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가 목회했던 취리히 모습.
▲츠빙글리가 목회했던 취리히의 모습.
3. 츠빙글리의 역병기와 하나님의 절대주권

츠빙글리(1484-1531)는 비엔나 대학을 졸업하고 바젤 대학교에서 인문주의 수학을 통해서 당대 기독교의 흐름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게 되었다. 1505년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고, 글라루스에서 십 년을 사역하면서 용병들의 사제가 되어 프랑코-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했다. 1515년에는 스위스 용병들의 희생이 컸던 마리냐뇨 전투 현장에 있었다. 그 후로 로마 가톨릭 귀족들이 교황청과 결탁해서 사리사욕을 취하던 용병제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가장 큰 도시 취리히 교회의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 헬라어 성경을 연구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라틴 교부들의 저술들을 참고하여 성경에 근거하는 기독교의 신앙과 실천을 제시하였다. 1519년 1월 1일부터 스위스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취리히 교회에서 신약성경을 차례로 설교하는 복음 선포자가 되었다.

“민주의 사제”라는 직책을 받아서 츠빙글리가 취임한 후 불과 몇 달이 지난 뒤, 1519년 8월에 흑사병이 도시 전체를 강습했다.

3.1. 성경에서 발견한 인생의 제한성

현대와 같은 의학적인 지식과 치료약이 없었기 때문에, “검은 색 죽음”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스위스 국민들을 공격했다. 취리히 시에서 9월 중순경에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최소한 당시 인구의 사분의 일이 희생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로마 가톨릭과의 싸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생명을 보전하려는 싸움을 해야만 되었다.

그 다음 해이던 1520년 봄에야 감염병이 줄어들었는데, 대략 7천 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 취리히 주에 살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다. 도시 안에 살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사망했다. 그 중에는 츠빙글리의 친동생 안드레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너무나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었다. 츠빙글리 자신도 환자들을 돕다가 감염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심지어 츠빙글리의 장남 윌리엄은 이 무렵에 사망한 것은 아니지만, 멀리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수학을 하던 중에 그 도시에 창궐했던 흑사병에 걸려서 사망했고, 스위스 바젤의 종교개혁자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아들 (Euzebe)도 죽었다.

전염병이 취리히 시에서 물러간 후, 츠빙글리는 1522년에 아들 한 명과 두 딸을 가진 과부 안나 (1487-1538)와 결혼했다. 안나와 츠빙글리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1525년에 태어난 장녀 레굴라는 취리히 시의 위대한 신학자 불링거의 양자 (Rudolf Gualther)와 결혼했는데, 훗날 그가 신학자들의 가업을 계승하여 목회자가 되어서 취리히 교회의 담임목사로 활약했다. 츠빙글리의 장남 윌리엄은 1526년에 태어났는데 15세가 되던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에 흑사병에 걸려서 사망했다. 이런 상황을 그 당시 칼빈이 현장에서 목격했었다. 셋째 아들 울리히는 1528년에 태어나서 43세에 이르러 1571년에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취리히에서 활동했다. 막내 아들은 1530년에 태어났으나 어려서 사망했다.

츠빙글리는 “흑사병에서 부르짖는 간구” (Pestlied)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창조주이자 구원의 하나님께 처절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열심히,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매달리다가, 1519년 9월에 흑사병에 걸렸다. 그 이전에 몇 달 동안, 열정적으로 종교개혁을 추진하자고 외쳤던 설교자가 갑자기 무력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라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했다. 그가 흑사병과 싸우면서 지은 간구들은 처절한 기도문 형식으로 남았다.

도와주시옵소서, 주 하나님, 이 고통 가운데서 도움을 주시옵소서!
제 생각으로는 죽음이 문 앞에 있습니다. 내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여, 당신께서는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당신께, 제가 부르짖나이다: 만일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저를 공격하고 있는 이것들을 떼어내 주옵소서.
아니면, 한 시간이라도 안식을 주시든지, 평안을 주옵소서.

하오나, 나의 날들 가운데서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그대로 하시옵소서.
당신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든지, 제게는 지나친 것이 아니옵나이다.
지으시든지, 아니면 깨뜨리든지, 나는 당신이 빚으신 그릇이옵나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빚어진 그릇이라는 비유가 로마서 9장 19절에서부터 등장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롬 9:20).

다시 말하면, 츠빙글리는 성경 안에서 자신의 한계와 위치를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의 주권자이심을 재인식했다. 지독한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 츠빙글리는 매우 중요한 변화를 겪었는데, 특히 그의 성경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츠빙글리는 그동안에 한 사람의 인문주의자로서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깊이 받아왔었는데, 진실로 성경을 다시 인식하여 종교개혁자로 나섰다는 의미이다. 츠빙글리는 당시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접근하고 있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서 결정적으로 두드러진 점은 성경의 절대 권위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로마 가톨릭의 모든 오류를 벗어나게 안목을 열어준 것은 깊은 성경연구에서 나온 것들이다. 츠빙글리가 1520년부터 계속해서 거듭되는 논쟁들과 토론에서 빛나는 종교개혁의 안목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압도당하는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1519년 1월 1일부터 마태복음을 강해설교하게 되었지만, 사실 그의 주된 내용들은 에라스무스와 같아서, 종교개혁을 일종의 교육의 과정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 2천여 명 안팎에 이르고 있어서, 계속해서 계몽된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는 기독교 철학체계를 발전시켰는데, 도덕적 윤리적 중생과 생활의 개혁이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의 초기 목회에서 개혁사상으로 제시했던 도덕적 갱신과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성공을 하려면 교육적인 식견을 높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작동하도록 교육을 실시하면 타락하고 죄가 많은 인간을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에라스무스가 제시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1524년에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벌어진 자유의지론 논쟁을 알게 되었다. 결국 츠빙글리는 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죄악성에 하나님의 절대성을 다시 파악하게 되었다.

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