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교회 백성훈
▲백성훈 목사.
시편 82편 (2)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정의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공의는 공평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그 의미가 동일합니다.

두 용어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공평’입니다. 어떤 차별이 없는 공평성이 그 핵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공의를 외치는 것과 이 세상이 정의를 외치는 것은 서로 동일한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세상에서 이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상징적인 현장이 어디일까요? 바로 법정입니다. 공정한 법의 집행은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편을 쓰면서 재판장에 임하신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1절)”.

‘신들의 모임’이라는 표현은 재판장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재판장들은 재판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재판장의 역할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때는 왕이 직접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왕이 임명한 재판장들이 재판을 담당하였습니다. 당시 왕은 법 위에 있었습니다. 왕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들의 재판 기준은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불의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재판장들이 불의한 재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시편에서의 재판장들은 바로 당시 불의한 왕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만약 왕이 정의로운데, 재판장들이 불의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왕은 재판장들을 치리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허락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명령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우리가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에 나온 재판장들이, 지금 시대에 과연 누구를 의미할까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세상의 법을 주관하는 재판장을 의미한다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나 자신도 해당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교회가 되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은 말씀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서 벗어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교회가 세워져가며 정의로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회가 말씀대로 산다면 세상의 정의를 행하게 됩니다. 두 개념이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2절)”.

바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셨습니다. 거기까지 가야 정의로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배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이웃을 섬기는 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첫째 계명을 주신 후에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을 주실 때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첫째와 둘째가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배가 중요하다고, 예배만 외치고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니, 예배당이 커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니, 예배당 시설도 좋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니, 교회로 모여야 합니다. 그런 노력 가운데 과연 우리 주변에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외면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살펴봄이 바로 정의로운 교회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입니다.

정의로운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습니다. 예배만 강조하고 이웃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듣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이기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는 이웃을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돌봄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열도록 만듭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6-7절)”.

하나님은 시인을 통해 경고합니다. 이런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당장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부유해진다 해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교회는 이웃을 돌보지 않고도 부흥할 수 있습니다.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아도 부흥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부흥이라는 결과 자체만 보고 결론을 내린다면, 많은 이단과 사이비 교회들, 심지어 다른 종교에서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놓치고도 부흥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장은 그 결과만 놓고 스스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회는 이 경고 앞에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며, 말씀 위에 서 있는지, 이웃을 돌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을 재판장이라 고백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8절)”.

세상 앞에 교회가 정의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권력자들에 대한 재판의 공정성을 놓고 많은 논란과 대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정치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서로의 입장에서 재판의 공정성을 말합니다. 서로가 ‘내로남불’을 외치며 비난합니다. 그 진실을 다 알 수 없기에, 답답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교회가 정치 성향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정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시편을 통해 선포하신 것처럼 교회는 이런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공정성을 놓고 치열하게 싸울 때, 교회를 바라보고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이 눈에 교회만큼은 정의의 모델로 보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기도를 요청하는 일이 생겨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는데, 어떻게 세상에 정의를 외치겠습니까? 교회 안에 불법과 타락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기도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의의 모델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그 정의의 열매를 들고 세상 앞에 정의를 외치는 날이 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교회를 찾으십니다.

한편으로 필자는 아직 그 정의를 실천하며 겸손히 살아가는 교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교회가 무너졌다고 말해도, 진리를 품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런 교회를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마지막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정의로운 교회를 드러내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그런 교회를 찾으시고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그 소망을 들고 지금 우리의 교회를 정의롭게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시편의 위로>, <시편의 소망>, <팀사역의 원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