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교회 등 전국 교회 주일예배 온라인으로 전환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 (본 사진은 해당 칼럼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사랑의교회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코로나19(바이러스 감염증) 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분들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축복합니다.

1.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점점 확산되면서 교회들의 고민도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아닐까요?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2. 예배는 당연히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 해도, 예배를 안 드린다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특히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부터 말씀하신 시간의 질서를 다스리는 훈련이고, 창조의 리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어디서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교회의 모형인 성막을 통해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모든 봉헌물까지 지정된 곳에 드리는 것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교회는 정해진 곳에 부름받은 성도들이 일주일을 살면서 다시 모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장소의 훈련 또한 너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기 쉬움을 하나님은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4. 그러나 그 훈련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훈련의 목적은 훈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훈련의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먼저 안식일의 개념에 대해서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 간단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의 참된 개념을 확실하게 설명하셨거든요.

마태복음 12장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안식일에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먹습니다. 그때 주님은 “성전보다 큰 자가 바로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심으로, 교회의 주인인 예수, 주인이 명하시는 것은 자비이며, 안식일도 그렇게 지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지내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내는 것인가도 궁금했겠지요. 마른 손 가진 자를 안식일에 예수님은 고치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마 12:12)” 하십니다.

5. 좀 더 자세히, 우리는 가끔 도대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 앞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주님은 이미 정답을 주셨습니다. 왜 그런 고민을 했었는지도 지적하십니다. 정말 기가 막힙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여인이 우물가로 가까이 갑니다. 그곳은 늘 그 여인 혼자 독차지하던 정오의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물 좀 다오.”

목마른 인생을 아시는 여인이 무얼 구해야 할지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구하셨습니다.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물동이를 뒤로 감추고 맙니다. 물동이는 자신의 생명줄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인에게 정말 영과 진리의 예배보다 형식적인 장소가 중요했던 것은, 주님앞에서도 물동이를 감추고 소유하려 했던, 내려놓지 못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6.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 앞에, 여인은 본질적인 질문을 토로합니다.

“예배는 어디서 드려야 합니까, 주님?” 장소에 대한 질문을 하는 여인에게 주님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예배할 때는 곧 이때”라면서, 공간이 아닌 시간을 강조하십니다.

예배의 행위에 대해서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그 말씀 앞에 드디어, 살아오면서 늘 뒤에 감춰두던 물동이를 던져 버립니다.

물동이는 여인에게 목숨줄이었습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물 좀 달라는 낯선 남자에게 이것을 빼앗길까 두려웠습니다.

7.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 19로 인해 주중 모임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여서 드리는 주일예배를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도 모른 채 뒤로 감춰둔 물동이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왠지 이것마저 빼앗기면 다 뺏길 것 같은 마음이 없을까요. 제게는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모여서 드리는 주일예배만큼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8.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이유를 가져와도,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신학적 교리를 가져와도, 안식일의 정신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공간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해도, 예배는 주님과 만나는 그 때일 뿐입니다. 시간은 공간에 잠식당하지 않습니다.

9. 야곱이 집에서 쫓겨나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거주하고 있던 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돌아가야 할 출생지로 돌아가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창31:13)”.

그 말을 들은 야곱은 아버지집 이삭에게 가야 하는가보다 합니다(18절). 그러나 특정한 그 장소, 편안한 집을 떠올린 야곱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갈등의 원인 에서를 만나야 했고, 그 문제가 해결되자 또 다시 편안한 장소인 세겜에 거주하고 맙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 말하십니다. 이번에는 아예 정확한 장소를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돌아가서 거주하라(창 35:1)”.

그러니까 야곱이 애초에 목적지를 잘못 정한 것입니다. 목적이 잘못된 삶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편안한 아버지 집이 목적지였던 야곱이 더욱 편안한 세겜에서 머무르려 했던 것입니다.

10. 그러면 벧엘은 어디일까요?

벧엘은 그 편안한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길바닥에서 난생 처음 외롭고 춥고 배고프고 억울하며 깜깜한 한 밤중에 하나님께서 만나주셨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고 ,내가 너를 지키고, 내가 너를 돌아오게 하고 내가 너를 떠나지 않는다 언약하셨습니다(창 28:13-15). 그래서 그곳에서 야곱이 길바닥에 돌을 세우고 하나님의 집이라 명하며 십일조를 약속한 것입니다(창 28:22).

벧엘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네가 어디있건 너와 함께하고 지키고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그 약속이 살아있는 어디든, 그곳은 벧엘이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 원인인 형제 에서와의 갈등까지 돌아오는 길에 해결시켜 주십니다. 따라서 벧엘은 형제 관계가 회복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벧엘을 되새기게 하면서, 늘 야곱에게 ‘형 에서’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오늘날 우리는 과연 벧엘의 정신으로 교회에 모이고 있는가 점검해야합니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꾸미는데 수없이 많은 비용을 들이고, 사람 수를 늘리기 위해 본질을 놓친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고, 교회를 비판하는 세상을 향해 날선 칼로 반박하거나 도망가 버리는 야곱이 아니라, 오히려 절뚝거리는 몸으로 형 에서를 향해 가장 앞장서서 오체투지를 하며 무릎꿇었던 야곱의 걸어가는 길이 벧엘을 향하는 길이라면, 지금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아주 중요한 벧엘의 정신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비록 흩어진다 할지라도 그 중심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것이요. 언제나 함께할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은 다시 반드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그때는 오히려 세상에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과 하나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을 믿습니다.

12. 많은 중대형교회들이 오는 주일 예배를 온라인 예배로 대체하는 결정을 했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기 힘든 대다수 교회들의 고민 또한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대다수 교회들은 이런 결정을 하는 뉴스를 보면서 “대형교회니까 가능하지…”라고 속앓이를 하십니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온라인 예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교회들도 많고, 이를 갑자기 전환한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13. 저희 교회의 고민도 그와 같습니다.

저희도 대형교회가 아닌 지하의 작은 교회입니다. 시설이나 교회 건물이 없고, 건물을 위한 비용도 따로 책정되지 않을 뿐더러 몇만 원 사용하는 것도 대다수 재정부의 허락을 받고 사용합니다.

온라인 방송 시스템이나 카메라 촬영도 없는 상태입니다. 누구 하나 이것을 경험한 자나 전문가도 없습니다. 당장 방송용 카메라나 시스템을 설치하자니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어갑니다. 온갖 소독기와 비상용마스크를 준비하는데도 많은 비용이 들어가니, 그렇게 큰 비용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끝에 재정부의 허락을 받아 약 20만원 정도의 웹카메라를 구입했습니다.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일예배에 대한 세가지 플랜을 계획했습니다. 사역자와 인도자와 반주자만 나와 드리는 온라인 생중계 예배, 그것이 안되면 사전 녹화방송 예배, 영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의 예배순서로 축약하여 기도와 말씀만 있는 예배로 드릴 생각입니다.

14. 어떤 분들은 재정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드리면 어떻게 헌금이 모이고 교회가 운영되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대다수 앞에서는 하지 못하고, 뒤에서 핵심 관계자들끼리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먼저 그 물동이를 이제 내려놓으십시다. 뒤로 감춰둔 물동이를 내려놓고 바라봐야, 시간이 공간에 잠식당하지 않습니다.

15.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런 감염 의심자나 확진자가 없고, 주일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할 시스템도 없고 재정도 열악하며, 사람이 100명도 안되는 교회이지만, 왜 주일예배를 중단해야 할까요?

이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이 땅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모든 분들이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팽배한 모든 분들까지도 본래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확진자가 없어도 모임 자체가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모이는 모습만으로도 우리 형제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물동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복원시키시고 이 땅을 회복시킬 것을 저는 믿습니다.

16. 더불어 이 편지를 받으시는 목회자나 관계자분들께, 이와 같은 벧엘의 길로 함께 걸어가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기에 그동안의 ‘끼리끼리됨’을 반성하고, 주님과 홀로 대면하는 야곱의 참된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상 뒤에 물동이를 감춰둔 채 주님께 내려놓지 못했던 소유의 사람이었음을 회개합시다.

우리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본래 우리의 형제였음을 망각한 채, 그들을 위해 어떤 시간도 공간도, 아니 작은 형식도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고집불통 야곱이었음을 회개하십시다.

그 결단을 하고 함께 길을 걷는 여러분들에게 야곱이 가장 춥고 외롭고 억울한 내몰림의 상황에 길바닥에서 만났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될 것을 믿습니다. 다시 두 눈으로 만나 예배할 날까지 이 땅 모두의 아픔이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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