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우스의 유혹
▲Bernardino Parenzano,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Temptations of St Anthony, 1494)’, Panel. 46,4 x 58,2 cm. Galleria Doria-Pamphili, Rome.
1. 샬롬 평안하셨는지요.

이제 여름 지나 가을 문턱입니다. 입추 처서 모두를 지났으나, 누군가는 덥다 누군가는 시원하다 다르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뜨거운 대낮에 태양이 뜬 시간 땀흘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휴양 기간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질리언 테트가 쓴 <알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본래 인류학을 연구한 저자는 2005년 금융인 포럼에 참여합니다. 인류학자인 그에게 회의장은 낯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르는 언어들만 귀에 들려왔으니까요.

그는 그들만의 단어로 소통하는 이들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일을 만납니다. 전문가들이 당시 신용파생 상품을 둘러싼 금융시장에 대해 실제로 완전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현재 신용파생 상품 시장의 위기를 알리지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말하며 맹비난합니다. “니가 뭘 몰라서 그래”, “니가 뭘 알아”, “내가 아는데 말이야”.

그러나 불과 3년 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도래합니다. 저자는 한 마디로 제목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2. 고통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우리가 가장 관계에서 위험한 순간은 “너를 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공통의 시기를 지나지만, 개별적으로 모두 다른 계절의 느낌이 틀리지 않듯이, 고통의 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한 고통이 가장 큰 것 말입니다.

얼마 전 비행기에서 한 아이가 울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욕을 하는 사람의 기사를 봤습니다. 놀랍게도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모가 비행기에 아이를 태워서는 안 된다부터, 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켰느냐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모습을 봤습니다. 비로소 그 비행기에 탄 승객들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판은 조용해졌습니다.

비단 비행기뿐 아니라 우리는 숱한 공간과 시간에서 이런 이야기를 만납니다. 학교 교사라서 아이들을 안다는 이유로, 나도 부모라는 이유로, 어떤 어린이가 공공장소에서 악을 쓰며 우는 이유를 알 리가 만무합니다.

나에게 끼치는 고통과 불편감이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왜 이 장소에 그 아이가 있어야 하느냐고,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느냐고 나의 마음을 ‘투사’합니다.

“제가 불편합니다. 시끄럽습니다”라고 정중히 말하는 예의는 사라진 채, “이 아이 때문에 다른 사람과 이곳이 엉망이 되잖아요!”라며 판단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가 아는 지식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인 양, 혹은 내가 배운 도덕성의 기준이 바름의 기준인 양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3.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깊게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은 직접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고통의 크기는 내가 흉내낼 수 있는 고통의 크기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죄인의 삶을 직접 살 자신도 흉내낼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이 죄인이니까요.

그때부터는 운전할 때 갑자기 뛰어드는 운전자를 보면 당황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화가 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집안에 누군가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상황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요.

길거리에 횡단보도가 아닌데 건너가는 아주머니 할머니를 보면, 이제는 시선이 무릎으로 향합니다. 어머님께서 수술 후 횡단보도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어 살짝 옆 도로를 건너가셨던 모습을 본 후로 그렇습니다.

엄연한 찻길인데 그냥 무대포로 지나가는 위험천만한 리어카를 보면 죄송해집니다. 제가 휠체어를 끌어봐서, 일반 인도로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4. 사탄은 우리에게 참 그럴듯한 시험에 들게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위치,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끔 유도하는 사탄은 여전히 우리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을 통해 시험합니다.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 사는지, 아니면 어느덧 하나님의 자리에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데도, 서로를 사랑한다면서 정작 시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기준이 나의 지식이라면 말입니다.

5. 사탄의 시험, 지난 사랑의 편지에 나누었지요.

시험들지 말자고 다독이곤 하지만, 그 시험을 벌써 한 달여 지나 지난번 나누었던 시험의 시기에 대해 기억해보면 좋겠습니다.

언제 시험에 든다고 했었지요? 첫째, 결핍이 강해질 때입니다.

결핍의 상태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광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배가 고파지실 때, 사탄의 시험이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비로소 광야에 가보니, 하나님을 목말라 하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자기 욕망의 실체는 결핍이 있을 때 드러납니다. 내 요구가 좌절될 때,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물처럼 고개를 듭니다.

혼자 있어보세요. 그래야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지, 사람에 목마른지 드러납니다. .

6. 둘째, 위기와 고통 뒤에 옵니다.

예수님은 40일 굶주리시자, 시험이 왔습니다. 위기와 고통은 과정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이들에게 고통이란 목적이 아닌 중간 다리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소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편한 자리에만 있으려 하면 안 됩니다. 한 번 열매맺은 가지는 가지치기를 해야 다른 가지에서 또 열매가 납니다. 나무는 그렇게 자리를 비워냅니다. 고통을 수용합니다.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쉬운 자리, 그리고 편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스스로를 썩고 병들게 합니다. 편한 사람들에게는 인내가 없어집니다. 온유 대신 무례해집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않고 성내지 않는 것인데, 편한 대상, 편한 관계만을 기대하면 멈춰서게 됩니다. 이듬해 가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셋째, 다 끝났다 생각할 때 옵니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때, 가장 강한 시험이 옵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의 실수는 경기장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대가 끝나고 자신들의 삶에서, 그곳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 진짜 예배가 시작인 이유입니다. 삶으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친구들이 크리스천인 여러분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예전에 교회를 잘 다니다 다니지 않는 친구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OOO요? 걔도 우리랑 다를 거 없어요 목사님.”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뭔가를 정복했다는 듯 뿌듯해 보였습니다.

여러분, 대부분 주변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이 없을 때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OOO? 우리랑 다를거 없어.”

예배가 끝나면 ‘자유’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이 속한 곳에서 똑같이 흥청망청 살아가는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OOO? 걔가 무슨 교회를 다녀? 일요일마다 우리랑 노는데.” 삶에서 예배드린다고 하는 이름으로, 주일을 잊어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OOO? 걔가 교회 다닌다고? 그러니까 난 교회 안다녀.” ‘서로 사랑’이라는 설교에는 아멘 해놓고 끝나자마자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곳에서 온갖 교회 욕, 사람들 뒷담화를 일삼는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데, 그 말을 듣고 복음이 전해질 리 없습니다. 사랑의 통로가 아니라, 사탄의 통로가 되는 순간입니다.

7. 오늘은 시험범위를 알아보려 합니다.

언제 시험이 있는지를 알았다면, 무슨 내용에서 시험이 출제되는지 알아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몇 가지를 나눌 때, 내게 오는 시험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첫째, 변화의 시험입니다. 돌이 떡 되게 하는 시험입니다.

변화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이유는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변화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어떤 변화도 아름다운 조화와 통합을 이루게 하는 질서가 있습니다. 사계절의 변화가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25번째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먹는 즐거움만 따로 부풀려 탐식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변화가 주는 자연스런 즐거움만 따로 뒤틀어 완벽하게 새 것만 원하는 욕구로 바꾸고 있다. 이 욕구는 여러 모로 유익하다. … 더 나아가 이 욕구가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무해 한 쾌락의 원천은 더 빨리 고갈 되어 버리고, 결국에는 예수가 금지하는 쾌락으로 나아가게 되지.”

먼저 세상은 여러분에게 변하라고 합니다. 돌은 쓸모 없으니, 떡을 추구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돌이 떡 되게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 땅의 돌과 나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지요? 그 사라진 돌과 나무를 보러, 여러분은 이번 여름에 그렇게도 필사적으로 돈을 쓰고 여행을 갑니다. 비행기를 타고 고작 가서 하는 일은 돌을 보고 나무 보고 바다를 보는 일 아니었던가요?

이번 주는 휴가를 보냈습니다. 사역을 하며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던 조카들과 부모님을 모시고 남해를 다녀왔습니다.

저 산골짜기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의 풍경이 절로 마음을 위로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자연을 보려고 몰려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섬 위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산 위에 무언가를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점점 사라지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대전 근방 전부터, 그러니까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나무는 사라지고 물은 없어지고 하늘은 흐려져 가려집니다. 그만큼 아파트는 높아지고 차는 많아집니다. 공기는 탁해집니다. 창문을 열고 다니던 자유로움은 사라지고, 창문을 닫아야 합니다.

쓸모 없어 보인다고 그것을 당장 내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바꾸려는 우리 모습은, 서로를 향해서도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됨을 지키고 살려는 사람들에게 “너도 좀 마셔”, “너도 이 정도는 즐겨”라면서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통쾌해하며 “결국 똑같다”고 술잔을 기울입니다. 뭔가 모를 통쾌함이 스며듭니다.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자기를 잃어갑니다. 나를 변화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결국 남을 좇아 삽니다. 그건 결국 자기도 잃고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도 잃는, 사탄이 보기에는 통쾌한 길입니다.

8.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나요? 술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같이 있어주는 존재의 다름을 수용하지 못한 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요? 그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른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질서입니다.

그런데도 내 생각과 같아지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합니까?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떡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떡을 주면 널 안 잡아먹지”라고 말하는 호랑이처럼, 우리는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 떡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 호랑이로 변할까요? 내가 널 위해 한 만큼, 대가가 없을 때입니다. 그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호랑이가 됩니다. 돌을 가치없게 여기는 존재, 남을 변화시키려는 존재로 살지 말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9. 서양 속담에, 시냇물에 돌들을 치우면 노래가 사라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시냇물의 돌들은 이곳을 지나는 이들과 산골짜기의 음악이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한국교회의 시냇물에는 노래 소리가 안 난다고 핑계댑니다. 이곳은 예배가 은혜가 안 된다고, 찬양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고 아이들도 없다며, 다른 시냇물로 다른 바다로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냇물이 문제가 아니라 돌을 치워 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 돌이 여러분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통영에 가면, 몽돌 해변이 있습니다. 이 해변의 특징은 모래사장이 예쁜 것이 아닙니다. 돌들이 많습니다. 입구에 써 있습니다. “돌을 가져가지 마세요.”

모래사장이 아니라 파도가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음악이 됩니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듭니다.

그런데 돌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습 말입니다.

돌을 변화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은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 말입니다. 막상 소유하는 즉시, 점점 돌들이 내던 아름다운 소리는 사라집니다.

존재의 아름다움은 존재들로 부딪침이 수용될 때, 비로소 음악이 됩니다. 그런데 나의 기준에 맞춰 바꾸려 하면, 불협화음이 됩니다. 정작 존재를 수용하지 못한 건 나인데, “네가 변했다”며 서로를 등지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둘 돌멩이를 훔쳐가 내 안에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 투성이의 우리는 서로를 호주머니 속에 꽁꽁 숨겨둔 채, ‘이곳은 노래소리가 나지 않는다’면서 다른 곳을 향해 정처없이 떠나는 미련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10. 돌을 치우는 이유는 비단 예뻐서, 소유하고 싶어서만은 아닐 겁니다.

비슷한 내용일 수 있으나, 돌이 떡 되게 하라는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은 ‘주관적 실용성’입니다. 돌과 떡, 뭐 쓸데 있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떡이 중요할 때 아니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믿음 좋던 부모들도, 고3이 되면 수련회를 안 보내는게 당연해졌습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야. 예배는 나중에 드려도 돼. 어차피 온라인 예배잖아”, “현실이 중요해”.

공부, 중요하지요. 대학도 가야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때 배웁니다. ‘무엇이 중헌지’ 말입니다.

무엇이 중요할까요? 현실은 리얼리티(Reality) 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 정말 진실이라면, 그 대화를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야, 진실이 그래. 예배는 온라인으로 그냥 드려, 그게 진리야.”

“지금은 여행을 가도 돼. 진실이 그래.”

“지금은 돈을 벌고 회사에 가. 그게 진실이야.”

여러분 정말 그것이 진실입니까? 우리 아이들, 여러분이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들은 그렇게 여러분을 통해 배우게 될겁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고, 여행이고,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11. 교회에서 배웠던 관념들, 가치관은 그 순간 사라집니다.

‘예배가 우선이야’ 관념은 ‘공부와 예배는 별개이구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돈이고 세상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스크루테이프의 첫번째 삼촌 사탄이 조카 악마에게 보내는 편지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로 사는 것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언젠가 내가 맡았던 환자는 골수 무신론자였는데, 대영박물관에서 책 읽기를 즐겼지. 그런데 아차 하는 사이에 예수가 내 환자 곁에 바짝 달라붙었던 게야. … 나는 그 즉시 내가 제일 만만하게 쥐고 흔들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리면서, ‘점심을 좀 먹어야 할 때가 아니냐’고 일러 주었다. 보아하니 예수가 즉시 반격에 나서서, 이 문제는 점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더구나. ‘중요하고말고, 사실 이건 오전이 다 끝나가는 자투리 시간에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야’라고 내가 맞장구치자, 환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걸 보면 말이야.

이때를 놓칠세라 ‘점심 먹고 와서 개운한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고 얼른 덧붙이니까, 벌써 저만치 문쪽으로 걸어가더라. 환자가 거리로 나섰을 때쯤에는 이미 전세가 내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석간 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과 거리를 지나가는 73번 버스 를 보여주었지. 그리고 그가 계단을 다 내려서기도 전에, 머릿속에 굳건한 확신 하나를 단단히 심어 주었다.

혼자 방구석에 쳐박혀서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온갖 괴상망측한 생각이 다 들 수 있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이 건강한 ‘실제의 삶(여기서 실제의 삶이란 버스와 신문팔이 소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앞에 ‘그 따위 관념’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확신 말이야.

수세기 동안 우리가 쉬지 않고 공작해온 덕분에, 이제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친숙한 일상에 눈이 팔려, 생소하기만 한 미지의 존재는 믿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 계속해서 사물의 일상성을 환자한데 주입해야 해.”

현실, 과연 우리가 말하는 현실은 진실이 빠진 현재. 즉 껍데기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의 진짜 모습도 이제 사라진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진짜 자기 모습은 유흥과 여행속 기쁨 가운데, 돈을 벌 때의 성취감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소소한 삶의 한폭에서, 그저 교회에서 기타 한 자루만 있어도, 그냥 라면 한 끼에 믿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이었는데도 행복했던 순간을 잃었다면, 우리는 껍데기에 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12.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사라진 현실은 타인에게 폭력적이 됩니다. “넌 돌이잖아 떡으로 좀 바뀌어야 하지 않니?”라고 말입니다.

‘네가 세상에서 쓸모있어지려면 그래야 하지 않니?’ 라고 생각해 주는 듯 하지만, 돌을 짓밟습니다.

목회하면서 타인을 평가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리더십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예배에 나오지 않았던 기간이 길었던 순간에도, 한 번도 뭐라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한 사람쯤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못 나오는지, 왜 지각하는지, 믿음은 그 상황을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려줌으로, 여전히 그 사람의 상황과 상관없이 믿어줄 때 타인에게도 믿음이 생깁니다.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13. 세상에 이와 같은 교육관이 존재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달꿈학교도 존재합니다.

‘예술로 예수를’, 예술의 자유로움으로 예수님의 참된 자유로움을 배웠다면 ‘예수로 세상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릴 아이들이 언젠가 되게 하실 것을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꿈이라면 무엇이건 다 해줄 수 있습니다. 그 꿈이 주님을 향한 꿈이 되도록 방향만 정해줄뿐입니다. 투자 대비 효과가 0 아니 마이너스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게 물어봅니다. 달꿈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믿음 생활을 잘 하냐고 묻습니다.

저는 대답합니다. “네 그럼요, 저보다 나은 친구들인걸요.”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달꿈 학생들은 정말 잘해야겠어요. 졸업하면 봉사도 하고 예배도 잘 드리고 말이예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달꿈학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학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달꿈예술학교는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판단받은 아이들, 아무리 가르치고 베풀어도 바뀌지 않는다고 평가받은 아이들, ‘돌이 아니라 떡이 되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아이들에게 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네가 어떤 모양의 돌이어도 가치 있어. 적어도 너는 내게 그래.”

그리고 그 바람, “적어도 너는 내게 그래”가 “너는 우리에게 그래”로 바뀌기 위해 존재합니다. 한 마리의 양을 품기 위해 기다리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러한 우리가 되기 위해 기다려야 한다면, 생을 다할 때까지 혼자라도 기다릴 것입니다.

14. 그것을 위하여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데려와 구태여 다시 잔치를 연 것이니까요.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이야기이니까요.

창에 찔리고 면류관을 쓰고 못에 구멍이 난 손바닥으로 끝까지 하신 말씀이니까요. 왜 나를 버리냐고 아버지에게 따질만큼 큰 고통 속에서도 정작 자기를 찌르는 이들을 향해서는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하신 예수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부활했음에도 예수님 앞에서 버릇없이 구는 도마의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구멍난 상처에 찔러넣으셨던 예수님의 구멍난 몸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손바닥에 구멍이 나도, 옆구리에 창이 찔려도 그 자체로 여전히 아름다운 돌멩이이니 말입니다.

류한승 목사
생명샘교회, AMCM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