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크투 DB
1. 사도행전 3장 구절을 ‘성전 미문 밖 앉은뱅이’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개역성경).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라는 단어를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자’로 기록하고 읽습니다(개역개정).

이는 ‘앉은뱅이’의 사전적 의미를 사회적으로 인식하고 감수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앉은뱅이: 하반신 장애인 중에서 앉기는 하여도 서거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그러고보면 NIV 성경의 표현이 오히려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나면서 걷지 못한 자를 ‘crippled’이라는 단어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을 가리키는 대체 언어가 있음에도 말입니다(disabled라는 보편화된 용어 혹은 challanged라는 사회적 용어).

이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나 인간의 번역과 표기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과 그 의미를 담기 위해 시대적으로 제도와 법, 형식을 언제나 개혁해야 합니다.

2. 저는 성전 미문 밖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장애인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 이야기는 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를 고스란히 교회라는 공간을 통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먼저 하려면, 제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저는 4살 때 교통사고를 통해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벌써 장애를 갖고 산지 44년째입니다. 사실 제 장애(흉수)에서 목발로 걸어 일상생활을 해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 사실이 비장애인들에게는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와 비슷한 유형의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다니는 사람을 찾을 수도 없지만, 40년을 그리 살아왔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거저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4살부터 하루 6-7시간씩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넘어지는 일이 잦다 보니, 초등학교 시절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방안에 있는 큰 이불 위에 일부러 넘어지면서 훈련했습니다.

3. 제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 아님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시애틀에 있던 재활의학과 의사가 “목사님, 진짜 목발로 걸어다니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눈치챘습니다.
한국 세브란스 재활의학과 최고 권위를 가진 한 의사가 “걷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다 큰일난다. 당장 목발을 던지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라”고 했을 때는 되려 겁을 먹었던것이 억울했습니다.

아니, 1994년 서울대 의대 정형외과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제가 계단을 올라가는 영상을 촬영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당연했던 것이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말을 조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저와 같은 장애로 당연히 휠체어를 타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의 당연함이 타인에게는 당연함이 아닌 것이지요.

목회를 시작하면서 휠체어를 타고 다닙니다. 목발로 다니는 것이 시간적으로 버거워졌습니다. 휠체어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게도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리’라는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독립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은 분명 아닌데, 어찌 됐건 독립된 분리의 형태로 살아가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다시 예전 이야기로 돌아가야겠습니다.

4. 3년의 혹독한 훈련 결과, 저는 목발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걷게 됐습니다. 경사로건, 계단이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목발로 걸어가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뒷산에 올라다니고 가족들과는 여기저기 다니지 못한 곳이 없습니다.
장애는 손상의 영역이 아닌 저에게 있는 것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좋습니다. 장애는 손상이나 기능의 정지가 아닌, 제게 또 다른 도전과 능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제 어린 시절은 늘 친구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을 했고, 생일이면 서른 명이 저희 집에 우글거렸습니다. 제가 교회를 가자고 하면 군말하지 않고 아이들이 왔습니다. 소위 따돌림받는 아이나 따돌림시키는 아이나 저를 좋아했습니다. ‘일진’이라 불리는 친구도 제 말 한 마디면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던 제가 처음 장애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우리 집 골목길앞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모습을 본 뒤로부터입니다. 장애를 갖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골목에서 놀던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지내던 친구지요.

학교를 가려면 그 집을 거쳐 지나가야 했습니다. 등굣길 친구 집 앞을 지나는데 친구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반가워 고개를 돌렸는데 다른 친구들과 내가 걷는 모습을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른 고개를 숨겼습니다.

순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모른 척’ 하는 것이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서둘러 목발을 짚고가는 제 뒷통수에 친구와 다른 친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짜 웃겨.”

친구의 친구로 들리는 목소리였습니다.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친구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나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친구 옆에, 내 친구가 그 모습을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너무 당연했던 제 삶이 와르르 무너진 듯 했습니다.

저는 그 후로 친구의 집 마당으로 들어가는 일이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마당은 저를 당연하지 않게 바라봤던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기억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는 걸어가면서도 땅을 보며 걷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후로도 그 친구와는 잘 지냈지만 그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꺼낸적 없이 갈무리됐지만 제 삶의 방식,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 뒤로 저는 친구에게 먼저 도움을 부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뒤로 제 장애는 타인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친구와 나를 그리 만들었을까요? 저는 독립의 형태를 보이는 ‘분리’를 택하면서라도, 존재와의 연대를 이어가려는 근원적 외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와의 관계를 끊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비록 저를 대하는 불편함과 시선이 의식되지만, 그 사람과 연대를 끊고 살 수 없는 공간의 특성도 한몫 했을 겁니다. 어차피 매일 골목에서 마주쳐야 했으니까요.

외로움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므로,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친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친구는 늘 제게 진심으로 대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친구의 친구가 잘못이었을까요? 지금 와서 보면 그 또한 아닙니다. 잘못이라면, 친구의 친구에게는 제가 친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친구의 친구에게는 저와 같은 장애를 가진 친구가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같은 위치에서 친구가 되었다면, 우린 친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친구가 되지 못하게 하는 걸까요?

5. 어찌 됐건,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부당한 일들, 그러나 그 시절은 당연했던 일들이 많습니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당연히 교실에 남아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친구들의 돈을 맡아주는 일을 해야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공간이 분리되며 그리 되었습니다.

교실에 꼭 남아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어차피 기능적으로 운동을 할 수 없으니 교실에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교실에 남아있다고 돈을 맡아줄 필요는 없는데, 한두 사람의 물건을 맡아주니 너나할것없이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때는 “우리 학교는 계단이 많아 다니기 힘들겠는데”라는 이야기를 면접관에게 들으면서, 좋아하던 독일어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공간이 존재를 품지 못한다면, 사람이 꿈을 포기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공간은 존재를 위해 설계된 곳인데, 왜 공간이 변화하려 하진 않을까?
공간의 변화는 그 공간 설계자의 마음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그 공간이 필요한 존재를 만났을 때 변화해야 할까? 등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영문과였지만,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도 학원은 휠체어로 접근하기 힘들어 다녀본 일이 없습니다. 가장 예쁜 캠퍼스가 있는 대학을 다녔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 이동이 힘들어 팔이 망가져가면서 겨우 졸업해야 했습니다. 중앙도서관에 가는 일은 제겐 사치였습니다.

아버님께서 이동을 위해 차를 사주셨지만, 장애인 주차를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주차할 곳을 찾아 돌다 지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학교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조차 IMF가 오면서 운행을 안 하는 날이 다수였습니다.

6. 대학생이 된 저는 더욱 ‘자립, 독립’에 대해 분리된 형태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골목 앞 일상 공간에서 친구와 분리를 선택한 제 기억은 사회관계망에서 철저히 ‘자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직·간접으로 들으며 사고하게 됐습니다.

은행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인턴을 뽑을 때 지원해 봤습니다. ‘자신들이 뽑고자 하는 장애인에 비해 학력이 높다’는 것입니다. 엄청 힘들어 보이는 장애인을 뽑아, 홍보용으로 쓰려 했음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 2020년대.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니,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누구나 마실 수 있는 문화, 카페. 그래서 소통의 역할을 감당해야겠다 생각돼, 커피를 배우려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는 공짜이지만 무엇보다 귀한 것이니,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커피협회에 신청하고 필기 합격을 한 뒤 일입니다.

실기 시험 직전, 협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휠체어에서 보면 위험하니 일어나서 볼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휠체어 장애인에게 일어나서 시험을 볼 수 없느냐니,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고가 나면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단체만의 문제일까요?

아니요. 휠체어 장애인들을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당연하니까요. 놀랍게도 휠체어를 타고 커피를 배울 수 있는 학원도, 장애인 단체도 없습니다. 발달장애인 수업은 많지만, 휠체어 장애인을 위한 제도나 시스템 공간이 없다는 건 충격이었습니다.

올해는 제빵을 배우고 싶어 찾아봤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었습니다.

그렇다면 휠체어 장애인들은 다 자립과 독립을 했기 때문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결국 휠체어에 맞는 일들만 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있는 것일까요?

7.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자립’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에게 필수 요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하지요. 장애를 갖지 못한 비장애인은 ‘당연하게’ 더 좋은 공부 환경을 선택하고 의지했습니다. 자연환경과 문화생활을 상대적으로 쉽게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공간구조와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간으로 같이 들어가 살자는 이들의 모습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모습은, 점점 고립되어가는 장애인들에게 그것이 자립이고 독립이라는 인식을 강요합니다.

‘자립’이란 장애인에게나 비장애인에게나 보편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홀로 서서 자립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의존적이니까요. 다만 주체적으로 무엇을 의지할 것인지 선택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8. 지금도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부당한 일들을 참 많이 겪고 있을겁니다.

얼마전 5성급 W호텔에서 운영하는 피자집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 들려옵니다. “죄송합니다. 계단이 많아서 휠체어는 못들어오세요.”

10년 전쯤 수차례 가서 먹었던 기억이 있어 말씀드렸습니다. “두 분 정도만 도와주시면, 아니 한 분만 도와주시면 방법이 있는데, 알려드릴께요.” 그러나 대답은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안전상 이유가 있어 그럴 수 없습니다.”

“도와줄 수 없다”는 말로, 또 자립 형태의 분리로 가야 했습니다. 5성급 호텔에서 운영하는 피자집을 계단이 많아 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은, 관리자의 측면에서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과연 대다수 비장애인들에게도 당연한 이야기일까요?

“여기는 계단이 많아서 올 수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OK, 그렇게 하지요”라고 대답할 비장애인이 얼마나 많을까요? 모두 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하고 따질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그 호텔이나 피자집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저상버스가 있는 한국 사회지만, 버스를 타고 관광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공간으로만 가야 할 대다수 휠체어 장애인들이 겪는 이야기입니다.

장애인 문제를 보상과 금전적으로만 따지다 보니, 역할을 구분짓고 공간을 빗금친 우리는 언젠가 이 시기 이야기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계단 밖 사람들이 많습니다. 두 발로 서서 걸어가는 존재만이 인간이 아니라면, 적어도 모든 인간이 오갈 수 있는 것이 당연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는 공간의 시작이요, 비로소 그때 어린 시절 친구와 저 사이 또 다른 친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마주해야할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9. 그러다 보니 결국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내몰린 인생을 살아온 제 곁에는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가족이 있습니다. 사회 대신 보호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초중고 내내 제가 화장실을 갈 때 도와주기 위해 매일 학교를 두세 번씩 오가셨던 어머니는 저를 위해 중노동을 하셔야 했습니다. 먼 거리를 오갈 일이 있을 때면 이동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을까봐, 가는 곳의 시설이 변변찮아 화장실과 샤워에 문제가 있을까봐, 아버님은 80이 넘으셨음에도 여전히 저를 도와주십니다.

실제로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내몰린 장애인들을 위해, 사회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했습니다. 활동보조인 제도가 그러합니다. 장애인 연금이나 지원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하지 않습니다. 노동에 대한 이야기, 장애인들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공간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장애인들의 약 65%가 노동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동활동을 하지 않는 65%의 장애인을 위해 활동보조인을 대신해 평생 보호자요 친구로 살아온 가족보호자(혹은 가까운 누군가)의 삶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보호자 역할을 하는 활동보조인들의 노동은 인정해줍니다.

과연 이것은 정당할까요? 장애인들의 활동보조에 가족은 배제돼야 할까요? 가족의 역할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돼야 할까요?

노동은 시민들에게 기본 권리입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첫째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32조 1항에서도 ‘노동은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로 명시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노동을 하고 있는 가족보호자들은 활동보조인의 경제활동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활동보조인만큼, 아니 그 이상의 활동을 도와주는 가족 보호자들의 제외는 장애인과 가족의 또 다른 분리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와는 완전히 다른 적용 때문에 65세 이상의 장애인들을 보호하는 가족보호자들은 장애활동보조가 아닌 요양보호 대상으로 보조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괴리를 보이기도 합니다.

지체장애인과 가족 보호자의 연관성을 연구하기 위해 장애인협회나 장애인 단체에 가족 보호자들과의 인터뷰나 설문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반응은 거의 일치합니다.

“지체장애인들은 대부분 자립하거나 독립한 형태라 데이터가 없다”, “지체장애인들의 가족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데이터가 없으면 결론이 날 수 없음을, 그리고 데이터의 부재는 불안 요소가 잠재돼 있는 것임을 망각한 채, 연구자들이나 장애인 단체 운영자들 그리고 연구자들도 결론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지체장애인들의 삶은 이미 독립된 형태가 많아 상대적으로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우리 단체에는 지체장애인들이 얼마 없다.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내 공간에 누군가가 없다는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고 결론을 내립니다.

10. 한국은 장애운동의 역사가 깊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리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지체장애인 장애운동의 대모 쥬디스 휴먼은 1947년에 태어나 소아마비로 두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5살 때 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교원 자격시험을 통과했지만, 뉴욕 교육위원회는 그녀를 거부했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보면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1970년 뉴욕에서 휠체어를 탄 최초 장애인 교사가 됐고, 다른 지체장애인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재활법 504조 투쟁을 했습니다.

누구나 당연히 올라가는 의사당 건물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그곳을 맨몸으로 기어서 올라갔습니다. 우스꽝스럽고 처절한 몸짓을 모두 본 뒤, 결국 1990년 미국에서는 장애인법이 통과됐습니다.

그녀가 말했던 것은 곧 그 자신(쥬디스 휴먼)이 인간(휴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인이라고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이 이동하고 똑같이 살 수 있도록 기회를 균등하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1. 이제 말씀으로 돌아올까요. 성전 미문 밖에 한 하반신 마비 환자가 있습니다.

이전이나 이후나 미문 앞에는 늘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화려한 미문 앞에서 그들은 은과 금을 바라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문 안의 삶을 꿈꿔본 일도 없습니다. 미문 안으로 그를 이동시켜준 일도 없습니다.

그는 늘 미문 밖에 주저앉아 자리잡았고, 사람들은 그 자리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미문 밖의 존재인것이 당연했고, 어느덧 그의 인식도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비로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바뀐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진 두 사람의 시야 각도가 바뀐 것입니다.

늘 목적지나 직선만 보던 사람이 아니라, 미문 안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성전 미문 밖의 한 사람을 봤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먼저 그 앞에 멈춰 섰습니다. 자신의 이동을 멈춘 것입니다. 장애인이 멈춰있을 수밖에 없던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것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의 언어에 핵심이 있습니다.
‘은과 금’을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난 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동’이었습니다. 어디로 이동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늘 가던 ‘공간’으로의 이동입니다.

12. 일어났으니 끝난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놀라운 감동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 사이에 섰습니다. 그들은 ‘함께’ 성전 미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셋이 함께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를 이야기하며 성령 충만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장애인들의 이동 문제를 논하기전에 꼭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멈춰설 수 있는가?
나는 늘 일상 가운데 당연하게 여기던 미문 밖을 보고 있는가?
나와 친한 친구 사이에, 그 존재를 끼워넣을 수 있는가?

13. 그러나 문제는 성전 미문 밖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성전 미문 안으로 비로소 들어갔지만, 그곳이야말로 아비규환이었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겠다고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타자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여전히 봐왔던 사람, 그리고 이적을 보였다고 소문난 ‘요한과 베드로’를 주목했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곳에 있지 않은 타자가 그들의 당연한 미문 안이라는 공간에 들어오는 것이 꺼끄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에게 주목하지 말라”고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익숙한 사람과만 친하게 지내고 있는 우리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함께 서는 것, 함께 이동하는 것, 이 문제는 ‘나를 주목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거창한 일들이 많습니다. 선교, 목회…, 그러나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서 우리 바로 옆 구석구석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쁘게 목적을 달성해야 하고 거침없이 달려가다 보니, 공간을 세워나가는 것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높이를 쫓다 보니, 계단을 만드는 것도 당연해졌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었습니다. 장애는 교회 밖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이제 ‘끼리끼리’가 되고 말았던, 그러면서도 목회·선교·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존재들을 밀어낸 교회 안 사람들에게 있는 것일까요? 장애인 연구를 하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예수님이 오셨는데, 죄인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모두 나를 주목해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만 안에 들어온 탓에, 이 사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로 인해 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어떻습니까? 한국교회는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도와야 하는 대상으로, 선교의 대상으로, 구제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까? 연구 대상으로 여기며 분석하고 있습니까? 그러니 여전히 장애인 목사를 청빙했다는 한국교회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지 모릅니다.

저는 어려운 교회 상황에서 담임이 됐을 때, 충격적인 신앙의 뒷모습을 봤습니다.

제 다른 면모들을 자격없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신 분들의 입술을 통해 “장애가 있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슬펐습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분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그때 비로소 어린시절 죽마고우같던 친구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또다시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처럼 다시 고개 숙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고 당당히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갈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제 저는 사랑하는 교우들과 한 공간 안에 머뭅니다. 여전히 한국이나 미국이나 중증 지체장애를 가진 목사가 개척했다는 이야기는 들려도, 그런 목사를 청빙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설마 이러한 일이 우리 교회에서만 있는 일이라면,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 슬퍼할 일입니다.

여름, 모든 교회들마다 사역의 거창한 이름들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십시다. 여러분이 만든 장벽과 빗금들, 그것부터 철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
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