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님(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이 3월 13일 조국 평화통일 기원 전주지역 연합성회에서 전한 설교문을 본인의 동의하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부족한 사람을 귀한 기도회에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저녁 “긍휼과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라는 좀 긴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저는 11살 때 평양을 떠나 38선을 넘어서 서울로 왔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서 목사가 되기 위해서, 11살 때 부모님을 북한에 남겨 두고 평양을 떠나 혼자서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저는 1948년 8월 어느 날 캄캄한 밤에 어른들 몇 사람들과 함께 38선을 넘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위협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3, 40분 동안 파밭을 달리고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며 남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결국 남한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부모님과 고향을 떠난 외로운 나그네의 생활을 한평생 살았습니다. 때로는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했습니다. 제가 평양을 떠난 지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감옥에 계시던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나 외로운 나그네의 생활을 하는 저를 하나님께서는 무척 많이 축복해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정적으로 학문적으로 사역적으로 저를 무척 많이 축복해주셨습니다. 한 평생 목회 사역과 교수 사역과 선교 사역과 구제 사역 등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저의 삶을 하나님께서 무척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슬픔과 아픔이 시간이 지나면서 보석이 된다는 진리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으로 간단하게 줄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긍휼과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고 그 다음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단어들 중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보다 더 귀중하고 더 축복되고 더 아름다운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이렇게 묘사하며 간구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 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저가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4, 5).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아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를 하나 선택한다면 “긍휼”이란 단어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즉 “락흐밈”과 “케세드”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란 단어 안에는 “용서”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가슴과 몸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사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간음 현장에 잡힌 창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과 배신자 베드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사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그리고 주님께서 귀하게 보신 제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드린 종교적인 제사가 아니고 어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베푼 “긍휼”의 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으니 네 의견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3-37).

기독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도 되고 안 베풀어도 되는 선택적이고 상대적인 덕목으로 간주하지 않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베풀어야 하는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덕목으로 간주합니다. 골 3:12-14을 읽습니다. 여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란 단어들이 차례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엡 4:32에는 “긍휼”과 “용서”라는 말이 차례로 나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마6: 14, 15은 용서가 절대적이고 필수적임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 15). 그리고 “용서”는 몇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무한대로 하여야 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2). 예수님께서는 또한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 이웃에게 국한하지 않고 원수에게까지 미쳐야 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4,45).

사도 바울은 본래 자기의 종교적인 입장과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돌로 처서 죽이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최고로 예찬하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편지를 쓸 때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예찬하며 권면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사도 바울은 믿음이 귀중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방언과 천사의 말이 귀중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능력이 귀중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이적이 귀중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그래서 저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설교는 은이다. 신학은 동이다. 이적은 철이다. 프로그램은 흙이다. 주님 닮으려고 애를 쓰는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만이 금이다”. 이와 같은 삶은 사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죄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러나 “긍휼”과 “용서”와 “사랑” 자체가 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인 죄인들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흉내는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평생토록 염원하며 기도하여야 할 기도 제목은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단어들 중에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 이라는 단어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다운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의 하나님이시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종교입니다.

먼저 “화해”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이 화해라고 지적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후 5:18).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 표준 새 번역은 “화목”이라는 단어를 모두 “화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고후 5:18).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엡2:16). “화해”와 “화목”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서로 원수 되었던 우리 죄인들이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 18).

구약 성경 창세기는 야곱과 에서의 “화해”와 “화목”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야곱은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 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3,4). “야곱이 가로되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 왜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의 “화해”와 “화목”의 이야기를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림인식 목사님께서는 우리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서로 목을 안고 울면서 “화해”하고 “화목”하라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저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림인식 목사님은 야곱은 남한을 가리키고 에서는 북한을 가리킨다고 말씀했습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는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화해”와 “화목”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9:1, 2).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9:4, 5). “요셉이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창 49:14, 15). 왜 하나님께서 요셉과 그의 형들과의 “화해”와 “화목”의 이야기를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남북한의 형제들이 서로 목을 안고 울면서 “화해”하고 “화목”하라고 요셉과 그의 형들의 이야기를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셉은 남한의 신자들을 가리키고 그의 형들은 북한 동포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5:23,24). 표준 새 번역은 “화목”이라는 단어를 모두 “화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마 5:23, 24).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화해”와 “화목”은 진리의 깃발을 휘두르므로 이루어 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양보와 착함과 선행의 마음과 행실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우리 남한 사회와 남북한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화목”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처럼 요셉처럼 무릎을 꿇고 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평생토록 염원하며 기도하여야 할 기도 제목은 우리들도 “화해”와 “화목”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살면서 “화해”와 “화목”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그 다음 “평화”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단어들 중에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함께 “평화”라는 단어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다운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무질서와 혼돈에 빠져있는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표준 새 번역, 우리말 성경, 공동번역, 쉬운 성경은 모두 “평강의 왕”을 모두 “평화의 왕”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허다한 천군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악의 결과로 무질서와 혼돈에 빠져있는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 또는 “평화”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6). 표준 새 번역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평화”는 낙원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만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우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고대한다고 했는데(롬 7:21,22) 그것은 만물의 회복을 의미하고 우주의 평화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화평”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사도 바울은 “평화”와 “화평”을 이루는 삶을 무척무척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 야고보도 사도 베드로도 같은 권면을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 3:11). “화평”과 “평화”를 도모하면서 한 평생을 산 사람이 바로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통일”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 봅니다. “평화”와 함께 “통일”은 우리 죄인들과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선지자 에스겔에게 “통일”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6,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리고 서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이니라”(갈 3:28). 사람들뿐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 되는” “통일”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따라서 우리들이 평생토록 염원하며 기도하여야 할 기도 제목은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살면서 “평화”와 “통일”을 우리 나라와 세계 안에 조금이라도 이루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저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이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모두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따라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고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살라고 분부하신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부수적인 것도 아니고 선택적인 것도 아닙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본질적인 것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물론 모든 민족과 세계와 우주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고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계와 온 우주가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화해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 10).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 상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나타내면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흔적과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 수도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님처럼, 토마스 선교사님처럼, 주기철 목사님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제물들이 될 때 죄악과 분노와 증오와 갈등과 분열과 무질서와 혼돈이 가득한 이 땅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역사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싫어했고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70여명을 지난 10여 년 이상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도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동물들과 식물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새들도 물고기들도 식물들도 친밀하게 다가가면 반갑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이고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배워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께서 물려주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귀한 영적인 유산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날마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남북한을 불쌍히 여기시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우리들을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를 위해 바쳐지는 조그만 제물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여 우리들을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