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일원교회
일시: 2023. 9. 3
본문: 요 3:16, 요 21:15-20, 요1 4:7-12

김명혁 목사 한국복음주의대학생연합회(YEFK)에서 설교
▲강변교회 원로 김명혁 목사. ⓒ크투 DB
오늘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이라는 같은 제목의 설교를 다시 하려 합니다.

1.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

제가 한평생 살면서 깨닫고 또 깨달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축복된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랑의 삶” 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께서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만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씩 반복해서 불으신 다음 그렇다면 주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신 교회와 양무리들을 먹이고 치면서 사랑하라고 세 번씩 반복해서 분부하셨습니다.

요 21:15 말씀을 읽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삶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시고 세우신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마음과 눈과 귀가 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북한의 신의주 제이교회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의 신앙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을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아했고 집에서 노는 것보다 더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신의주 제이교회에 다녔는데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학생이었을 때는 평양 제오 인민학교에 다녔는데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라고 명령했지만 저는 2년 동안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서문밖교회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지만 저는 여전히 주일에는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 신앙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 11살 때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평양에 두고 혼자서 38선을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국경을 경비하던 군인들이 우리들을 발견하고 모두 서서 손을 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지 않고 혼자서 캄캄한 밤에 남쪽을 향해서 40분 이상 뛰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주일 성수”의 신앙을 마음껏 누리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는 6.25전쟁때 대구에서 살면서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 참석하면서 회개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는 서울에서 살면서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창동교회와 대창교회에 다니면서 회개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대구 주암산 부흥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을 부르다가 더 부르지 못하고 울고 또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서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 라는 가사에 충격과 감사에 넘치는 충격을 받았고 “늘 사랑합니다” 라는 가사에 교회를 늘 사랑하지 못한 저의 부끄러움이 넘치는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신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생명을 다 바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사도 베드로의 회개의 고백과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과 교회를 자기들의 집보다 자기들의 일터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날마다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2).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서로 교제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사랑과 구제와 봉사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행 2:44,45).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집보다 자기 직장보다 더 사랑하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사모했는데 저들을 위해서 자기의 피를 쏟아 제사를 드려도 자기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사도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했는데 저들을 위해서 자기의 재물과 생명을 다 바쳐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며 보고 싶어했는데 저들이 자기의 소망이고 기쁨이고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사도 바울은 예수님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고 교회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악의 중심부인 로마에 주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웠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사신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다운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인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들은 모두 자기 자신들보다 자기의 부모와 처자들보다 “하나님”과 “교회”와 “주님의 양 무리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대한 기도문 하나를 읽어드립니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하나님과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신의주 제이 교회를 너무 사랑했고 평양 서문밖교회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대구 제일교회와 대구 동광교회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서울 창동교회와 대창교회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 들판으로 달려갔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이만 팔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즉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 기도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왕십리로 달려갔습니다. 왕십리에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며 아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한양제일교회」라는 교회 간판을 달았습니다. 아이들 60여 명과 어른들 40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과 서울대학교 1학년 시절 2년 동안 철없이 단순하게 개척 목회를 했는데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 때문이었고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기도와 전도와 교회 사랑의 영적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5년 동안 후암교회에서 교육 목사의 일을 하면서 교회 사랑을 쏟아 부었고, 8개월 동안 영안교회에서 개척 목회를 하면서 교회 사랑을 쏟아 부었고, 그 후 강변교회를 개척해서 28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교회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저는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15년 8개월 동안 매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 한 두 곳을 찾아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과 축복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섬기는 일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들도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우리들의 집보다 우리들의 일터보다 우리들의 재산보다 우리들의 부귀나 영화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사신 주님의 교회와 양 무리들을 더 사랑하고 열심히 섬기면서 살다가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교회 사랑”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축복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2.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에 전념하라고 분부하시면서 동시에 “이웃”과 “원수들까지” 사랑하라고 분부하십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 시대부터 아주 분명하고 포용적으로 나타나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죄악이 하늘에까지 상달한 니느웨 나라와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 나라와 백성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축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원수 지간이던 애굽과 앗수르와도 친밀한 교제를 이루게 되기를 바라시면서 다음과 같은 권면과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3-25). 너무너무 귀중하고 놀라운 이웃 나라들 사랑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무 이상한 말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성자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자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도 요한이 성자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전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회개하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고 살라고 전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워를 가지라”(계 2:4,5).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4,16).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계 2:22.23).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느나 죽은 자로다 너를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 3:1.2).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 4:19,20).

그러면 이제부터 학교와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조만식 장로와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를 세운 분이었고. 한국교회의 귀중한 민족의 지도자들을 일으켜서 키운 분이었습니다.

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이승훈 선생은 3.1운동을 일으킨 애국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남강 이승훈 선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오산학교 일으켜 세운 민족 지도자

첫째로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는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36년 동안의 박해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익한 보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시키기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장년과 노년 시절에는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엄청난 재산을 지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돈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했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1907년 어느 날 일본의 침략의 손길이 깊이 뻗치고 있을 때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평양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은 그의 가슴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 라고 역설을 했습니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14살이 연하인 안창호에게 허리를 굳혀 인사하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가 43세 되던 1907년의 일이었습니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를 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훌륭한 일들을 하는데 자기는 한 발 늦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보곤 했습니다. “저 놈은 눈망울을 보니깐 여간 총명한 게 아니야!”

어느 날 총명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정일선이라는 아이였습니다. 공부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지만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아이를 데리고 그의 부모에게로 갔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아이를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드디어 사재를 털어 정주 오산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운 다음 자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러온 이승일이란 이름 대신 이승훈이라고 바꾸었고 호를 남강이라고 정했습니다.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세운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애국심으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이승훈 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 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참으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을 했고,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적미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예수님을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 고문, 매 달리는 고문, 두들겨 패는 고문 등을 당했지만 모든 고문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치소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구치소에 갇혀 그 동안 수 없는 고문을 달게 받으면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지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절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었듯이 저도 이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 사랑한 신앙인

둘째로 이승훈 선생은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를 사랑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 10월에는 정주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지 한달 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한달 만에 교회를 지은 사람입니다. 재목을 사들이고 돌을 날랐습니다.

두 달 만에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오산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정주읍 교회를 시무하던 정기정 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두 번째 투옥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란 책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모습을 환상 중에 보게 된 것입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라고 부르짖을 때 문득 창살과 햇빛이 온데 간데없어지고 그보다 더 밝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며 마치 신음하듯 “주님!” 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서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동료 학생들에게 깊은 인격적 감화를 끼쳤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올랐다고 합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오산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습니다.

이승훈 장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을 일으켜 세운 3.1 운동의 주역이었고 나라의 독립을 가져오게 한 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 해졌습니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3) 민족과 나라 사랑한 애국자

셋째로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월 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질풍 몰아치듯 서울에서 선천으로, 선천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뛰어다녔다. 만약 천도교에서 주저한다면 기독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과 연락을 긴밀히 취하면서 천도교의 의견을 잘 조절하여 민족의 총의를 묶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습니다.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손병희 씨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입니다.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 후 세 번째로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오산으로 달려가서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다시 재건했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이런 기로를 신음처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이승훈 선생이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이승훈 선생도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너무너무 귀중한 올바른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10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 한경직 목사님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를 사랑하며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귀중하고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우리의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우리 민족과 그리고 세계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귀중하고 가장 값진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이성은 목사님과 일원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축복의 손길을 베풀어 주셔서 이승훈 선생님처럼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나라 사랑과 세계 사랑에 전념하면서 살다가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