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내가 교회사를 전공할 수 있었고 특히 어거스틴을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학문과 사역과 인생과 관련하여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과 ‘양면성적’ 사고를 나에게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어거스틴의 ‘출생과 소년시절’에 이어 오늘 어거스틴의의 ‘청소년 시절’에 대해서 살펴본다. 어거스틴은 참으로 진솔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그의 출생 때부터 저술 당시까지의 그의 전 생애의 내면 생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이었는데, 그는 「참회록」을 저술하면서 그 초두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지와 재 같은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바라보고 말씀 드리옵니다” 그는 어둡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것이 「참회록」의 위대성이었다.


“청소년 시절”

어거스틴은 소년 시절의 죄된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내게는 도적질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은 아니었고 선행을 멸시하고 죄를 추구하는 강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늦은 밤 소년들과 함께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도적질한 후 돼지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오, 하나님! 그것이 나의 마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한 것은 죄악 자체였고 잘못 자체였고 부끄러움 자체였습니다” (참회록, 2권 4장)

16세의 어거스틴은 정욕의 노예였다. 정욕의 파도가 결혼이라는 해변에 도달할 수 있었던들 그렇게도 미치게 날뛰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육체의 나이 열 여섯 살 되었을 때 욕정의 미치광이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법에 의해 금지된 부끄러운 짓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부모는 나를 결혼시킴으로 파멸에서 구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내가 웅변술을 배워 설득력 있는 웅변가가 되는데 있었습니다” (참회록, 2권 2장 4절)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인 371년 칼타고로 갔다. 수사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나는 불륜의 사랑이 가마처럼 들끓고 있는 칼타고로 왔다”고 고백했다. 사실은 어거스틴 자신의 가마가 들끓고 있었다고 하겠다. 칼타고의 생활은 자유분방했고 흥겨웠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을 갈망했다. “나는 아직 누구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으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내게 가장 달콤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내가 사랑하는 자의 육체의 쾌락을 맛보았을 때는 더욱 더 달콤했습니다. 나는 그만 내가 추구하던 사랑 속으로 돌진해 버렸습니다” (참회록, 3권 1장 1절) 그 당시 어거스틴은 그의 감정의 고삐를 마음껏 풀어 놓았다. 그는 연극에도 맛을 붙였다. 극장은 “자신의 불행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었고 자신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연료로 가득 찬” 세계였다. 그는 무엇보다 연인들의 이별 장면을 즐겼다. “불행한 나는 눈물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나를 울게 해 줄 그 무엇을 찾아 다녔습니다. 배우의 연기가 나를 기쁘게 했고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참회록, 3권 2장 4절)

어거스틴이 칼타고에 온 첫 해인 371년 말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교육을 떠맡게 될 무렵 어거스틴은 무명의 여인을 정부로 취하는 “이류”(second class)의 결혼을 하고 말았다. 어거스틴은 385년 그녀를 버리기까지 15년 동안 줄곧 그녀와 동거 생활을 했다. “나는 그 수년동안 정부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정욕이 발동할 때 내가 발견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유일한 여인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계속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자녀 출산을 목적으로 한 결혼 계약과 욕망의 사랑의 계약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참회록, 4권 2장 2절) 한편 어거스틴은 그 당시 율법과 수사학의 대가가 되어 명예를 얻고 있었으며 명예를 즐기는 교만으로 그 마음이 부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가 19세 나던 해인 373년에 그의 생애의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처음으로 종교적 ‘회심’(conversion)을 경험한 것이었다. “삶의 불안을 느끼던 그 때 나는 웅변에 관한 책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의 과정들을 밟아가던 어느날 나는 시세로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철학에 대한 권면서였는데 그 이름이 호르텐시우스(Hortensius)였습니다. 그 책은 나의 태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오 주님, 그것은 나의 기도를 당신께로 향하게 했고 새로운 소망과 염원을 나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망이 무가치하게 보여졌고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면서 불멸의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일어나 당신께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는 세속적인 일들을 떠나 당신께로 날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랍어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 책이 그와 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붙게 했습니다” (참회록, 3권 4장 7절)

애지 추구에 불붙은 어거스틴이 지혜를 찾기 위해 관심을 돌이킨 곳이 성경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실망하고 말았다. 성경에서 고전의 교양미와 세련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의 라틴어 성경은 수세기 전에 비천한 무명 작가들이 번역한 것이어서 은어와 속어 투성이었다. 게다가 어거스틴이 성경을 읽어 본 바로는 시세로가 말한 고도의 영적 지혜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구약을 보니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신약도 마찬가지였다. 지혜의 화신인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그토록 지루하고 모순된 족보들이 나오다니, 어거스틴의 실망은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성경으로 돌이켰을 때 성경은 시세로의 품위에 비해 아주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성경은 겸손한 자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나는 겸손해지기를 거부하고 교만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참회록, 3권 5장 9절) 더욱이 아프리카 교회는 유별나게 편협하고 보수적이었다. 그 제도와 의식들이 대개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따온 것이었다. 구약과 절반쯤 혼합된 그런 식의 종교였다. 목회자들의 태도역시 마찬가지였다. 포용적이기 보다는 배타적이었다. 감독들은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여하한 도전에도 지나치게 민감했다. 어거스틴은 실망하고 말았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