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 한 장면. ⓒ영화사 제공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신이 짊어지셨지만, 아버지께서 또한 이끌어 가신 것이다.

흔히들 예수님 입장에서만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려고 한다. 당연히 예수께서 구속 사역을 친히 ‘성취’하신 분이지만, 그 십자가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라고 말한다. 즉 십자가에 제물로 세우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 중심성과 함께 ‘하나님 주도성’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필자는 그러한 의미를 생생하게 깨달은 적이 있다. 19년 전 군 생활을 마치자마자, 학교 앞에 자취방을 구하려고 돌아다녔다.

제대하고 집에 와서 인사부터 해야 정상인데, 나는 골치 아픈 집구석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벌써 14년째 아버지가 몸져누워 계시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났다. 수요일 저녁에 너저분한 자취방을 정돈하고 있는데, 새어머니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응급실에 도착했다.

신음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내 동생이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그저 연명(延命)하는 상태였다. 갑자기 나는 하나님께 대들기 시작했다.

‘하나님, 도대체 뭐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전지전능하시다면서요? 지금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려 보시란 말입니다! 저한테는 왜 계속 이런 일들이 생기나요?

하나님, 이젠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지금까지의 고난으로도 족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 왜 자꾸만 이런 일들이 닥치는 겁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어디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이성을 잃고 하나님께 대드는 동안, 마침내 동생이 도착했다. 동생이 아버지의 두 눈을 감겨 드리자, 아버지의 심장은 멈춰섰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새 어머니는 또다시 우리 집에서 비운의 순간을 맞이하셨다. 그래서인지 더욱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셨다.

특히 할아버지가 유난히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셨다. 옆에 있는 의사들에게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 눈물로 읍소(泣訴)하셨다. 평소 점잖은 할아버지께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는 체면치레를 하지 않으셨다.

동생과 나 역시 패닉(panic) 상태로 멍하니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예전에는 잔소리하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는데, 막상 이런 순간이 되니까 한없는 슬픔이 솟구쳤다.

상주복을 입은 채로 꼬박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슬픔과 피곤에 지쳐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는 고난에 찌들대로 찌들어 버려, 내 영혼은 탈진한 듯했다. 앞으로도 내가 모를 고난의 순간들이 엄습해 올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졌다. 언제까지 나를 힘들게 하실지.

오전 내내 필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조문객이 찾아올 때만 제정신인 것처럼 있다가, 또 다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필자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애타게 슬퍼하는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면이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당신의 아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적 음성’으로 나를 무지하게 책망하시는 것 같았다.

‘율이 너는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을 때, 나의 찢어지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느냐? 네 할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나도 내 아들 예수의 죽음을 슬퍼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가는 예수를 나의 전능함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었지만, 바로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나의 심정을 네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느냐?’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듯한 그분의 음성 때문에, 내 영혼은 고꾸라지고 말았다. 당신의 아들을 단번에 살리실 수 있음에도 그대로 지켜보셔야 했던 그 심정.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라니!

이제껏 예수님의 고난에만 집중해서 십자가를 묵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 당신의 마음을 생생히 알려주셨다. 십자가의 현장을 위에서 바라보고 계셨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부친의 죽음을 통해 깨닫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시는 아버지의 슬픔은 내 죄를 그토록 증오하시는 당신의 심정이었다. 아들이 죽어야 내가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다!

이전보다 복음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성령님의 중보하심이 십자가의 의미에 모두 들어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십자가를 또다시 체험했다. 하루종일 쏟아지는 눈물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조문객들은 내가 부친의 죽음으로 슬퍼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더욱 슬퍼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밀려왔다. 하나님 앞에서 일삼던 모든 불평과 원망이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그 십자가는 1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더욱 그 십자가에 감격해서 살고 싶다.

권율
▲강의 후 기도하고 있는 권율 목사.
권율 목사

경북대 영어영문학과(B.A.)와 고려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청년들을 위한 사역에 힘쓰고 있다. SFC(학생신앙운동) 캠퍼스 사역 경험으로 청년연합수련회와 결혼예비학교 등을 섬기고 있다.

비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폭력 및 부모 이혼 등의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으로 인생이 개혁되는 체험을 했다. 성경과 교리에 관심이 컸는데, 연애하는 중에도 계속 그 불이 꺼지지 않았다. 현재 부산 세계로병원 원목(협력)으로 섬기면서 여러 모양으로 국내선교를 감당하는 중이며, 매년 선교지(몽골, 필리핀) 신학교 강사로도 섬기고 있다.

저서는 <올인원 사도신경>, <올인원 주기도문>, <올인원 십계명>, <연애 신학> 등이 있고, 역서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영한대조)>외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