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목사는 책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나이 서른이면 신학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져야 한다”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세상과 직업, 신앙과 인생관들에 관하여 생각의 구도들이 전혀 정리가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사회생활도 제법 했다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일관성 있는 하나의 관점을 갖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고 했다. ⓒ열린교회 제공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가 ‘서른 즈음에’ 흔들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서른통>을 펴냈다. 부제는 ‘결혼과 직장 때문에 고달픈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통한 이야기’. 그는 책을 통해 “교회를 개척해서 2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교인들을 심방하면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를 해마다 새롭게 깨닫고 있다”며 “성도들에게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괴리는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과 받지 못하는 것 사이의 괴리 만큼이나 중차대하고도 현실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이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격차를 줄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선교적인 삶으로 흘려보내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 될 것”이라 전하고 있다.

책에서 김남준 목사는 직업을 놓고 소명과 선택, 직장에서의 윤리적 갈등과 신앙적 갈등을, 결혼에 대해선 배우자 선택과 연애, 신앙과 출산, 고부간 갈등, 독신과 교회 내 연애 등에 대해 최대한 현실적으로 조언하면서, 30대 뿐 아니라 직장과 결혼 생활을 하는 장년 성도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에게 <서른통>을 쓰게 된 계기를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20대도, 40대도 아닌 30대를 위해 특별히 글을 쓰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30대는 취업과 결혼이라는, 인생에 급격한 환경 변화가 찾아오는 시기입니다. 먼저 그간 부모에 의존해서 살다가 사회에 나가 직업을 갖고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결혼인데, 연애야 10대도 20대도 할 수 있지만 30대는 결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요. 두 사람에게 사랑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게 결혼이었는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에 많이 세뇌돼 버렸습니다. ‘현실적’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준비가 필요해졌고, 결혼이 늦어졌습니다.

또다른 이유는 직장과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그 간극 때문에 20대 후반에서 30대 청년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인생의 커다란 변화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기독교적인 답변을 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신앙심이 깊고 교리적·신학적으로 잘 정리돼 있으며 열렬히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굳이 이런 책이 필요치 않을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만 잘 전해도 놀랍게 적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30대가 훨씬 많지요. 그들은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들어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완전히 따로 노는, 신앙생활의 피상성이 나타나지요. 이것이 깊어지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저항감도 심해집니다. 그런 이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서 30대 젊은이 30명과 3시간씩 3차례 만났습니다. 그 때 토론하고 답변한 내용들을 토대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듣는 젊은이들에게도 신앙적 고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좌담회를 하시면서 ‘우리 교회 청년들이 이런 것을 고민하나’ 하고 놀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신앙심이 깊은 이들은 적용도 굉장히 빨라요. 거기에 첫째 원인이 있겠고, 둘째로는 결국 인문학적 토대가 너무 부족해서 말씀에 대한 적응력도 떨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 명절에 쉬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포함해 젊은이들 사이에 뜨고 있는 몇몇 철학자와 작가들의 책과 강연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강연에 앉아있던 엘리트들의 질문이 굉장히 유치했어요. ‘자신이 전문직 종사자라면서 어쩜 저렇게 수준 낮은 질문을 할까, 저런 것에 대한 해답도 없이 저 나이가 들었을까’ 하고 놀랐습니다. 비슷한 현상들이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나’ 하는 기본적 고민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답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셋째로는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진공 상태에 있을 수 없고, 결국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들과 소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딜 가도 소리는 들리고 냄새는 나고 감촉은 느껴지고 눈에 보입니다. 이것과 단절될 수는 없어요. 이런 사물들과의 접촉은 그나마 객관적이지만, 사람들과는 ‘도덕적’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 자체가 거대한 자본주의와 쾌락주의로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살기 때문에,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왜 나를 창조하셨으며,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야 올바른가’ 하는 근원적 고민들을 많이 해야 성경의 답이 커다란 감격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고민들이 충분치 못하면, 답을 얻는다 해도 자신이 찾아낸 것과 같은 깊이로 다가오지 못하지요. 이런 원인들 때문에 가장 쉬운 문제들에도 답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2-3년 전 <개념없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철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개념 없다’, 즉 눈치 없고 보편적이지 못한 인간이라는 관점이었는데, 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말로는 개혁신학 한다더니, 결국 자기계발서로 가는구나’ 하구요. 하지만 한쪽에서는 ‘그렇게 신학 책을 써 오던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책을 썼겠나’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말은 믿을 만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작품들을 계속 써 나가려 합니다. <서른통>에 이어 훨씬 깊이 다루고 싶은 주제가 중년에 대한 부분이고, 여력이 생기면 문화·소비·육체·성(性)·직업 등 주제별로 다루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기독교적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의 격차를 훨씬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김남준 목사는 책에서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며 “결혼은 그 어려운 과업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상대방을 완성해 갈 뿐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자신도 완성되어 간다”고 했다. ⓒ열린교회 제공

-말씀하셨듯 요즘 상담이나 멘토, 힐링이 유행이지만, 신앙이란 실패하고 아프고 좌절해 가면서 스스로 길을 찾는 것일 텐데요.

“그래서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이 내려준 답에는 힘이 없다.’ 그것은 마치 진통제 같습니다. 몸이 너무 아프면 진통제라도 먹어야지요. 하지만 진통제는 병이라는 ‘현상’을 다소 경감시켜 주거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뿐, 질병의 근원을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성경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스스로 풀어가고 내면화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분들이 독서를 추천하지만, 사색과 반성이 따르지 않는 독서는 번뇌를 더할 뿐, 우리 삶을 고치질 못합니다. 깨를 예로 들면, 예전에는 참깨를 짜기 전에 볶아서 틀에 집어넣고 돌을 얹어 압축(프레스)을 했습니다. 여기서 독서가 볶은 깨라면, 사유(思惟)는 ‘프레스’입니다. 읽은 내용을 사유하고 반성하면서 그 지식이 기름이 되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독서도 하지 않거니와 사유는 더더욱 하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기기들이지요. 이런 것들을 가까이 하면서 사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할 때 쓰지 않을 순 없겠지만, 거기에 몰입되거나 계속 자극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 문제입니다. 자기 고민과 탐구가 없어지지요. 가장 나쁜 것이 SNS(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입니다. ‘쪼가리된 남의 이야기’들을 쉽게 쉽게 접하면서 그것만으로 정보를 섭취하는…, 그러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요. 요즘 아이들은 암기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터넷에 다 있다고 한답니다. 이런 것들이 깊이 있는 사유의 현저한 방해물들입니다.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도, 결국 <서른통>을 쓰셨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몇몇 철학서와 강의들을 접하면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먼저는 그 영향력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펑펑 울어요(웃음). 교회에서는 문제 해결을 못하던 크리스천들이 거기로 가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답에 놀랍게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은 절대로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으로 봤을 때 답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비록 제가 불신자라도, 저 대답대로 산다 해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서로 다른 답이 나오는 걸 보면, 그들의 경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인생을 바라보는 상담가의 관점이 따로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지만,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즘(humanism), 즉 사람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은 우리 기독교와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지요. 다른 세계관과 다른 인생관 속에 있으니, 다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무신론자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 옳고 그름의 문제는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과연 그렇게 했을 때 행복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그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답을 놓고 저들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의 답을 교회가 솔직하고 분명하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과 사상이 탄탄하고 견고할수록, 대답은 아주 실제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저는 항상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론과 사상 없이, 실제적인 것들을 계속 내놓는다면 그러한 결론들을 따라간다 해도 자기계발이나 처세술을 넘어서긴 힘들 것입니다.

자기계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환영받는 것이 자기계발입니다. 일본과 우리나라, 중국 이쪽부터 시작해서 미국까지 자기계발 분야가 굉장히 강하지만, 프랑스나 독일 등 구라파는 좀 덜합니다. 그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계발에 열중하는데, 그 계발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자기계발은 자본주의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본주의적이고 감각적인 시대의 기준에 맞춰, 모든 사람들이 탐내는 상품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결국 그것이 자기계발의 초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기준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은 각 사람을 어떤 사람은 지적(知的)으로, 다른 사람은 용모에서, 또 어떤 사람은 비록 그렇지 못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탁월하게 창조하셨고, 누구나 쓸모 있는 그릇들로 창조하신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계발로 가자는 이야기의 맥락으로 <서른통>을 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들을, 삶에 실질적으로 어떻게 접목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이를 풀어내 보여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우리의 고민이 있어야 하고, <서른통>이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는 책에서 “안 될 것 같으니 포기하고, 힘들 것 같아서 접고, 어려울 것 같아서 시작도 안 하는 것은 꿈을 가진 젊은이다운 태도가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 앞에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이 가질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며 “저는 오늘날 경제적 어려움, 좁은 취업문, 부와 가난이 세습되는 닫힌 사회구조 등으로 젊은이다운 패기가 꺾였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삶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고 본다”고 했다. ⓒ열린교회 제공

-이런 작업들이 물론 필요하지만, 사회나 교회나 거대담론이 사라져 버린 것 아닌가요. 목사님 같은 분이 이런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해 주셔야 할 텐데….

“제시하면 뭘 해요, 읽지를 않는데(웃음).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2012)>이야말로 거대담론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다 좋은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구입합니다. 그러나 읽지는 않습니다. <서른통>에 나온 이야기들도 결국 그 책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 책을 비롯해서, <깊이 읽는 주기도문(2013)> 등의 책에 이미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요.”

-네 알겠습니다. 결국 상담이나 힐링 프로그램은 고통받는 젊은이들의 호소 때문에 생겨났을 텐데요, 예전에 비해 너무 나약해진 것 아닌가 하는 견해도 적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꿈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보자면, 소위 계시적인 꿈과 비전이 있고 자기계발적·자기암시적 비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던 시절 ‘종교 지도자’가 되려 했던 것은 자기계발적 비전이었지요. 그러나 요셉이 꾼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은 달라고 해서 취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따라 살겠다는 맥락에서의 꿈이 아니라, 자신의 희망사항인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최고의 욕구’를 자기 실현이라고 했듯, ‘너 자신을 마음껏, 너의 꿈을 마음껏 펼쳐라, 그것이 너의 진짜 행복이다’ 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데, 그런 신앙을 배제한 인간 중심적 꿈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은혜를 받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왜 만드셨을까? 왜 사랑하실까? 왜 나를 구원하셨을까?’ 하는 자각이 생기고, 그 자각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기서 어떠한 가치를 발견했다면, 도전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성취하려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소명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대가를 지불하지 않습니까? 대가 없이 그냥 얻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첫째로 오늘날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왜 공무원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가 이 회사에 다녀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기술을 익혀야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지요.

둘째로, 그것이 분명히 정해졌으면 힘을 내서 이를 이루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런데, 도달하기 힘드니 조금 하다 포기합니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아시지요? 조금 힘들면 ‘내 것이 아닌가봐’, ‘해 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 하고 툭 쳐 버립니다. 삶에서 직면하는 끊임없는 여러 어려움 앞에 그런 태도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얻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많이 나약해졌다는데, 신체적으로는 우리가 학생 시절이던 40-50년 전에 비해 훨씬 잘 먹어서 기골이 장대합니다. 오히려 비만을 걱정해야 하지요. 결국 나약해졌다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입니다. 권투선수들이 90kg 나가는 것과 밥 먹고 매일 노는 사람이 90kg 나가는 것은, 같은 체중이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결국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육체적으로 강해지려면 계속 운동을 해야 하듯, 정신적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지성을 계속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을 계속 참아내면서, 끊임없이 견뎌내면서 오는 내적인 힘의 축적이 있어야 합니다. 결핍 속에 살던 예전에 비해 가난을 견디고 시련을 이기려 몸부림치던 정신운동의 근력이 너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은 너무 풍요한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신간 <서른통>을 짚어가며 질문에 답하고 있는 김남준 목사. 책 옆에 놓인 ‘피처폰’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아직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열린교회 제공

다음으로는 지성적으로 헌신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한글을 떼고 나면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기본으로 읽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보듯, 중학교에선 모두 소설책을 갖고 다녔어요. 여학생들을 만나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이런 걸 이야기해야 ‘말발’이 섰습니다(웃음). 한 마디로 (그런 책들을 읽지 않으면) 체면이 서질 않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대신 감각적인 것들만 막 들어옵니다. 영화에 푹 빠진 사람들이 책을 읽겠습니까? 책이 주는 만족이 3D, 4D 영화의 감각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점점 감각적인 것으로 자신을 채우다 보니 인내하면서 책을 읽기가 더 힘듭니다. 어려운 책은 더더욱 읽을 수 없어요.

이런 영향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생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양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설교가 ‘오프라 윈프리 쇼’처럼 감동적이길 원하지, 깊이가 있어 무언가 나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새롭게 말씀으로 빚어주길 원하진 않습니다. 결국 그러니 깊어질 수가 없지요. 한 신학자는 ‘기독교 신앙은 철저한 이론과 사상의 체계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쉽게 이단으로 흐르거나 부패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문제점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결책이 있을까요.

“쉽지는 않겠지요. 교회와 사회가 따로 노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6일간 사회에서 놀던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 왔다가, 끝나면 다시 사회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사회를 한 번에 바꿀 순 없습니다. 서서히 바뀌어야 할 텐데, 결국 교육 전반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열심히 공부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좋은 대학 가려고’라고 합니다. 중학생들은 ‘좋은 고등학교’라고 답하지요. 강남엘 가면 5세부터 서울대학교 가는 프로그램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대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지만, 직장을 다니기 위해, 삼성에 들어가고 싶어서일 겁니다. 삼성 직무평가에 몇십만명이 몰리고, 이를 위한 과외 수강생만 20만여명이라 시장이 형성돼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앞에 쓰인 ‘VERITAS LUX MEA(베리타스 룩스 메아·진리는 나의 빛)’, 이것이 지금 통합니까? 진리를 인정이나 합니까?

이런 것들이 잘못됐다는 판단 없이 똑같이 살아가니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똑같아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경쟁을 해서 살아남는 사람은 누리고 패배한 사람들은 루저(loser)가 되는 사회구조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번에, 혁명적으로 바꿀 수는 없더라도 말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인생관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거짓말이 너무 싫고, 정직하게 살아야겠다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수많은 저항이 생겨납니다. 자신을 정직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정직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그 반대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갈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삶은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떠한 주관을 갖고 살아가려면, 결국 그렇지 않은 것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도 우리의 삶을 ‘씨름’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팔레’인데, 그리스 때부터 있던 경기로 천 하나 감은 맨주먹을 갖고 한 쪽이 죽거나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무한 매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결국 해결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 시작은 교회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차근차근 가르쳐야지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끊임없이 독서하고 교리를 배우고 학문을 탐구하면서, 아까 말씀드린대로 지식과 사색을 겸비해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