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에서 ‘온유(meekness)’만큼 오해되는 단어도 없습니다. 특히 ‘인군(仁君, a benevolent sovereign)’이라는 단어가 있을 만큼 ‘어짐(仁, benevolent)’이 임금의 최고 덕목이고 인간 최고의 가치로 간주되는 동양 문화에서는 더욱 그리합니다.

따라서 성경 최고의 덕목으로 보이는 ‘온유’는 동양 최고의 덕목인 ’어짐‘과 곧잘 동일시됩니다. 이런 곡해로 인해 ‘온유’ 하면 누가 한 대 때려도 씩 웃어넘기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을 떠 올립니다.

만일 ‘온유’가 단지 ’어짐(賢, benevolence)’, ‘유순(mildness)’ 같은 자연적 품성이라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오다 산 아래서 금송아지 우상놀음을 본 후 돌판을 박살내고(출 32:19), 광야 여정에서 물 때문에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며 반석을 두 번 내려친 모세는(민 20:2-11) 결코 온유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일컬어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민 12:3)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온유’는 그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유순할(mild)’ 필요는 있습니다. 특히 복음 사역자나 영적 지도자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지도자 모세의 경우에서 보았듯, 사역자들이 거칠고 유순하지 못하면 복음 사역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비본질인 성품’의 결함으로 인해 ‘본질적인 복음사역’을 그르칠 순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는 말씀은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이들의(고후 5:19) 명심 사항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성품을 성인 군자처럼 갈고 닦는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라는 찬송가사 그대로입니다.

◈온유는 (본성에는 없는) 거듭난 사람의 속성

성경이 말하는 ‘온유(meekness)’는 타고난 자연인의 성품이나 인격 수양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타고난 성품은 거칠지만 복음 앞에서는 한없이 유순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백전백승이요, 누구에게도 굴복해 본 적이 없는 용맹한 그였지만,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는 어린아이같이 온유했습니다. 밧세바와 우리아에 대한 그의 죄를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 자복하고 엎드러졌습니다(삼하 12:1-13).

반면에 천성은 말할 수 없이 부드럽지만 복음 앞에서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는 굽신굽신하며 한없이 유순해보이지만, 복음 앞에서는 목을 뻣뻣이 합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등장하는 길가와 돌짝밭 같은 마음(마 13:19-21), 이사야가 말한 목이 곧은 ‘완악한 백성(마 13:15)’이 이들입니다. ‘천성의 유순함’이 ‘신앙적 온유함’과는 별개임을 가르치는 말씀들입니다.

‘온유(meekness)’는 하나님이 사람의 의지를 성령에 정복시켜, ‘복음에 복종케 한’ 거듭남의 산물입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곧 성령이 복음에 복종하도록 마음의 완고함을 깨뜨린 결과입니다(고후 10:4-5).

풀어 말하면, ‘온유한 사람’은 율법의 정죄를 받아 자신은 멸망받을 죄인이라는 생각에 절망하여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갈 3:24)이라고 했습니다.

그 상징 같은 사건이, 바울과 실라를 파수(把守)하던 간수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목도하고 떨며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며 부르짖었을 때, 사도들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26-31)”고 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절망할 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자기가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부서진 마음을 갖지 않은 자는 구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완고한 마음은 가나안(천국) 길목을 막고 있는 견고한 여리고성과 같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이 가능했듯, 여리고 같은 완고한 마음이 깨어질 때만 복음을 영접하여 천국(가나안) 입성이 가능해집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는 말씀은 불신앙의 ‘완고한’ 마음이 깨어져 복음에 복종하는 ‘온유한’ 마음이 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불신앙의 완악함’을 말한 것은(마 13:15, 행 28:27) ‘신앙의 온유함’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도 야고보에게 ‘온유함’은 ‘복음 수용’ 곧 ‘믿음’이었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베드로에게도 믿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온유함’, 곧 ‘복음의 순종’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벧전 1:2)”. 반면 ‘불신앙’은 ‘복음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롬 10:16)”.

◈온유한 자가 받는 땅의 기업

여기서 ‘땅’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신 26:9) 영원한 안식의 처소(히 3:18; 4:8)인 가나안은 ‘천국’을 예표했고, 신약에서는 천국이 ‘가나안’을 연상시키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벧후 3:13; 계 21:1)’으로 상징화됐습니다. 따라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복음을 영접하는 자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온유한 자’인 성도가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들이 현실적으로 세상의 토지, 부, 권세를 차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칼빈(John Calvin)이 말한 바 곧 구원과 관련하여 성도가 “하나님의 은밀 섭리(Secret Providence of God)”의 ‘주인공’이 된다는 뜻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현실적으로는 성도들이 불신자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기도 하고, 때론 하나님의 징계로서의 그들의 몽둥이 세례를 받기도 하여(사 10:5, 24), 일견 불신자들이 땅의 주인처럼 보이나, 구원의 ‘은밀 섭리(Secret Providence)’의 주인공인 성도들이 땅의 진짜 주인입니다. 이는 불신자들의 득세와 광포는 성도들의 구원을 이루고 믿음을 연단시키는 ‘은밀 섭리’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순교 역시 일견 성도에 대한 마귀와 악인의 승리인 것 같으나(계 2:13), 사실은 성도로 하여금 ‘지고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밀 섭리’의 승리입니다. 이 ‘은밀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도 동일하게 적용됐습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이 마귀와 악인들의 승리로 보이게 하나, 오히려 그것을 통해 그가 택자의 ‘주와 그리스도(행 2:36)’, ‘임금과 구주’가 되게 했습니다(행 5:30-31).

사단의 충동질로 시작된 욥의 고난(욥1:12) 역시 사단의 승리로 보이나, 그것을 통해 그의 믿음이 정금같이 되는(욥 23:10) ‘은밀한 성화 경륜(secret providence of sanctification)’을 성취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22)”고 한 것도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만물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의 구원과 성화와 관련한 ‘하나님의 은밀 섭리(Secret Providence of God)’의 주인공됨을 말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의 구현입니다.

세상만사가 궁극적으로 성도의 구원과 성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은밀 섭리’에 기여하니, 실제적인 만물의 주인이 성도인 것입니다. 성경이 세상 나라들을 성도들의 속량물이 되게 했다는 것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사 43:3-4).

오늘도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성도들을 위해 나라들을 복종시키고(시 47:3-4) 동원하시기도 합니다(렘 5:15). 3년 6개월간 하늘 문을 열기도 닫기도 하시며(약 5:17-1), 풍랑을 일으키고 물고기를 보내시기도 하십니다(욘 1:4-17).

결론적으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은 복음을 영접하는 자에게 약속된 ‘천국의 복’,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밀 섭리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명실공히 성도가 땅의 주인 되는 때가 실제로 도래하기도 합니다. 곧 그리스도 재림 후,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세상을 지배하는 ‘천년 왕국’ 시대입니다(계 20:6). 그 때에 비로소 성도들의 진면목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