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이롭게 하는 예술 가능?
공공 예술, 고대 문명부터 발견
20세기 들어, 새로운 양상 출현
공동선 추구 통해 더 나은 미래

클라우드 게이트 공공 미술
▲애니쉬 카푸어, 클라우드 게이트, 2004.
요즘 미술계를 지켜보면 예술 행위가 ‘사적 범주’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스타가 되길 소망하고 성공 신화에 몰두하는 모습, 표현적인 개성에 대한 암묵적인 찬양 등은 우리 사회에 편만한 개인주의 풍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트 페어, 옥션, 사이버 미술시장, 아트펀드 등 상업주의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는 미술의 공적 기능보다 경제적 기능에 더 충실한 면모를 노출한다. 덕분에 미술은 뉴스에도 자주 오르지만, 정작 예술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가치만 부각된다. 무언가 빠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예술이 자신에게 갇힌 누에고치가 될 경우 세상과의 소통은 물론이고 작품을 통한 공적 가치의 구현도 외면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이즈음 우리는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예술은 가능한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 방안을 강구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공공 예술의 개념은 고대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인들은 대중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기념비적인 조각상과 부조물을 만들었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들의 신과 영웅을 기리는 조각품과 건축학적 특징으로 공공장소를 장식했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예술의 주요 후원자가 되어 프레스코, 스테인드글라스, 조각품 등을 설치하였다.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샤르트르 대성당은 예술적인 스테인드글라스로 명성이 자자한데,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성경의 이야기와 성도들의 삶으로 디자인된 수천 개의 색유리로 구성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오면 예술품을 광장이나 공공시설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고, 그 사회의 이상과 가치를 반영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피렌체 사람들의 힘과 용기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는가 하면, 얀(Jan)과 후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의 <겐트 제단화>(1432),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1541) 등은 지금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미술의 공공성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은 강한 시민적 자부심과 공동체적 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번영한 사회였는데, 이러한 시대적 기류는 그 시대의 예술, 특히 네덜란드 회화 장르에 반영되었다.

네덜란드 회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소작농, 상인, 장인 등 평민의 삶을 묘사한 일상의 장면을 즐겨 그렸는데 이런 광경은 네덜란드 시민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0세기 들어 공공 미술은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이유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시카고 밀레니엄 광장에 있는 애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클라우드 게이트>(Cloud Gate, 2004)는 광택이 나는 표면이 타원형으로 휘어져 있는데, 관객이 그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감상자는 자신이 구름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자유로운 상상의 유영을 즐기게 된다.

쇠락한 지역을 재생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공공 미술품도 볼 수 있다. 영국 게이츠헤드에 설치된 <북쪽의 천사>(the Angel of the North,1998)는 앤소니 곰리(Anthony Gormley)의 공공 작품으로, 높이 66피트, 폭이 177피트나 되는 대형 구조물이다. 이 조형물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여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나타내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게이트 공공 미술
▲크리스토와 장 클로드, 게이트, 2005.
설치미술가 크리스토(Christo)와 장 클로드(Jeanne-Claude)의 <게이트>(The Gates, 2005)는 뉴욕 시 센트럴 파크 산책로를 따라 7,500개 이상의 샤프란 색상의 패브릭 천을 설치하였다. 이 작품은 삭막한 철근 빌딩으로 둘러싸인 메가 시티를 작은 바람에도 물결치는 낭만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도시로 변모시켰다.

공공 예술은 대규모 조각과 벽화에서부터 인터랙티브 설치 및 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공원, 광장, 박물관 및 기타 공공장소에서 볼 수 있다. 현대의 공공 예술은 종종 사회 및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을 촉진하며 관광, 경제 개발 및 커뮤니티 정체성을 촉진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공공 미술은 우리의 삶과 환경을 바꾸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래에는 새로운 형태의 공공 미술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오브제 지향적 공공 미술을 넘어 참여자와의 대화를 작업의 중심에 놓는 작업을 포함한다. 페미니스트 행동미술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창안한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New Genre Public Art)이 그것이다.

수잔 레이시의 작업은 참여자와 함께 공동 작업을 하는 데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크리스털 퀼트>의 경우 시니어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개인적 경험들을 나누고 관람자들은 발코니 너머에서 미리 녹음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듣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2010)에도 출품하였는데 그녀의 작품은 ‘여성들의 수다’를 작품화하는 것이었다. 15개 팀으로 나뉜 여성들이 각기 다른 15개 장소에서 ‘수다’ 퍼포먼스를 펼침으로써 ‘여성 아젠다의 발굴, 제안을 통해 정책수립’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었다.

정치적 아젠다를 미술의 영역에서 다루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페미니스트 행동주의자답게 레이시가 여성 문제를 이슈로 삼은 것은 ‘공공 미술’을 지렛대 삼아 페미니즘 운동을 퍼뜨리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품이 갖는 미적 가치와 창의력, 독창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과연 그것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유익을 주는 ‘공공 미술’의 성격에 부합한 것일까?

공공 미술을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언가 전력을 다하여 추구할만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공동선’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주요한 인식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사회 구성원 전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고상한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런 인식 자체의 부재가 ‘유사 공공 미술’의 출현까지 가져오게 된 셈이다.

공동선의 개념을 예술에 적용하는 것은 예술이 개별 작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과 요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처럼 전쟁과 테러, 이해집단 간의 대립과 충돌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 친밀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점에서 공동선의 추구는 자신과 타인을 위한 더 나은 미래로 나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