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봉사자 레이 워지니악 씨는 “예수님의 은혜를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봉사가 저절로 시작됐다”고 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가라’고 외치는 한 자폐아를 외면하지 못하고 10년째 부자(父子)의 연을 맺고 있는, 애틀랜타밀알선교단(단장 최재휴 목사)의 든든한 지원군 레이 워지니악(Ray Wozniak) 씨.

그는 현재 밀알에서 각종 서류작업 및 자폐아 돌보기, 야외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어김없이 빨간 산타 복장에 하얀 수염을 붙이고 나타나 선물을 나눠주는 그에게 한국과 한국 사람은 특별하다.

“언제나 따르고 싶은 영적인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저의 바람이었는데, 최재휴 목사님이 제게 그런 분입니다”라며 오히려 단장으로 있는 최 목사를 추켜세우는 워지니악 씨는, 마음 씀씀이 역시 한국의 정(情) 문화와 닮아 있었다.

그는 1969년 루이지애나에서 베트남 전쟁 파병을 위해 훈련을 받던 당시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기도를 했고, 함께 훈련받은 250명 군인 중 베트남이 아닌 한국으로 파송된 유일한 군인이 됐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과의 인연은, 한국인 아내를 만나고 두 한국 아이를 입양하면서 점점 더 깊어졌다.

주변 친구들이 “너는 미국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깊이 한국사회를 사랑하는 그는,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섬긴지가 벌써 30여년인 베테랑 교사이기도 하다.

밀알에서 아이들을 돌볼 때나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워지니악 씨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삶의 철학이 있다. 6개월이나 1년에 그치는 봉사나 교육이 아니라, 한 아이가 자라고 온전히 복음 안에 성장할 때까지 계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쏟아주는 ‘전인 교육’이 그것이다.

“여기 물병 보이나요? 8온즈밖에 들어가지 않는 이 물병과는 달리, 사랑은 제한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사람도 사랑하고 동시에 저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거지요.”

일례로, 그는 주일학교 교사로 유치부 때 맡은 아이들은 고등부에 들어갈 때까지 돌보곤 한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자식처럼 대해온 아이들은, 그에게 스스럼 없이 진로나 가정부터 이성 문제 고민까지 털어놓곤 한다. 삶의 멘토가 된 워지니악 씨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

레이 워지니악 씨는 몇 년 전부터 주일학교와 밀알선교단 봉사를 넘어 한인사회 전체에 큰 사랑의 원을 그리고 있다. 호프소셜서비스(Hope Social Service)라는 단체를 설립해 정신문제가 있거나 범죄, 마약 등에 빠진 한인 및 미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어려움에 처한 한인들이 도움을 요청해 오면, 법원에 동행하거나 정신과 상담을 연결해 주는 등 다양한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가능하면 모두 자비로 도와주고 따로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10~20년 지나면 하늘나라에 갈 텐데 돈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워지니악 씨의 설명. 호프소셜서비스는 건물도, 자원봉사자도 아직 없지만 지난 3년간 도움을 준 사람들만 50여명에 이른다. 지금은 워지니악 씨 혼자 25명의 한인들을 돌보고 있어, 봉사의 손길이 절실하다.

그는 18세 청년 시절 예수님을 영접하고 보혈의 은혜를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깨달음 이후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수님의 은혜를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가슴 속에 사랑이 물 끓듯 넘쳤어요. 그러면서 봉사가 더 이상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된 겁니다.”

한인사회와 미국사회에서 이중고립을 겪고 있는 한인 장애인들, 범죄나 마약에 빠져 혹은 정신적 문제로 고통 받는 한인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워지니악 씨. 그는 오늘도 음지에서 떨고 있는 한인들에게 따스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