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질문들의 배경과 의미들을 찾아보는, 특히 구약 속 20가지 질문을 살펴보는 ‘20 Questions in Old Testament’ 두 번째 편입니다. -편집자 주

모세 파라오 바로 십계
▲영화 <십계> 중 모세가 바로와 대립하는 장면. ⓒ유튜브

내가 누구이기에? (출 3:11)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출 5:2)

창세기 첫 글자는 히브리어로 ‘태초에(בְּרֵאשִׁ֖ית, 베레쉬트)’이고, 마지막 글자는 ‘애굽에서(בְּמִצְרָֽיִם, 베미쯔라임)’이다.

창세기 50장은 야곱의 장례식과 요셉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생명이 애굽에서 죽음의 관으로 닫힌다.

여기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질문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과 후손은 어떻게 된 것인가?’ 등이다. 하지만 요셉의 마지막 유언에서 우리는 작은 실낱 같은 희망을 건진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비록 요셉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나, 그 뒤에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요셉의 죽음이 ‘창세기의 결말인가?’를 포함하여,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출애굽기 1장 6절과 7절 사이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다(1:6)”는 보고와 “이스라엘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1:7)”는 말씀 사이에,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러나’가 있다. 곧 ‘다 죽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였다’ 이다.

죽음과 생명이 글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 죽음 이후 새로운 생명이 솟아오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죽음의 장소인 애굽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죽음의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생명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애굽에 요셉을 ‘알지(יָדַע)’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1:10) 고된 노동으로 그들을 학대하였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돌보셨고 그들을 기억하셨다(יָדַע, 알고 계셨다). 이제 그들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 가려 하신다(3:8).

1. 모세의 질문: 내가 누구이기에?
מִ֣י אָנֹ֔כִי, 미 아노키, Who am I?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겠다고 하실 때, 모세의 대답은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11)”였다.

혹자는 이 모세의 질문을 자신의 힘으로 히브리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다가 실패했던(2:11-15) 과거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 혹은 부정적 사고의 모습이라고 한다. 하지만 주의 보좌 앞에 있던 이사야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사 6:5)”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셨을 때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는 고백과 같지 않았을까?

툴리안 차비진
▲툴리안 차비진의 《Jesus+ Nothing= Everything》.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 안에 있다. 자신의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답을 모르거나 답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의 모습, 곧 처음 창조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기독교적 이해에 이르도록 노력할 때, 몇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 자신에 대한 어떤 관점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그것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인간을 바라보는 어떤 인간론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작용하는가?

따라서 모세의 이 질문은 두려움이나 자신을 향한 비탄이나 조소, 부정, 패배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궁정에서 최고의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구출해 보려 시도한 후 실패한 자신은 심히 나약한 존재이며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한 인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그의 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I am nothing)’, 바로 그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진정한 인간론이 나온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인간은 세상에서 유리 방황하는 방랑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향한 순례자의 길에 들어선다.

비록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Nothing) 그 자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달라진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충만하심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한다. ‘Jesus+ Nothing= Everything’의 저자 툴리안 차비진(Tullian Tchividjan)은 인간의 ‘Nothing’을 결코 인간적인 것으로 채울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 ‘Nothing’이 ‘있음’을 넘어 충만함(Everything)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기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Everything’으로 나아가는 우리 삶의 고백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할 때, 주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셔서(일하심, Working) ‘있음’을 드러내신다. 진정 우리 인생의 출발점은 ‘내가 누구이기에?’의 실존적 질문에 있다.

모세 홍해 이스라엘 애굽 바로 기적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 ‘홍해를 건너다(The Crossing of the Red Sea, 1634).

2. 바로의 질문: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מִ֤י יְהוָה , 미 야훼, Who is the LORD?

‘스스로 있는 자’, 곧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3:14) 모세가 아론과 더불어 애굽의 바로를 찾아가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바로의 대답은 빛의 속도로 ‘No’였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יָדַע) 못하니(5:2)”라고 답한다.

그의 ‘여호와가 누구인가?’라는 말은 ‘현재 이 세계에서 진정한 통치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노예 민족에게 무슨 신이 있겠으며, 설령 있다 한들 애굽의 강력한 신들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신이 애굽의 최고의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은 ‘I can do anything that I want(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라는 자기 중심적 인간론이다. 여호와가 인간 삶의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이 중심이며, 자신은 원하는 모든 것을 제어하고 행할 수 있다고 외치는 인간론이다.

출애굽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가짜 신 바로’와 ‘참 하나님 여호와’의 대결이 시작돼, 누가 승리하는지를 보여준다. 그 바로의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에서 홍해까지 친히 대답하셨다.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근본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 바로의 악한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준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7:5)”.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8:10)”.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8:22)”.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9:4)”.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9:29)”.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14:4)”.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승리와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었을지라도, 바로 질문의 악한 영향력은 여전하다. 바로의 질문은 오늘 세상과 각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악의 원천이다.

그 질문은 ‘내가 나의 주인’이니 누구도 내 인생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현대인들의 인식론에 파고 들어온다. 인간의 유한성과 편협성을 깨닫지 못한 질문이다. 악함이 악행으로 나오는 타락한 인간론의 토대에 선 질문이다.

모세 파라오 바로 십계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십계명을 내리치는 모세(Moses Smashing the Tablets of the Law, 1659)’.

3. 두 질문 사이에서: 세계관의 충돌

모세의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백과 바로의 거만한 질문은 상극의 메아리로 두 세계관을 상징한다.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모세의 질문은 전적인 하나님 은혜를 소망하며 기대한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임을 알아 나를 부정하고, 죄인임을 알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손길을 기다린다.

하지만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며, 인간의 이성(Reason)은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두 개의 상극된 세계관은 여전히 지금도 충돌하고 있다.

오늘날 사회는 아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무궁한 발전에 대한 위대한 약속을 주었다. 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무제한적인 개인의 자유 말이다.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삼위일체가 발전이라는 신앙적 형태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를 강력히 비판하여 나온 책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이다. 이는 ‘소유 양식’이 ‘존재 양식’을 능가해 버린다고 현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오래 전 대학 새내기 시절 교양 필수 과목 과제였던 탓에, 3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을 안고 꽤 오랫동안 씨름하던 기억이 새롭다.

‘소유 양식은’은 공유가 아닌 점유만이 즐거움이 되어 많이 소유하는 것이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었고,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신의 존재가 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소유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무한한 소유가 인간의 삶을 유토피아로 인도한다고 믿으며, 절대적 창조주를 밀어내는 결과를 양산한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To Have or To Be(소유냐 존재냐)》.
가나안 땅 서쪽 비옥한 땅에 사는 이들은 지중해와 더불어 풍요로운 생산물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곳 삶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 토양은 비옥하고 충분한 비가 내리며 매년 풍성한 잉여 수확이 가능한 곳이다. 최악의 순간에도 기본적인 삶이 그럭저럭 넘어간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굳이 기도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있어도 먹을 것은 들어오고, 현재의 삶은 여유가 있고, 축적된 재산으로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의 삶이다.

이곳은 지중해의 용이한 접근과 비옥한 토양과 날씨로 고대부터 대도시가 발달된 곳으로, 서부 해안평야에 들어선 블레셋과 가나안 원주민, 페니키아 대도시들은 이곳을 무대로 발달했다.

이곳의 중요한 신은 바알이다. 풍요로움을 준다는 이 바알은 오늘 물질만능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부심, 자존감, 자긍심, 성취욕구, 카리스마, 강력한 리더십, 화려한 언변과 사교술 등에 중요 가치를 두며, 양보하거나 인내하는 것은 전혀 미덕이 아니라고 한다.

이곳은 각 도시마다 저만의 우상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 블레셋 다곤, 페니키아(베니게) 아스다롯, 가나안 바알, 에그론 바알세붑 등으로 가득한 곳이다. 바로 ‘여호와가 누구인가?’라는 거만한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곳이다.

하지만 ‘존재 양식’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유적 인간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새로운 인생으로 탄생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스라엘 전 역사의 주요무대는 중앙 산지였다. 이곳은 산지, 골짜기, 광야로 이뤄진 척박한 땅이다. 여기서의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비가 많이 오지 않으며 토양도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 많아, 무엇을 기대하기가 힘든 땅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않으시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일 살아내기 바쁘고, 날마다 주시는 은혜로 살아야 하는 ‘막 쪄낸 찐빵’과 같은 일상이었다. 부족하기에 참아야 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서로 함께 공유하고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하나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의 줄’이 끊어지면 생명 줄이 끊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불의 선지자 엘리야는 정신없이 이 광야로 피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이곳으로 도망했지만, 그곳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만났다.

예수님도 이 광야로 나가셨고,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년간 시리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다.

동쪽 무대의 삶은 힘들고 지친 삶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뜨거웠다. 자신의 것을 움켜잡는 것보다 놓을 줄 알았고, ‘포기의 삶’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것임을 알았다. 하나님을 만나는 광야가 있는 동쪽 무대에, 진정한 축복의 삶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난다면, 동쪽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진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배경으로 우리 인생을 만들어 가시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 분의 뜻을 펼치신다. 바로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질문과 더불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정체(Identity)가 하나님의 인애(חֶסֶד, 헤세드, 은혜, 선대, 인자)에 있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그 현장이다.

20여 년이 지난 후 다시 <소유냐 존재냐>는 책을 읽고 일상의 모든 관계에서 ‘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게 되었고, 그런 고찰은 내면에서 조용히 이루어져 왔다. 이후 많이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소유’에 집착하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존재’의 가치와 무게를 떠올리며,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자고 나 자신을 타이른다. 내가 누구입니까? 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Who am I? O Lord, I am nothing).

모세 파라오 바로
▲바로 앞의 모세(Moses before pharaoh). 6세기 경 시리아 성경 사본(The Syriac Bible of Paris) 수록.

4. 제국과 천국

출애굽기 전체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지 애굽에서의 구출(구원)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거룩한 삶을 이루는 것이다. 그들의 출애굽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5:1, 3; 7:16; 8:1, 20).

하나님께서는 재앙이란 수단을 통하여 애굽이 참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애굽의 것들에 집착하는 소유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존재로 임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그들 삶 속의 모든 인격적인 앎) 만나고 고백함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참된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셨다.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10:2)”.

구약은 ‘떠남’과 ‘돌아옴’의 두 축에 의해 진행된다. 떠남은 자신의 고향을 떠날 뿐 아니라 우상과 모든 물질로부터의 떠남이다. 출애굽 후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의 근거는 애굽을 떠나 하나님 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5:3)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에 그들의 존재론적 정체가 있었다(19:6).

하지만 그들은 계속적으로 ‘제국(the Kingdom of the World)’인 애굽의 것들에 사로잡혀 방향 상실 (De-orientation)을 하곤 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소유할 수 있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집단적 행위는 ‘여호와는 누구인가?’라는 바로의 질문 라인 위에 선 것이었고, 그로 인해 집단적 죄악에 빠져 그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뒤흔들었다.

출애굽은 모든 소유양식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온전한 백성의 존재 양식으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일하심이었다.

여전히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애굽의 것들이 차고 넘친다. 손에 쥐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최대의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설파한다. 인간의 과학기술 문명이 인간을 낙원과 무릉도원으로 인도하며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환영을 심어 주고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세계관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다. 인간의 이성적 발달은 이 땅에 세상 왕국, 곧 자신들의 제국을 세운다. 그것으로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미혹한다. 새로운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고백을 밀어내고, 물질과 과학, 인정과 긍정을 소유함으로 세상은 제국의 길에 들어섰다.

그들은 첫 질문인 ‘하나님은 누구인가?’라고 말하며, 모든 방면에서 철저히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다.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지우려 하고,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희석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혼란케 하려고 작심하여 행동으로 옮긴다. 이는 인간이 생명과 역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염된 생각에서 나온다.

과거 바벨탑처럼 여전히 인간의 욕망과 거짓, 위선과 사기, 위장된 악함과 숨겨진 인간의 타락과 죄악이 새로운 바벨탑을 지탱하고 있다. 이 땅에 타락한 어둠의 천국을 만들려 한다.

낙원은 어느새 전설이 되고, 창조는 신화의 자리로 떠넘겨진다.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싶은 몸부림, 최소의 것으로 최대 행복을 누리고 싶은 욕구, 끊임없이 소유하고 싶은 욕구, 하늘로 비상하고 싶은 욕구(babel, 바벨·마천루)는 자신의 삶이 유한하며 하나님 은혜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괴물이 되어가게 한다.

천국을 흉내내는 이 세상 제국은 점점 미쳐간다. 10가지 재앙의 쓴맛을 보고서도 정신차리지 못한 애굽의 바로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제국의 길에 들어선 이 세상은 새로운 출애굽(ἔξοδος, Exodus, 떠남, 별세, departure)을 필요로 한다.

작금의 서구사회는 하나님의 천국을 대체하려는 제국을 세우고 있다. 인공지능, 과학기술, 압도적인 경제적 파워를 앞세운 인간의 지성이 우리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군사독재에 버금가는 소위 ‘Corporation dictatorship’ 곧 Big Tech와 같은 일부 몇몇 기업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일인 혹은 일당 독재와 같이 행하는 것이 만연하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는 무너지고 대중을 위한 진실과 정의는 왜곡되며, 바로의 자리에서 자신이 신이고 왕임을 자처하고 있다. 높은 하늘에 올라가 모든 것을 통치하려 멸망의 바벨탑을 건립하고 있다. 우리에게 강제로 왕을 선택하기를 요구하는 이 시대 속에서, 누가 진정 우리의 왕인가? 여호와인가, 바로인가?

우리가 세상의 제국 속에 있으나 천국인으로 살아가는 비결은 ‘떠남’과 ‘돌아옴’에 있다. 세상 속에 살고 있으나 출애굽(떠남)한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로 강하고 당당하며 담대하게 사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천국인의 삶이다.

전장의 골리앗같이 우리를 위협하며 목청 높여 소리쳐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는 고백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실존적 모습의 회복(돌아옴)은 그 길(the Way)이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on the road).

5. 그날이 이르기까지

출애굽은 물질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이 그 땅에서 하나님 백성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전히 애굽과 가나안, 이미와 아직, 세상과 천국의 긴장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샬롬의 땅에서 엔샬롬(En-shalom, שָׁלוֹם אַיִן, 평강 없음)의 삶을 살았다. 지금 우리는 집단적 죄악과 타락상이 차고 넘치는 엔샬롬의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샬롬의 삶을 분투하며 살아낸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길 위에 있는 방랑자와 같은 존재이지만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받는 상속자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바라보는 삶이다. ‘여호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판치는 세상에서 떠나(출애굽)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겸허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며, 인생에게 나타나는 모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로 돌아오는 천국인의 삶이 우리에게 부여됐다.

과거 모든 출애굽 경험과 미래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그 나라에 대한 소망 사이에서, 그날이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하자.

김문봉
▲김문봉 목사.
김문봉 목사
체리힐 동산장로교회(Dongsan Presbyterian Church of Cherry Hill)
부산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미국 Liberty Theological Seminary(현 Calvin Theological Seminary), Luther Seminary 등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