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은 ‘예수님을 아들’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말한다. 이 ‘아들’과 ‘아버지’라는 단어는 사도 ‘요한’에 의해서만 188회(아들 52회, 아버지 136회) 언급됐는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반영한다.

주지하듯 ‘아들’과 ‘아버지’는 관계적 용어이고, 둘은 상호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누구든 ‘아버지’를 말할 땐 아들을 떠올리고, ‘아들’을 말할 때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들 없는 아버지’, ‘아버지 없는 아들’이란 없다.

곧 ‘성자와의 관계 속에 있지 않는 하나님’, ‘성부와의 관계 속에 있지 않은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자의 성육신(Incarnation) 전, 주전(B.C.) 8세기 구약의 복음서라 일컫는 ‘이사야서’도 신약만큼 아버지와 아들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리고 훨씬 그 이전, 인류 창조(창 1:26), 타락(창 3:22), 바벨 심판(창 11:7) 때에도 하나님을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을 연상시키는 복수로 호칭했다.

◈아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자와 일체(一體)로 존재하셨다(요 1:1-2).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품 속에 계셨다(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요 1:18).” (영어는 언제나 ‘영원불변의 사실’엔 현재형 시제를 쓴다. 여기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아들의 성육신 후, 그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성부께선 한시도 그를 홀로 두지 않으셨다(요 8:29).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요 10:38)” 계셨고, 승천 후엔 “하나님 보좌 우편(히 10:2, 벧전 3:22)”에 앉으셨다.

이렇게 일체로 존재하시는 ‘성부’와 ‘성자’는 서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성자’는 ‘성부’와 더불어, ‘성부’는 ‘성자’와 더불어서만 이해된다. ‘성자 따로 아버지 따로’ 혹은 ‘성부 따로 성자 따로’ 알려지는 법이 없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는 말씀은, 단지 ‘성자’가 ‘성부의 계시 수단’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부’는 ‘성자와 더불어’ 알려진다는 말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 11:27)”,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는 말씀 역시 단지 ‘아버지가 아들의 계시자’라는 말이 아니다. 아들과 하나이신 아버지만이 ‘그 자신과 더불어 아들을 알린다’는 말이다.

성자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의 음성과 그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 주신 것이다(요 3:16-17). 그 때 그곳엔 삼위 하나님이 계셨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삼위일체적으로 증거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현현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할 때 그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요 15:26)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된다(요 14:26).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이 말씀은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알 수 있다’는 명제를 확인시켜 준다.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소위 반(反) 삼위일체 이단들이 삼위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두 위(位)’로부터 일체(一體)로 나오시는 성령(요 15:26)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때문이다. ‘성자와 일체이신 성부’와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으로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는 하나로 연합되고(Herman Bavinck), 성도는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연합하고 교통한다(요 17:21)

◈아들을 위하시는 하나님

성부와 성자는 모든 일에 동사(同事)하셨다. 성부는 ‘천지 만물(요 1:3)’과 ‘인간(창 1:26, 고전 8:6)’을 ‘아들로 말미암아(요 1:3, by son)’ 창조하셨다. 사도 요한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다(요 1:3)”고 했다.

뿐만 아니다. 성부는 ‘아들을 위해(골 1:16, for son)’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 행위(요 3:35)’였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물을 통해 ‘성부’에게는 물론, 그가 만물을 돌린 ‘성자’에게도 마땅히 찬양을 돌려야 한다.

곧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롬 1:20)’과 신묘막측한 그의 ‘창조 솜씨(마 6:28-29)’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칭송하는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많은 찬송시들이 자연만물을 통해 ‘성자의 구속’을 찬미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말랐던 시냇물 흘러오네 이산과 저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들아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싸움과 죄악의 참혹한 땅에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아멘(찬 248장).”

“바다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나오라 예수 구원 하신다 모든 섬아 일어나 메아리쳐 울려라 복음 중에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바람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 하신다 기뻐하라 나라들 예수 구원 하신다 구원하는 소리를 산과 들에 전하라 우리들의 승전가 예수 구원하신다(찬 252장).”

어떤 신학자는 자신은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만물에서 적극적·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하려 한다고 했다. 예컨대 그는 나무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그 이유를 하나님이 나무를 만들지 않았다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신 21:23, 갈 3:13)”는 성경 말씀이 응해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친 김에 그의 방식대로 계속 한 번 진행해 보자. 양, 소, 비둘기 같은 정결한 짐승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을 것이고,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벧전 1:18-19)’을 설명할 수 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어린 양(요 1:29)’을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사 53:7)’로,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아 2:3)’를 그리스도의 탁월함으로, ‘사자(the Lion, 계 5:5)’와 ‘종려나무(요 12:13)’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로 묘사했다.

또한 하나님이 부정한 뱀, 돼지, 개, 까마귀 같은 짐승들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죄’, ‘거듭나지 못한 인간’, ‘사단(창 3:4, 계 12:9)’을 묘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의 ‘비사(figurative language)와 비유(parable)’를 집대성한 ‘Preaching from the Types and Metaphors of the Bible’의 저자 벤자민 크리치(Benjamin Keach)는 ‘자연 만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는 말은 만물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통일되고 존치됐다는 말이다. 곧 ‘만물의 창조에서부터 그것의 최종적인 경륜의 성취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속과 창조’는 연관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안식교(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安息敎)는 ‘구속’과 ‘창조’를 독립적인 ‘별개의 사건’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그들이 ‘구속의 완성일’인 ‘주일(主日)’보다 ‘창조 완성일’인 ‘안식일(安息日)’을 더 앞세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 만물’을 ‘하나님의 신성의 현현(롬 1:20)’으로 보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결짓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만물을 대할 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엡 1:23)”를 통해 대면한다. 그리스도 없는 불신자가 가질 수 없는 안목이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