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는 질문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질문들의 배경과 의미들을 찾아보는 칼럼 ‘20 Questions in Old Testament’ 세 번째 편입니다. -편집자 주

사울 사무엘 책망 불순종
▲미국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1738-1815)의 ‘사울을 책망하는 사무엘(Saul Reproved by Samuel, 1798)’
3.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사무엘상 15:14

룻기 마지막 4장 22절은 ‘다윗’에 대한 언급으로, 사무엘상의 출발은 이스라엘의 찬란한 미래에 대한 소망이 넘쳐나는 듯 하였으나, 다윗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한 여인의 불임, 곧 ‘한나’의 ‘고통과 기다림’의 삶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여인의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는 ‘불임’이란 절망에서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고통과 혼돈’ 그 자체였다. 사사기의 후반은 막장이었고 룻기의 배경은 흉년이었는데, 마치 불임의 여인과 같았다. 불임의 여인이 미래의 소망이 없었듯, 당시 이스라엘은 미래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현실이 눈앞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사무엘상 1장 속 한나의 ‘고통과 인내심, 기다림’은 장차 이스라엘이란 나라의 역사 속에서 나타날 ‘고통과 인내심, 기다림’을 보여주는 전조라고 볼 수 있다. 불임-잉태-출산의 연속선 가운데 애통과 인내가 기도와 찬양으로 바뀌는 한나의 모습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준거의 틀(the reference of frame)을 발견할 수 있다.

한나의 기도인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는 사무엘서를 포함해 이스라엘 전 역사와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는 통찰을 준다. 이 통찰을 통해 사무엘상 15장을 들여다 보자.

구약은 단적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신 6:4)”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였다. 신약에서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라는 말씀에 따라, 신약의 교회도 말씀을 듣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그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또한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대방이 말하는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중요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해야 할 때는 더욱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고 해야 한다. 그러나 간혹 의도와 다른 반응과 결과가 나타날 때는 당황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 중요한 사명이 주어진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망각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아말렉 족속을 진멸시키라는 사명(mission)이 사울 왕에게 주어졌다. 우선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1. 사울의 사명

“삼상 15:1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שְׁמַ֔ע לְק֖וֹל דִּבְרֵ֥י יְהוָֽה׃)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ולֹ֥א תַחְמֹ֖ל עָלָ֑יו , do not take compassion on then)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의 원문은 ‘여호와의 말씀의 목소리를 들으소서(You hear the voice of the word of Yahweh (the LORD))’ 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목소리’가 생략되었다. 곧 사울의 사명은 하나님 말씀의 목소리에 청종하여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는 마치 이방신이나 우상을 따르는 자에 대한 심판의 말씀인 “너는 그를 따르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여기지 말며(וְלֹֽא־תַחְמֹ֥ל, and do not take compassion or spare)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신 13:9)”처럼 행하라는 것이었다.

“진멸하다”의 명사 ‘헤렘(바쳐진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정된 것으로, ①결코 다른 용도로는 사용될 수 없고 ②오직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헤렘의 법칙대로 시행돼야 했다.

따라서 이 헤렘이 만일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 버려야 했으며,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야 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명령하신 헤렘은 반드시 그대로 시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요 뜻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말렉 족속을 반드시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을까? 사무엘상 15장 2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대적한 일’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먼저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무방비 상태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미를 공격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출 17:8-13; 신 25:17-19). 그 후미에는 노인들, 어린아이들 등 연약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아말렉 사람들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노예 생활을 끝내고 해방된 직후이고 아무런 군사적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에, 이들의 공격은 이스라엘 진영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시되 …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출 17:14)”고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민 24:20). 곧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맡기신 그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시행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명이었다.

렘브란트 사울 다윗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사울과 다윗(Saul and David, 1650년경)’.
2. 사울의 행동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이러한 중대한 사명에 대해 사울은 어떻게 했는가?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יַּחְמֹל , 바야흐몰, (좋은 것에) 동정을 품고는, but keep back the best things)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너무 아쉽게도 사울은 자신의 사명을 전적으로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어찌하여 사울은 이 중대한 사명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는가?

사울은 자신을 찾아온 사무엘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도 몰랐고, 자신이 그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음을 깨닫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사무엘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13절)”라고 어리석게 말한다.

3. 사무엘의 질문과 사울의 변명

그런 사울에게 묻는 사무엘의 말은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삼상 15:14)”였다.

이 질문은 무슨 뜻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도대체 사울이여 당신은 무슨 소리를 들으셨나이까?’이다. 이 질문에 대한 사울의 대답은 또 다시 그의 어리석음과 하나님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5)”.

그의 말에 의하면, 우선 앞서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말씀을 처음부터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였거나, 눈에 좋게 보이는 양들과 소를 본 후 혹시 그의 사명의 중대함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또한 모든 결과의 책임을 백성에게 돌리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 수행의 모든 책임이 사울 왕 자신에게 있음에도,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라고 말함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 상황에서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현명하고 제대로 일을 처리한 듯 보일 수도 있겠다.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니 얼마나 듣기 좋은가!

하지만 제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명의 올바른 수행이다. 그는 제사와 말씀에 대한 순종의 올바른 이행 사이에서 줄타기와 물타기를 하고 있으며, 본질 곧 주어진 사명을 뒤틀어 버리는 왜곡을 일삼고 있다.

제사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이행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이것을 살짝 비틀어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무엘은 질문은 단호하고 날카롭다.

“삼상 15: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 (קֽוֹל,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 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인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은 ‘탈취하기에만 급한’ 것이라고 적시하며 하나님의 목소리(קֽוֹל)에 청종(שָׁמַע) 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 사울은 계속적으로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고, 모든 책임은 백성에게 있다고 하며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삼상 15: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은 또 다시 본질을 흐리게 하여 진리와 진실을 뒤틀어버리는 왜곡을 일삼는다. 곧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좋은 것을 남겨뒀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라는 관점으로, 사무엘의 질문 논점을 흐리게 만든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겠다는데, 사무엘 당신은 왜 자꾸 딴소리를 하시는가?’라는 여론전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 사울이 사명을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

사울이 들었던 소리는 눈에 보기 좋았던 소와 양의 울음소리와 그가 고백하듯이 그는 백성들의 소리에만 민감하였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실패는 특히 사무엘상 15장 24의 고백처럼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목소리는 사울에게는 그냥 지나치는 바람 소리와 같았는가? 그 하나님의 목소리에 철저히 집중하지 못하고 그 목소리를 버림으로, 왕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삼상 16:1) 슬픈 인생의 골짜기로 빠졌다.

그가 들은 소리는 무엇인가? 물질의 소리(양과 소의 소리)와 사람들의 여론(백성의 소리)에만 신경을 쓰고, 정작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공중에 흩어지는 의미 없는 바람 소리와 같이 여긴 것이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קֽוֹל, 소리)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이에 사무엘의 결론적이고 중대한 말씀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בְּק֣וֹל יְהוָ֑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שְׁמַ֔ע)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שָׁמַע, 귀를 기울이다, 경청하다, 순종하다, listen to one very carefully, obey)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קשׁב, pay attention, listen carefully) 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였다. 곧 순종은 주의 깊게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셨던 그의 사명을 끝냈지 못했고 그것을 마무리한 사람은 사무엘이었다.

“삼상 15: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사울 자살
▲사울의 죽음(1860),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거기에는 사울이 들을 수 있는 세 가지 다른 소리가 있었다.

1) 여호와의 말씀의 소리(15:1, 19, 22, ְק֖וֹל):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

2) 양과 소의 소리(15:14, קֽוֹל ): 물질 곧 돈의 소리

3) 백성의 소리(15:24, קֽוֹל ): 사람들의 소리 곧 여론

그가 들었던 양과 소의 소리는 물질, 곧 돈의 소리가 아니던가? 또 백성들의 소리는 국가와 사회 집단과 개인을 움직이는 여론이다. 그가 들었던 세 가지 소리 사이의 우선순위 갈등에서 하나님 말씀의 소리(목소리)는 뒤로 처지고 밀려난 것이다. ‘Mission Possible’이 ‘Mission Impossible’로 역전된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5. 무슨 소리를 들으시나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구걸하며 사는 그가 가장 민감하게 듣는 소리는 동전이 그의 앞에 떨어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소리)을 들은 그는 힘을 다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라고 외쳤다.

사실 그의 형편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제한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들과 도움을 달라고 외치는 수많은 소리들이 있었다. 육체적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하등으로 취급하는 당시, 과연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막 10:46)” 계셨고 “앞서 가는 자들(눅 18:39)”이 있어, 사실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주님을 만났고, 치유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 그는 길가에(길 옆에서, by the road) 앉아있던 인생에서, 길에서(길 위에서, on the road)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여전히 수많은 소리를 듣고 산다. TV에서 흘러나오는 긴박한 뉴스에 대한 소리, 아름다운 선율이 있는 연주 소리,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 없이 많은 광고 소리와 사람의 말하는 소리, 소리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일을 놓고 수 없이 일어나는 소리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청난 음모와 한탄, 웃음의 소리들, 늘 우리 귀에 들리는 질투와 이기적인 소리들, 여전히 물질의 엄청난 파워와 그것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유혹의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현대인들, 가슴을 애끓게 하는 다른 사람들 소리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넘쳐난다.

모든 사회 영역에서 돈의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 곧 여론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돈과 여론이 진리인양 사람들을 휘몰아치며 반기를 들지 못하게 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추적해 보면, 결국 그 중심에 돈이 있다는 말은 이제 식상한 말이 될 정도이다.

‘Money talks’란 말처럼, 모든 것은 돈을 통하는 것이 오늘날 세상이다. 특히 생각이나 이념이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보면 첫 번째가 돈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행동 양식에서 돈이 말한다(Money talks). 양과 소의 소리를 아름다운 선율로 들었던 사울과 그들에게는 돈의 소리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보다 더 아름답게 들린다.

돈과 여론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진리와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세상 모든 나라들의 정치와 사회가 이 두 가지로 흘러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론의 대표적인 것이 여론조사라는 숫자의 꽃, 통계라는 것이다. 이 통계 곧 여론조사가 진리가 아닐진대, 모든 정치인들은 진리와 진실보다 여론 곧 통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혹자는 ‘제대로 된 여론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만이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 통념도 여론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빅데이터(Big Data)가 사회와 경제를 움직인다.

그 뒤에 당연히 도사리고 있는 것은 돈이다. 이는 원래 가치중립적이지만 여론과 합하여 정치와 사회 통념의 진리인 양 통하여,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사탄의 전략은 왜곡(Twist, 비트는 것)이다. 지성을 무시하고 인간의 감성만 자극하여 집단적 죄악에 빠져 들게 한다. 제사도 중요하지만, 사울의 상황에서는 철저한 순종이 우선이었다.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살 수도 있었고 저항도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들, 그들의 소리는 진리가 아니었다.

오늘날 진리와 진실이 ‘대중’과 ‘다수’라는 이름 아래 왜곡된 것이 너무 많다. 시대적 경향(trend)이라 해도, 집단적 죄악 곧 LGBTQ+ 같은 것을 다수 의견 곧 여론이라 하여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집단적 죄악은 여론을 조성하여 숫자로 제시하는 통계가 모든 진리와 진리를 왜곡하여 비틀어 버린다.

사탄의 왜곡된 전략으로, 인간의 우선권과 편리성을 위해 인권을 가장 중심점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을 무시하고 뒤로 철회시킨다. 인간의 인권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주님 되심을 비틀어 버리는 왜곡을 꿰뚫는 통찰이 필요하다.

이는 나아가 진리를 형편없는 것으로 둔갑시키는 세속화의 길을 걷게 한다. 이러한 모든 전략의 뒤에는 돈과 여론이 진리와 진실한 것으로 믿게 하는 데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자유로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뿐 교회 안에서도 돈과 여론이 진리인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가? 진리와 진실의 본질은 하나님 말씀의 목소리에 있다. 포스트모던적 가치가 판치는 현 세태에서, 도대체 당신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의 목소리를 발하고 계신다.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그 사명을 주시는 음성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처럼 물질의 소리와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하여 그 것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여전히 모세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우리 귓가에서 맴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오늘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신 6:4, 6)”.

김문봉 목사
체리힐 동산장로교회(Dongsan Presbyterian Church of Cherry Hill)
부산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대학원,
미국 Liberty Theological Seminar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Luther Seminary 등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