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새물결플러스)>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한국교회 위기론’이 위기라고 지적하는 책이다. 문제의 핵심은 도덕성과 일부 지도자들의 행동이 아니며, 한국교회를 지배하던 세계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인 이학준 교수는 책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신앙의 정체성·적합성 위기이고, 영성의 틀이 과거에 머물러 교회가 현대인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에 부족한 ‘공적 영성‘을 청교도와 언더우드의 사례를 통해 찾아보고, 가정과 지역·시민사회 등 구체적 현장에서의 실천사항들을 점검한다.

이 교수는 최초의 한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모교 미국 뉴브런스윅신학교 종신교수이자, 올 가을부터 풀러신학교 신학 및 윤리학 정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새문안교회와 뉴브런스윅신학교가 공동 주최한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이 교수를 만나 구체적인 주장을 들었다.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의 이학준 교수는 마틴 루터 킹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그는 “킹은 친밀성과 공적 영성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며 “목사로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비폭력이라는 어려운 방법으로 흑인 해방 뿐 아니라 인류 평화를 위해 주저없이 선지자로서 미국에 대해 자기 비판을 가했다”고 평가했다. ⓒ이대웅 기자

-사실 한국교회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상황인데, 바깥에서 바라본 한국교회는 어떤가.

“5년 전부터 한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의 틀이 현대인과 맞지 않아 젊은이들, 사회 지식인들이 교회와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실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신실하려 애쓰지만, 물려받은 틀 자체가 변화하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돼 있다. 오늘날 인적 자원이나 물질 면에서 역대 최대인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건 단순히 도덕성이나 일부 목회자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다. ‘패러다임’이라고 썼는데 한국교회를 틀 지워준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생산성 있고 창조적인 목회를 하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으로 신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역사적인 예를 들어보자. 사도행전 앞부분에는 베드로의 엄청난 능력이 나온다. 한번에 3천명, 5천명씩 변화시켰다. 기독교 역사에 쉽게 나타나지 않는 사건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당시 그리스·로마에 자리잡았던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패러다임 덕분이었다. 사도행전의 흐름 자체가 베드로에서 바울 중심으로 옮겨가지 않나. 베드로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베드로의 역할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신실함으로 땅을 기경하는 것이었다면, 바울은 열정과 신실함은 물론, 그 위에 틀을 놓고 세우는 역할을 했다. 신학적 지성이 있었고, 로마의 법을 알고 그리스 철학에 능통해 시대의 도전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교회를 당시 전세계라 할 수 있는 지중해 세계에 입증시켰다. 열정과 신실함, 신학이 다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렇다. 당시는 이미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때였다. 어거스틴이 기독교 역사에서 했던 역할은, 하나의 종파로 억눌려 있던 기독교라는 종교를 변두리에서 순수성을 지키려는 데서 벗어나 로마 국교라는 옷에 맞춘 것이다. 틀을 바꿔야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일제의 핍박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성속(聖俗) 분리와 개교회·개인경건 중심, 하나님 사랑의 단순의지 신앙을 확대·심화해야 한다. 그래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몸이 커졌으면 옷을 바꿔입어야 하지 않나.”

-신앙의 정체성과 적합성의 위기를 지적했다.

“정체성 위기란, 한국교회가 초기의 순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유지하다 산업화와 경제발전이 이뤄지면서 기복주의와 성공주의를 받아들여 부흥했는데, 그러다 순수성마저 병들게 된 것이다. 신앙은 수단이 됐고, 물질적 복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목적으로 삼게 됐다. 하나님 사랑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데, 다른 걸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과 바알신을 같이 섬기듯 말이다.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여러가지 좋지 않은 모습들이 돈과 관련해 자꾸 등장하고 있다.

적합성 위기는 시대 변화에 따라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창조적으로 준비하지 못하게 하는 교회 내 전근대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과 제도를 말한다. 특히 ‘민주화’와 관련돼 있다.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는데, 교회는 산업화는 받아들였지만 민주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밑바닥’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사회에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가 하는 얘기들이 자꾸 ‘엉뚱하고 자기 논리만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민주주의란 일단 남의 얘기를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듣고 나서 내 얘기도 하면 된다. 듣는다고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부분을 못 하니 시민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다. 시민사회에 뛰어든 경우가 있더라도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좌우 정치세력과 너무 친밀해지고.

기본적으로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잘 모른다. 종파주의적 패러다임에 있기 때문이다. 개인 경건과 교회 성장만 이루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은 복합화된 현대에 맞지 않다. 서양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앞장선 것은 개신교였다. 성경에 바탕을 두고 통전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세계관과 안목을 바꾸자.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로 말미암아 지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로고스, 만물 속에 일하시는 성령 등을 활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으로만 성경을 편식해 편파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교회 내 민주주의가 사실 제도적으로는 잘 보장돼 있는데.

“헌법이나 공동의회, 제직회, 당회, 노회 등 틀은 갖춰져 있다. 그러나 운용 면에서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존하고 있다. 성경적 리더십이란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민주적 리더십이 함께하는 것이다. 민주적으로만 나가면 인본주의적이 되기 쉽지만, 카리스마만 강조하면 성도들이 참여할 공간도 없고, 얘기할 것도 별로 없다. 기독교의 특징은 이 둘을 조화시켜내는 것이다.

최근 문제가 된 교회들을 보면 모두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극대화돼 있다. 카리스마는 교회를 활성화시키고 이끄는 데 꼭 필요하지만, 그 카리스마를 담임목회자만 받은 걸로 생각하는 게 문제다. 그러니 평신도들이 자기 은사를 계발하고 사용하기보다는 끌려가는 데 급급하다. 제어장치가 없는 것도 문제다. 형식적 장치는 있지만, 사용할 분위기가 안 된다.

성경적 리더십은 로마서 12장 1-2절에서 보듯 ‘성화된 이성(sanctified reason)’을 사용해 잘 분별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의 어떤 카리스마가 개인의 욕심인지 하나님에게서 온 건지, 카리스마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분별해야 한다. 성화된 이성이 중요하다. 한국교회는 이성을 신앙과 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 없는 이성은 악을 저지를 수 있지만, 이성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민주주의도 이성이 바탕이 된 것 아닌가. 하나님은 감정과 이성을 배제하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다. 구분은 돼야겠지만, 너무 영과 이성과 육체를 분리시켜선 안 된다. 이성을 통해서도 성령님은 일하신다.”

-처방으로 ‘언더우드의 공적 영성’을 회복해야 된다고 했는데.

▲이학준 교수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되므로 카리스마적 리더십에만 의지하는 건 굉장히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목회자와 평신도가 똑같다고 볼 순 없다”며 “일반 소명과 특별 소명을 구분하면서도 상호 견제하면서 건강한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대웅 기자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왔을 때는 불교가 1500년, 유교가 500년, 가톨릭이 200년 이상 이미 존재했다. 개신교는 후발 중 후발주자였다. 그럼에도 개신교가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오늘날 발전의 틀을 놓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믿던 유교적 전통을 버리고 개신교를 따라온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이 한국 초기 개신교의 공적 영성, 즉 하나님 안에서의 나라 사랑, 백성 사랑과 연결되는데 한국교회가 오늘날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의 경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영성의 패러다임에 잘 결합돼 있었다. 공적 영성과 친밀성의 유기적 결합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되, 그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공적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영성이 사적으로 표현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내 욕심을 자꾸 챙기는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공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꼭 예수를 믿어야 물질적, 의료적 혜택을 준다’는 게 아니었다. 콜레라 걸리면 치료해 주고,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YMCA를 만들었다. 근대화를 위해 연세대를 세웠고, 신문을 만들어 노동 기술까지 알려줬다. 물론 교회도 40곳 넘게 세웠지만. 하나님 나라를 교회 안에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영역을 하나님 주권 아래 두고 어떻게 그 나라를 실현할지를 고민하다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의 구호는 ‘크리스천 코리아’, 한국인을 복음화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기독교화하자는 것이었다. 구령화는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고, 제도까지 기독교적 가치와 정신으로 만들자는 뜻이다. 이는 기독교 국교화와도 다르다. 제도와 내용들이 기독교 정신에 부합되게 하자는 뜻이었다.”

-책에는 위기 목록만 나열된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나와있어 인상적이다. 여러 영역 가운데 대형교회에 대한 부분에 눈길이 가는데.

“우리는 가톨릭과 달라서, 바티칸의 지시가 아니라 결국 평신도들이 제자도의 주체가 되는 풀뿌리 약진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대형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형교회가 되면, 더 이상 사적인 교회가 아니다. 인적·물적으로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나 대표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맏형이 집안을 대표하고 전체를 돌보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듯, 그러므로 공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대변인 역할 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몸 불리기, 또 불리기만 하다 사람들 비판을 받아왔다. 대형교회는 어느 정도 사이즈가 되면 성장에 목표를 두기보다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공적 사역으로 나가야 한다. 예배·말씀·교육·전도도 하지만, 공적 사역에 강조점을 갖고 사회의 아픔이나 민족의 문제에 과감하게 역할을 해야 한다. 기독교 연합체를 통해 하면 더 좋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개교회 목회자의 인식과 역할을 뛰어넘어야 한다. 모든 목회자는 교회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아닌가. 대형교회는 좀더 그런 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종교편향과 차별·역차별 논란이 한창이다. 이웃 종교들과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 방안은.

“우리나라처럼 원래 종교가 있던 나라에서 그런 부분들을 없는 듯 무시하는 건 전도 전략상으로도 지혜롭지 못하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대화를 하는 것이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와도 대화는 할 수 있다. 대화한다고 상대방 교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대화는 왜 필요한가?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모두 한국 사회에 살고 있고 환경·남북·청소년 등 공통의 문제들이 있다. 그런 도덕적·사회적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대화와 협력이 가능하다.

교리와 도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대화 자체가 모든 종교적 교리를 동등히 여기거나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보편구원론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조차 배척하고 있다. 상대방과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 오히려 이웃 종교인들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특별 은혜를 소개할 기회도 가질 수 있다. 교회는 공공선을 위해 마땅히 타인과 협력해야 한다. 자신만이 아닌 제3자도 생각해야 한다. 3·1운동 때처럼 협력하고 리더십도 갖고 하면 제3자가 볼 때 ‘기독교가 대담하고 포용성이 있구나’ 할 것이다.”

-한국교회 새 영성 코드로 ‘2=10=613’을 제시했다. 613은 구약 시대 십계명을 구체화한 율법들인데, 예수님이 혐오하신 것들 아니었나.

▲이학준 교수의 저서 <한국교회, 패러다임을 바꿔야 산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오셨지(웃음), 폐하러 오신 게 아니다. 그 내용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 공의와 사랑, 믿음이었다. ‘의’에 대한 얘기가 성경에 400-500회 나온다. 의를 빼면 기독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힘으로 의로워지는 건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의로 의로워진 뒤 삶에서 그 의를 실제로 이루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분되지만, 떼려야 뗄 수 없다. 칭의는 성화를 전제로 하고, 성화는 칭의를 완성한다. 성화를 없어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면 값싼 은혜가 되고, 부패한다.

2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예수님 말씀하신 율법의 두 강령이다. 이는 굉장히 큰 명제로, 구체적인 기준과 틀이 필요하다.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고 하고, 구체적으로 환경이 어떻고 세금이 어떻고 복지가 어떻고 하듯 구체적으로 설명한 게 십계명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십계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모든 인류에게 주신 계명이다.

십계명이 있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더 구체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십계명은 변하지 않지만, 613개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너무 추상적으로 성도들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작업을 해야 성도들이 붙잡힌다. 나팔꽃이 자랄 수 있게 대를 세워준다고나 할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되는지, 낙태나 이혼, 자살 등 갖가지 문제들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작업들이 없으니 곤욕을 치루고 있다. 교회 내 이런 문제들이 이미 상당히 들어와 있는데, 쉬쉬하고 덮어두기에만 급급할 뿐이라는 인상마저 받는다.”

-책의 결론에는 아시아 대륙을 향한 한국교회의 사명을 담았다.

“한국교회가 짧은 시간에 부흥하고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발전을 이룬 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본다. 우리만을 위한 건 아닐 것이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대륙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나는 그것을 ‘아시아의 기독교화’라 말한다. 언더우드의 생각처럼, 아시아에 기독교 문명이 탄생하도록 하는 것이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는데, 한국이 아시아 기독교화를 위한 공적 사명을 잘 감당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중국이 패권주의가 아닌 평화로운 국가로 발전하도록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민족의 분단 아픔을 뛰어넘는 데도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하길 바란다. 아시아에 모아지는 경제력들을 교회가 앞장서서 잘 선도하고 정리해 아시아 문명의 뿌리에 기독교 문명을 심으면 인류의 찬란한 문명이 싹트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