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 건국 대통령. ⓒ김현웅 씨 제공
어떤 국사학자는 이승만 박사를 미국의 앞잡이라는 식으로 매도하지만 사실은 미국이 이승만을 몹시 싫어하였습니다. 때로는 미국에 강력히 맞서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 출신으로 소련이 조종하는 대로 따라 한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일본이 통치하고 있던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이 하지 중장이었습니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싫어하여 귀국하는 비행기 편조차 마련해 주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하지 중장은 중국에서 귀국하는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 일행도 공항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귀국하려면 개인 자격으로 내리지 임시정부 자격으로는 내리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었으나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하고 연합국에 의하여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원통하였던 것은 임시정부가 조선 청년들로 게릴라 작전을 조국 땅에서 펼치려고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장준하 선생, 김점곤 교수 등이 그때 훈련 받았던 조선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게릴라 부대의 조국 땅에 침투하려던 날짜가 8월 20일경이었는데 원자탄 2방을 맞은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해 버려 광복군이 진격치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박정희의 유신 헌법을 반대한 죄로 옥살이를 하던 때에 장준하 선생과 한방에서 살면서 그때의 사정을 소상히 듣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미 군정청의 입국 방해를 받던 이승만은 평소에 절친하던 맥아더 장군에게 부탁하여 장군의 전용기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그렇게 어렵사리 귀국하고 보니 해방 직후의 나라 사정이 심각하였습니다.

북한은 소련군이 해방군이란 이름으로 진군하여 소련군의 현역 대위였던 김일성을 앞세워 곧바로 군대를 기르고 토지 개혁을 한다면서 지주들을 몰아내고 북한 전체를 장악하였습니다.

남한에는 박헌영을 대표로 하는 조선공산당의 세력이 번창하여 당원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미 군정 시절 여론 조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새로 세워질 나라를 공산주의를 택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 조사에서 무려 78%가 공산주의로 가야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상태로라면 남한에 박헌영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질 태세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 박사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박사는 자유 민주주의라야 민족에 장래가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불굴의 신념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략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민주주의 나라가 되고 민주주의가 되었기에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만큼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