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종호 판사가 말하는 공동선 (上)
韓 사회, 비행청소년 엄벌만 강조
재비행 막을 장치 함께 마련 필요
만사소년 활동, 배분적 정의 차원
‘소년범들의 대부’, ‘호통판사’, ‘만사 소년’ 등으로 불리며 위기 청소년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천종호 판사(대구지법)가 최근 <천종호 판사의 하나님 나라와 공동선>을 펴냈다.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 <천종호 판사의 예수 이야기>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교회의 공공성’, ‘공공신학’ 등 사회를 향한 교회의 역할이 강조되는 가운데, 천종호 판사는 이 시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되찾아야 할 소명으로 ‘공동선(共同善, the common good)’을 제안한다. 기독교적 가치를 담았지만,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이중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와 함께 법조인답게 공동체와 선,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천종호 판사는 교회로 대표되며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는 ‘아벨공동체’, 국가로 대표되며 인간을 주권자로 삼는 ‘가인공동체’라는 용어를 만들어 둘을 대조시키면서, 교회와 국가와의 바른 관계 설정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세상의 빛과 소금 사명 회복’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책에서는 판사로서 선악, 죄와 처벌, 비행청소년 등에 대해 가져야 했던 끊임없는 고민과 번민도 느껴진다. 지난달 한 대학에서 만난 ‘호통 판사’가 전하는 ‘공동선’ 이야기를, 세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비행청소년 문제를 주로 파고들며 집필하시다, 예수님과 공동선 이야기로 넘어간 과정이 궁금합니다.
“비행청소년들을 처벌하더라도, 처벌 이후 조치가 없으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재비행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재비행을 막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됐지요. 사실 한국 사회는 비행청소년들에 대한 엄벌만 강조할 뿐, 처벌 이후 대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 아이들은 살 날이 많이 남았는데 집안 형편도 어렵고 다른 아이들과 같은 기회를 부여받지도 못했다는 것만으로 설득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보니 결국 ‘아이들에게 처벌 이후에도 뭔가 조치를 해주는 것이 정의’라는 측면으로 접근하게 됐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正義·justice)를 배분적(分配的·distributive) 정의와 시정적(是正的·rectificatory) 정의로 구분하는데, 한국 사회는 주로 시정적 정의를 요구합니다. 쉽게 말해 범죄자들에게 그에 상응한 처벌 또는 엄벌로 정의를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편집자 주).
문제는 성인이라면 처벌 후 일을 하거나 해서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지만, 청소년들은 가난해도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문제가 비행의 원인이었다면,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배분적 정의(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편집자 주)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근로 하한 연령 해제로 일을 하게 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연령을 유지하려면 국가나 누군가 나서서 아이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줘야 합니다. 아이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춰 주는 배분적 정의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끊임없이 주장해 왔습니다.
어떤 분들이 왜 비행청소년들을 살갑게 대해 주느냐, 처벌만 잘하면 되지 왜 판사님이 나서서 회복센터를 만드냐고 하시는데, 바로 ‘배분적 정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이런 주장을 하면서 청소년 범죄나 비행, 학교폭력 문제 등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인지도가 높아졌는데, 이런 영향력을 개인적 이익보다 하나님 나라의 바른 모습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에 쓰고 싶어 시작했던 것이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이었습니다.
이후에 쓴 <천종호 판사의 예수 이야기>는 신학 쪽에 가깝고 이전의 <천종호 판사의 선, 정의, 법>은 정치철학에 가까운데, 이번 <천종호 판사의 하나님 나라와 공동선>은 둘의 경계선에서 서로를 이을 수 있도록 신학적·법적 바탕을 서술한 책입니다.
요약하자면 지명도를 얻었을 때, 기독교인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서 썼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세상이 성경의 사상을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인권, 하나님 형상으로 주어진 것
하나님 최고선 두면, 인권도 보장
국가와 교회 바른 관계 확립 필요
-‘공동선’이란 일반 사회의 언어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보면 될까요.
“맞습니다. 서문에도 썼지만, 기독교가 너무 개인주의화, 사적 신앙으로 많이 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적 신앙보다 공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최근 공공신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가 개인이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살 것인가를 주로 말한다면, 공공신학은 사회 공적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공공신학이나 공동선에 대해 논한 책들을 국내 저자 포함 10권 이상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핵심은 ‘공적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교회도 공공성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신학적 논쟁을 펼칩니다. 하지만 저는 법학자로서 판사로서 공동선이나 공공신학의 개념 정의보다, 공동선이 무엇이고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이를 접목시킬 수 있을지 설명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공동선을 실천하자’고 하면서, 공동선이 무엇인지 개념 정의조차 하지 않고 마무리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근 나온 송용원 교수의 <하나님의 공동선>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공동선을 설명하는데, 세상 공동체와 그들이 추구하는 공동선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궁금해서 공부하던 것이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전부터 ‘공동선’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지만,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거의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책에서 인용한 자료들도 가톨릭 학자들 책이 많습니다.
또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 샬롬, 헤세드’ 같은 말을 쓰면 이해를 못하니, 정치철학적으로 ‘공동선 사회, 공공성’을 주장하자는 것입니다. ‘공동선 사회’는 ‘(개인) 권리 사회’와 대비되며, 압축해서 한 단어로 이해 가능한 용어입니다.”
-공동선 하면 거부반응도 있습니다. 부작용이 적지 않았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도 떠오르고요.
“공동선을 실천하자고 말씀드리면 첫 번째로 오는 거부반응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고, 두 번째가 ‘국가 전체주의’입니다. 공동선의 개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데, 결론적으로 저는 ‘기독교적 공동선’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직 ‘공동선’에 대한 개념 정의가 제대로 안 돼 있으니, 오해하기 쉽습니다. ‘개인의 인권이 침해되고 행복이 희생당하는 것인가’ 하고 반문하십니다. 특히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국가 전체주의’로 끼친 해악이 너무 컸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래서 공동선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공동선이란 최고선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주신 성품과 성령님의 힘으로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 역할을 하면서 그들도 우리 공동체의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념을 정의해서 하나님을 최고선(最高善·highest good)으로 두면, 각자에게 하나님 형상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 존엄과 가치가 보장되고, 그러면 인권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단 그 인권은 휴머니즘·개인주의가 말하는 인권이나 신을 배제한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천부인권(天賦人權)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모두 동등해집니다.
우리가 인권(人權)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우리가 말하는 인권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호주의적 인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 부여하신 인권입니다. 하나님과 연합을 통해 내가 완성되듯, 여러분도 이 연합에 참여해 완성되는 것이 공동선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나 ‘개인의 희생’이 아닌, 각자 한 사람의 요구까지 살필 수 있는 공동선의 개념을 아실 수 있습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말로 ‘공동선’을 사용하셨는데, 유일하게 ‘가인공동체, 아벨공동체’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알기 힘든 용어를 쓰셨습니다.
“공동체에 들어가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바로 ‘국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속 국가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오늘날까지 오랜 숙제였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과 세속 도시’를 공간적으로 구분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하늘 시민권을 가진 나그네와 거류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국가만능주의 시대인 오늘날 우리가 국민이지, 나그네나 거류민일 수 있을까요? 공동체를 이렇게 구분하면, 여러 논리적 난점이 생깁니다.
어거스틴은 세속의 경우 거룩하지 못한 더러운 것이니 버리고, 거룩하고 깨끗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는 이원론적 주장을 했습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같은 찬양을 많이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렇게는 기독교 문화를 세상에 전파시킬 수 없고, 말씀드린 ‘기독교의 사사화(私事化)’를 불러올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영역에 하나님 주권이 있다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이 나왔습니다. 세상과 교회는 하나이므로, 교회는 하나님에게 받은 주권을 갖고 세상에서 문화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세상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지금 같은 국가만능주의 시대에 악하고 잘못된 세상을 바꾸고자 해도, 바꿀 능력이 안 됩니다. 국회의원 절반 이상을 확보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공동체를 통일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도 구원받은 백성이 있지만, 그저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 들어와 있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는 아벨공동체와, 그렇지 않은 가인공동체로 나눠 봤습니다.
그랬더니 가정부터 교회, 지역사회와 국가까지 일관되게 볼 수 있는 기준이 생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탈고할 때까지 논리상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로고스서원 김기현 목사님도 ‘가인공동체와 아벨공동체’는 획기적이면서도 일관되게 세상과 교회를 볼 수 있는 좋은 구분법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