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6:17-27절 강해>

1) 대적자

성도들이 어릴 때는 주로 세상과 육체가 성도들의 적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랄 때 점점 세상에서 분별되고 세상의 유혹과 육체의 정욕과 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아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다. 두번째 단계의 성도들에게 대적은 자아다. 많은 성도들이 오늘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한계에서 완전히 구출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직 사탄과의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다. 자아에서 벗어난 성도들만이 사탄과의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한다. 자아에는 주로 서너 방면이 있다.

첫째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자애(自愛)는 사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쉽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질병에 걸려 살 소망이 없어질 때 숨겨져 있던 자기에 대한 애착이 표출된다. 귀용 자매 등 영적인 사람들에게 있어 최종적으로 처리된 것이 바로 이러한 자아였다. 이러한 자아 처리 이후 그녀는 매우 투명한 영적 분별력을 갖게 되었다고 간증했다.

둘째는 자신의 의견이다. 자신의 관점을 강하게 붙잡는 것이다. 이것은 죄나 육체가 아닐지라도 자신이 옳다 하는 견해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은 원칙상 자아 의견의 화신(化身)들이다. 오늘날에도 첫번째 문제에 처한 그리스도인을 처리하기보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을 돕기가 훨씬 어렵다. 그들은 소위 옳다는 것에 점유돼 있다. 그들은 편협한 것과 교만의 형태로 숨겨진 자아 의견을 드러낸다. 그들은 주님 자신보다 옳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그 상태 또한 사탄의 어둠 권세 아래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셋째는 자아의 기질이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교활하고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기질이 그로 성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일하는 방식과 처신은 온전히 그의 기질에 따른 것이지 주님의 인도를 따른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명령을 듣고도 급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기질대로 행한다. 이것이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자아일 것이다. 이런 자아 생명이 십자가에서 처리될 때 그러한 성도는 사탄과의 직접적인 전쟁에 가담하게 된다.

2) 말씀을 믿는 믿음

여호수아 6장에서의 승리는 온전히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은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온전히 믿지 못한 고로 실패하였다. 주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당하실 때 기록된 말씀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이기셨다. 시험을 이김은 말씀을 신뢰하는 데에서 온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에 앞서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그녀는 동산의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즉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동산에서와 같이 속이는 일을 계속한다. 환경에서 많은 일을 일으킨 후에 성도들에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아니냐?”라고 말한다. 그래서 믿음을 버리게 될 때 사탄은 그를 밥으로 먹어버린다. 그러나 가나안 거민이 우리가 밥으로 먹어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에서 확증되었다(롬 5:8, 요 3:16, 요일 4:10).

요한일서 3장 1절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 삼으신 것이 큰 사랑임을 말한다. 로마서 8장 31-34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하시는 사랑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늘날 성도들이 왜 사탄에게 속는가?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환경 가운데서의 일반적인 축복으로 확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 승진, 환경의 순조로운 인도,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짐, 물질 축복 등이다. 심지어 기도 응답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고 축복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직접적인 축복의 확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 심지어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순조롭지 않고 원하는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데서 최대한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환경적인 축복 또는 어려움은 이방인들에게도 있다. 하나님께서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일반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확증물로 삼으려 함은 잘못된 처사이다.

믿는 이에게도 불행처럼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닥칠 수 있으며 이는 사도 바울에게도 임하였다. 그는 질병이나 배고픔이나 핍박을 많이 견뎠다. 그는 매맞는 일도 많이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주님을 섬기는 나에게 이러한 곤란과 핍박과 갇힘과 곤경과 심지어 질병(그는 육체의 약함이 있었다―갈 3:13)까지 주시느냐고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와중에도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고 간증했다(고후 5:14). 그는 그에게 펼쳐진 좋은 환경에 의해 감동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된 것이다(14下절). 이렇게 말씀에 굳게 선 신앙만이 사탄을 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