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질문들의 배경과 의미들을 찾아보는 칼럼 ‘20 Questions in Old Testament’ 세 번째 편입니다. -편집자 주

골리앗 다윗 카라바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1607년 경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4. 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기에?

다윗의 질문, 사무엘상 17장 26절: 거인에 직면하여(Facing your Giant)

룻기 마지막 4장 22절은 ‘다윗’에 대한 언급으로, 사무엘상의 출발은 이스라엘의 찬란한 미래에 대한 소망이 넘쳐나는 듯 하였으나, 다윗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한 여인의 불임, 곧 ‘한나’의 ‘고통과 기다림’의 삶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여인의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는 ‘불임’이란 절망에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고통과 혼돈’ 그 자체였다. 사사기의 후반은 막장이었고 룻기의 배경은 흉년이었는데, 마치 불임의 여인과 같았다. 불임의 여인이 미래의 소망이 없었듯, 당시 이스라엘은 미래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현실이 눈앞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사무엘상 1장 속 한나의 ‘고통과 인내심, 기다림’은 장차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역사 속에서 나타날 ‘고통과 인내심, 기다림’을 보여주는 전조라고 볼 수 있다. 불임-잉태-출산의 연속선 가운데 애통과 인내가 기도와 찬양으로 바뀌는 한나의 모습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준거의 틀(the reference of frame)을 발견할 수 있다.

한나의 기도인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는 사무엘서를 포함해 이스라엘 전 역사와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는 통찰을 준다.

따라서 앞서 살펴보았던 사무엘상 15장은 양과 소의 소리(15:14, קֽוֹל)와 백성의 소리(15:24, קֽוֹל)만 듣고, 여호와의 말씀의 소리(15:1,19, 22, לְק֖וֹל)를 듣지 않은 사울 왕을 내리시는 내용이다.

다윗 골리앗
▲프랑스 판화가·삽화가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 1832-1883)의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David Slays Goliath)’.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

결국 사울이 무슨 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보는지, 다 드러나 버렸다. 이에 사무엘상 16장에서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그 기준을 주신다.

사무엘상 16장에서 긴 수염을 휘날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은 사무엘이 베들레헴 조그마한 마을에 나타났다.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의 등장에 두려움을 나타냈지만, 정작 사무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רָאָה , 라아, 16:1)”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인물을 선정하여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사무엘에게 선을 보였는데, 그들은 ‘용모’가 뛰어났고 ‘키’가 컸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학벌 좋고 똑똑하며 전도양양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아들들이었으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렸노라(to reject)’고 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보는(רָאָ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רָאָה)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רָאָה)”고 하셨다(16:7b).

이에 사무엘은 실망하고 당황하여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새에게 다급히 묻는다. ‘네 아들들 전부냐?’ 이새가 답한다. ‘아직 막내가 있는데, 그는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약간 흥분하고 긴장된 사무엘이 빨리 그를 데려오라고 다그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단어를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한다. 그 아비가 쓴 ‘막내’라는 표현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를 ‘the youngest’로 표현한다. 그런데 ‘메시지(The Message)’ 성경의 저자 유진 피터슨은 이새의 대답을 ‘There’s the runt(꼬마)’라고 번역한다. 다윗에 대한 이 표현은 한 번 더 나온다.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삼상 17:4)”.

사무엘상 김문봉
히브리어는 הַקָּטָ֔ן(하카톤), הַ(정관사)와 קָּטָ֔ן(형용사)의 형태이다. 영어의 ‘the+형용사’가 사람을 나타내는 용법과 비슷하다. 마치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 ‘관사+형용사’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뜻)과 같다. 이 형용사의 의미는 ‘little, small, younger, youngest’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여기서 ‘하카톤’이란 단어는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insignificant)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린 말로, 중요한 자리에 나서지 말고 뺘져야 할 인물이다. 그저 집안 꼬마에 불과하다. 이 막내는 다윗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중심’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사울 왕 이후 점점 도시화와 중앙집권화의 속도가 빨라져 경제 상황도 많이 달라진다. 곧 경작하는 농업이 발달하고 목축업은 갈수록 변방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목자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또한 목자의 삶 자체가 고되고 힘들었다. 건기 때는 물 때문에 양떼들을 늘 신경써야 하고, 우기 때는 푸른 초장을 찾아 북쪽으로 이동해 종종 집에서 멀리 떨어진 채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은 진정 다윗에게서 들판의 목자로서의 진정성과 그 중심을 보셨다. 그 일에 충실한 다윗의 모습을!

다윗과 골리앗
▲다윗의 물맷돌에 쓰러지는 골리앗에 대한 그림. 
◈들판의 목자에서 이스라엘 목자까지

그런 그가 사무엘하 5장에 가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을 듣고 완전히 다른 처우를 받는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고 말하며 그를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의 통일 왕으로 세운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인생의 진보요, 누가 보아도 엄청난 반전의 드라마이다.

한낱 거친 들판의 목자, 심지어 자신의 아비도 그를 ‘하카톤’이라며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그가 기름부음을 받고 온 이스라엘이 원하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가 됐다. 사울 왕을 내리시고 다윗을 올리시는 반전의 역사가 발생했다. 과연 사무엘상 16장과 사무엘하 5장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God-focus vs. Giant-focus

다윗의 나이 17세에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하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압도하는,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고 놋 투구를 썼으며 비늘 갑옷을 입었고 창 날이 철 육백 세겔의 무기를 든 골리앗의 등장이었다. 그는 40일이나 머물면서 온 전장을 완전히 압도하는 블레셋의 최고의 장수였다. 마치 삼국지의 관우와 장비와 흡사한 듯하다.

골리앗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할 뿐만 아니라(17:10, 25)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17:26, 36, 45)”하는, 이스라엘에게 심히 두려운 존재였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רָאָה)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רָאָה)”고 하였다(17:24-25). 그들은 오직 큰 거인인 골리앗만 눈에 보일 뿐이고(Giant-focus),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윗은 막내(16:11; 17:4)이며 일개 소년(17:33)이었지만, 누구나 보고 있는 골리앗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17:26b)”,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이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17:37)” 다윗의 모든 초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었다(God-focus).

다윗 이야기는 우리에게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영웅의 가공된 이상(ideal)이 아니라, 다윗이 ‘다윗 되어 감’의 현재적 모습 그대로의 실재(Reality)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바로 그 자리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반응하는 한 인간이 갖는 경험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의 여러 차원을 이 다윗 이야기가 보여준다.

권력과 교회
▲미켈란젤로의 다윗과 골리앗. 시스티나 천정화.
인간은 모름지기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살아있다. 다윗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 다윗으로만 보면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다. 그는 불행한 아버지였고(아들의 죽음과 반역), 신실하지 못한 남편이었다. 또 어떤 면에서 보면 그는 시적 재능을 지닌 미개한 족장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용감성이나 탁월한 전투능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오직 ‘God-focus’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다윗 이야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다윗이 마치 슈퍼히어로 같거나, 우리 세계의 사람이 아닌 저 별세계 사람처럼 들린다. 그에 대한 역사적 증거나 고고학적 증거도 많지 않아, 단순히 저녁 잠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는 저 별세계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서 살았던 실존의 역사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짜로 어떻게 골리앗을 이겼을까?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그의 ‘믿음이 대단해서’라고 믿는다. 물론 사무엘상 17장을 읽어보면, 그는 정말 대단한 믿음을 소유했다. 그 믿음이 엄청나기에 존경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가 평소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사자와 곰에서 지켜내기 위해 매일 물매로 표적을 맞추는 훈련과 연습을 엄청나게 했으리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확신한다.

다윗의 이야기는 단순히 영웅담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철저히 훈련과 연습을 다졌던 실력을 현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계발과 전진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위해 훈련하고 도전하고 지켜내기 위한 분투가 있어야 한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 17:34-36)”.

◈작은 자의 역습

1885년 갑신정변 때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테러를 당한 사건이 벌어지자, 미 북장로교 선교사이자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의사였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나서 민영익을 살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치료했던 알렌은 1885년 고종의 허락으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 그러나 16일 후 ‘제중원’으로 개명된다.

1887년 알렌이 떠나자 1893년 캐나다 의료선교사 애비슨(Oliver R. Avison)이 책임을 맡았고, 제중원은 후일 1904년 세브란스라는 이름으로 개명됐다. 그것은 애비슨이 1900년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낼 때 만난 ‘세브란스’라는 인물이 많은 기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후에 연희전문학교 학장까지 맡았는데, 세브란스 병원과 합해 ‘연세(연희+세브란스)’라는 이름이 탄생되는 기틀을 놓았다.

그는 1935년 떠날 때까지 세브란스에서 헌신했다. 1904년 현대식 병원건물을 짓고 세브란스 의학교를 설립해 1908년 첫 의대생 7명이 졸업, 최초로 서양식 의사를 배출한 것이다. 이 7인의 의사 배출의 중심지에는 바로 의료선교사 애비슨이 있었다.

그런데 이 7인 모두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 중 한 명인 ‘홍종은’은 1910년경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고, ‘홍석후’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5명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제중원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자 연세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에서 수술을 진행하는 당시 모습. ⓒ 세브란스병원 제공
1. 김필순: 의사면허 2호

김필순은 한국정부로부터 1977년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그는 세브란스에서 강의하다 갑자기 신의주로 떠났다. 사실은 신의주를 통해 만주 땅 통화(현재 중국의 류화)로 간 것이다. 그가 갑자기 떠난 이유는 구한말 일제의 군대에 저항하던 많은 대한제국 군인들이 죽고 중상자가 발생한 것을 보고, 독립군을 돕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일제가 그를 잡으려던 당일 새벽, 그를 통해 목숨을 건졌던 한 일본 형사의 제보로 그는 황급히 만주로 떠났던 것이다. 만주에서 계속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던 그는 1919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 간호사에 의해 독살당했다.

김필순은 애비슨을 도와 서양의 의학서적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고, 그의 신앙이 바탕이 되어 그 후손들이 모두 신앙의 인물들이 되었다. 후손 중 한 분이 미네소타에서 학업을 할 때 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던 미네소타 한인장로교회 김윤주 장로이며, 그 남편은 미국에 입양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령에도 아직 사역하는 박성철 목사님이시다.

당시 의사로서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 결단으로 너무 좁은 문이었던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 길은 한민족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2. 박서양

백정과 천민들의 어려운 삶을 본 애비슨은 고종황제에게 신분을 철폐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은 1894년 신분자유 포고령을 내렸다. 그는 백정 아들의 신분이었지만 애비슨의 도움으로 세브란스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애비슨과의 만남이 인생에 큰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박서양은 오랫동안 애비슨의 옆을 지키며 세브란스에서 강의하다 1917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의원과 학교를 세워 한민족 독립과 미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그는 2008년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이들의 신앙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신앙적 양심으로 ‘독립’이라는 고난의 길, 좁은 문을 선택했던 작은 자였으나 동토의 땅,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땅에 역습을 가져온 이들이었다.

나라의 패망이라는 거대한 거인을 무너뜨리는 기초가 되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선교사들에 의해 그 암흑의 땅이 밝아지고, 얼었던 그곳이 녹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사기 6장 15절에서 기드온은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 하였다. 실제로 그는 미디안 사람들의 침략 때문에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소인배의 모습을 봉기도 하였다(삿 6:11).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그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며, 그를 ‘큰 용사’로 지칭하면서 그를 들어 크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평범하고 연약한 자를 통해 계획한 바를 이루신다. 하나님은 엄청난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엄청난 영웅을 부르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고 항의하며 몸을 떠는 인간을 하나님은 용감한 영혼으로 바꾸어 쓰신다.

평범한 사람을 들어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무엇에 초점을 두고 어떻게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렘브란트 사울 다윗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사울과 다윗(Saul and David, 1650년경)’.
◈그대, 무엇을 보는가?

어찌 보면 우리는 다 ‘하카톤’ 같은 존재이리라. 인생에서 중요한 장면에 별로 등장하지도 못하고, 중요한 자리에 초청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인생이리라. 우리 인생에서 도저히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재정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 지갑에 얼마나 있는지 먼저 살펴보지는 않는가?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학연, 혈연, 지연을 들먹이며 찾아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평범하고 연약하지만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춘다면, 바로 그를 통하여 계획하신 바를 이루신다. 눈앞에서 골리앗 같은 거인을 마주쳤을 때, 거대한 바다와 샘이 없는 광야에 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로 본다면 우리에게도 인생의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골리앗 사건에서도,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과의 전투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중심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바라보기 위해 자주 하나님께 물었다. 그의 물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길이었다.

우리는 다 ‘하카톤’ 같은 존재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목자요, 주권자’가 됐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모(환경, 상황, 우리 손 안에 있는 것들)만 봄으로써, 오히려 역전의 드라마를 다시 역전시켜 진짜 ‘하카톤’으로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많다.

우리가 다윗은 아니지만, 다윗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 되신다. 우리에게도 반전의 드라마가 준비돼 있기에, 이제 그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

◈샬롬 없는 거리에서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샬롬의 땅에서 샬롬 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샬롬을 보지 못했다. 오늘 우리는 이 척박한 샬롬 없는 땅, 사랑이 없는 거리에서 샬롬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제국과 천국의 양 갈래길에서 ‘up-side-down’을 바라보며,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소망 사이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하며 그것을 바라보자.

매일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구원적 사랑을 바라보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주임을 고백하면서.

김문봉 목사
체리힐 동산장로교회(Dongsan Presbyterian Church of Cherry Hill)
부산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미국 Liberty Theological Seminar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Luther Seminary 등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