합…

한국 교육계에 커다란 공 세운 언더우드 가(家)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언더우드의 가정은 당시 영국 런던에서는 부러움을 사던 가정이었다. 그런데 자녀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던 어머니가 언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의료선교와 의료교육을

로제스타 셔우드 홀(Rosetta Hserwood Hall, 허울 부인, 1865-1951)은 미국 뉴욕 설리반카운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을 운영하였다. 그는 뉴욕 오스웨고주립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1년간 교사로 봉직하였다. 이 무렵 미국 감리교회 감독인 토빈과 그의 부인…

“미국보다 더 가난한 백성이 많은 조선으로 가라”

제임스 홀(Dr. H. W. James Hall, 忽. 1860-1894) 의료선교사는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서 평양에 엄청난 기초를 세웠다. 제임스 홀은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아이렌드 출신의 청교도적 장로교회 교인이었다. 석공으로 생활…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하여…”

베델(Mr. E. Thomas Bethell. 1872-1909)은 언론인으로서 영국 브리스톤에서 출생하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영국에서 발행하는 <런던뉴델리> 기자로 활동을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3월 10일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서 한국에 특파원으로 내…

“천사가 보낸 아이” 한 명으로 시작된 이화학당

매리 스크렌톤(Mrs. M. F. B. Scranton. 1832-1909) 여선교사는 아들 스크렌톤(Dr. Rev. W. B. Scranton. 시란돈) 부부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매리 스크렌톤 선교사는 미국 매사스추세츠에서 출생하였으며, 1872년 불행하게도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부부와 함께…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