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작은 마을 바시(Wassy)가 갖는 지증학적 중요성

프랑수와 기즈가 영주인 주앙빌(Joinville)에서 가까운 바시 마을은 그의 어머니 앙뚜와네뜨가 지주로 마을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최근 미망인이 된 프랑스 왕후였으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손녀 마리 스튜어트(Marie Stuart)에게 이곳을 유산으로 주었다. 또한 마을의 작은 규모에 비해 거대한 대성당이 세워진 것은 기즈가 로렌 지역의 추기경 집안이기 때문이다.

▲바시는 기즈의 모친 앙뚜와네뜨가 조성하여 손녀인 마리(Marie Stuart)에게 주었고, 성당은 기즈 추기경의 관할 지역.
바시는 이처럼 정치, 종교적으로 기즈 가문에 중요한 지역임에도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기즈 가문의 치욕이며 위기였다. 그 이유는 1229년 뚤루즈 종교회의를 통해 영주 가운데 그의 영토 내에서 이단자를 제거하지 않은 사람은 파문하고, 1년 내로 이단자를 제거치 않으면 모든 영토를 박탈하여 교회 재산으로 환수한다는 결정이 아니더라도 가톨릭 당수로서 체면이 구겨진 것이다. 또한 왕권을 차지할 뿐 아니라 위그노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까뜨린에 대한 분노를 위그노 응징을 통해 보복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4. 바시 위그노 교회의 설립 배경

1561년 파리 개혁교회의 지교회인 뜨와(Troyes) 교회는 바시 지역에 교회를 세울 것을 결의하고 목사 장(Jean Gravelle)으로 하여금 이곳을 방문하도록 한다. 장이 첫 방문했던 10월 14일에 120명의 위그노들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상인 Drapier의 집에 모였다. 다음날에도 500~600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다.

성공적으로 첫 모임을 마친 장은 바시 교회에서 목회할 목회자를 파송해 줄 것을 쥬네브 교회에 요청한다. 그리고 새로운 목회자 파송 결정에 관한 대답을 기다리던 중, 장은 12월 16일에 세례식 집례를 위해 바시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기즈와 동생 로렌 추기경은 주교를 보내어 위그노들의 모임을 갖지 못하게 하지만, 예배를 사모하던 위그노들의 열기를 꺾을 수가 없었다. 주교는 그 다음 주일에 다시 검사와 무장 군대를 동원하여 예배 장소인 곡식 창고로 가서 예배 인도 중인 목사 장에게 아주 심한 말을 던진다. 그러나 장은 별 반응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옆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주교는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런 위협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시 위그노 교회는 성탄절에 3천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참석자 가운데 삼분의 일이 개신교의 새로운 성찬식에 참여하였다.

5. 독일 제후들을 만나러 가는 기즈 형제

1562년 2월 18일, 기즈 형제는 반(反) 합스부르크 동맹을 위하여 독일 루터교 제후들과의 협상을 위해 알사스의 Saverne로 간다. 권력 유지를 위해 누구와도 손을 잡으려는 그의 자세를 볼 수 있다.

▲알사스의 Saverne.

기즈는 루터파들이 모여 있는 Wurtemberg 공작에게 깔뱅주의자들을 제거하도록 요구하지만 거부당한다. 그 이유는 기즈 형제가 1526년에 이곳 Wurtemberg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들의 조카 앙뚜완(Antoine)이 루터파로서 북 알사스 지방에서 개혁을 시도하다가 개신교인 16,000명과 함께 학살당한 곳이다. 이런 개혁의 시도로 결국 신성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루터교의 신앙을 허용하게 하는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을 이끌어 내었던 그곳에서 깔뱅주의자들을 대적하라는 요구는 수용될 리가 없었다.

기즈의 두 형제는 Wurtemberg 공작에게 오히려 위그노들을 억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 기즈 형제가 독일 제후들과 만나는 동안, 2월 20일에 바시 교회에 마침내 새로운 목사 레오나흐(Léonard Morel)가 쥬네브로부터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으로 힘들어 하는 바시 성당의 주교 제롬 부르주아(Jerome Bourgeois)의 탄원이 들어온다. 그러자 기즈 형제는 이 참에 위그노들을 제거할 것을 결심하고 천명의 기병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용병들을 데리고 바시로 곧장 가게 된다. 위그노 제거를 통해 위그노를 인정하는 왕의 칙령에 저항함으로, 아직도 자신들의 권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다.

주일 아침인 3월 1일에 기즈는 2백명의 군대 가운데 기마병과 총을 가진 60여명의 군사를 위그노의 예배처인 바시 곡식 창고로 보낸다. 이 때 기즈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Brosse 라는 군대 지휘관이었으다. 그들은 곧바로 1,200명의 교인들이 예배드리던 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회중들을 향하여 불을 질렀다. 불이 나자 다수는 지붕으로 올라 탈주를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군인들이 발포한 총과 칼에 남자와 여자 심지어 어린아이조차 피를 흘리며 내동이쳐졌고 피가 낭자하였다. 학살 당시 바시 교인들은 끌레망 마로(Clément Marot)의 시편 88편 고난의 찬송을 찬양하고 있었다.

가톨릭의 기록에 “기즈 가의 사람들은 결코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위그노들의 소란을 진정시키려는 시도 뿐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왕의 허락을 받고 드린 위그노들의 예배가 소란이었다면, 예배를 허락한 왕은 소란의 주동자란 말인가? 백 번 양보해서 그들의 주된 임무가 소란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는 궁색한 변명에도 비무장한 위그노들을 공격하여 2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했다는 것은 직무를 벗어난 학살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때린 사람은 그 사건을 왜곡시키고 발뺌을 할지 몰라도, 맞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결코 잊지 않고 당시 군대를 끌고 갔던 책임자의 이름과 기록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결코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학살임이 확실하다.

6. 복원된 학살 현장과 박물관

바시 교회는 1561년에 시작되어 학살 사건으로 폐쇄되었다가, 1889년에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1903년에 20킬로 떨어진 Saint Dizier로 옮겨진다. 바시 교회당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학살 현장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 뒤편에 위치하였다.

▲1562년 대학살의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현장 주소.

▲학살 현장을 복원해 놓은 건물. 뒤편 건물이 원래 학살 현장였으며, 앞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곡식 창고에서 깔뱅주의자들이 예배를 드리다가 기즈 군대에 의해 2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표지판.

기독교 박물관은 Saint Dizier 교회 교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입장은 무료이다.

▲왼쪽 건물이 학살 현장을 재현해 놓은 곳이며, 오른쪽 건물이 당시 교회로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시 교회. 뒤쪽 건물이 실제 학살 현장이다.

박물관 입구에는 교회가 시작되었던 1561과 1889라는 숫자가 오랜 세월로 바랬지만, 역사적 사실만큼은 보관하려는 교인들의 열의를 찾아볼 수 있었다.

▲바시 교회에서 바라본 바시 대성당. 박물관 입구에는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연도인 1561과 1889라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박물관은 과거 예배드렸던 예배 장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깔뱅을 비롯한 개혁자들에 관한 자료와 바시 대학살과 관련된 자료 그리고 바시 학살로 발생하게 되는 종교 전쟁과 관련된 자료와 기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다음 주 계속>

▲깔뱅의 사진과 성경 및 각종 자료들을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 내부 모습.

▲종교 개혁 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 내부벽. 사진 오른쪽에 대형 위그노의 십자가가 보인다.

▲학살 당시 건물 잔해에서 나온 목재.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