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낭독을 마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했다. 조선 민족대표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크게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일본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민족 대표들을 체포했다. 민족 대표들은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한편 그 무렵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남녀 학생 5천여 명이 몰려와서 독립선언식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행되어 간 민족 대표들이 올 리가 없었다.

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그러고는 모두 함께 종로 쪽으로 뛰쳐나가 시위 행진에 들어갔다. 그 속에는 남강 선생으로부터 독립정신을 배운 오산학교의 졸업생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수많은 군중이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펼쳤다. 시위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의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시위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 황제의 관을 넣어둔 전각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리고 대열을 나누어 한쪽은 정동의 미국 영사관 쪽으로 향하고, 다른 한 대열은 남대문을 지나 총독부로 향하였다.

만세시위 행진은 여러 동네로 퍼져 되풀이되었으며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 나갔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공약 3장에 밝힌 대로 질서를 유지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달라졌다.

한민족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일본 당국이 군인과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로 해산시키려 들었기 때문에 시위는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3월 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 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만세 시위는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까지 번져 우리나라의 역사상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3·1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지자 총독부는 군경의 총칼에 의한 잔혹한 탄압으로 이 평화 운동을 억누르려 했다. 전국 각지에 강력한 권한을 가진 헌병과 경찰을 배치하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정규 일본군 2개 사단을 주둔시켜 언제든지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군중을 마구 학살하고 흡혈귀처럼 웃어댔다. 수많은 사람이 붉디붉은 피로 흰옷을 물들이며 쓰러졌다.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수원 제암리였다.

제암리의 청년들은 장날에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을 짰다. 장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시간에 청년들은 태극기를 걸어놓고 연설회를 개최한 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했다. 장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주동자를 붙잡아 가혹하게 매질을 했다. 많은 청년들이 상처를 입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청년들은 밤에 제암리 뒷산에 올라 봉화(烽火)를 올림으로써 주민들의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이튿날 밤엔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열흘 후인 4월 15일 오후 2시, 일본 경찰의 계획된 음모가 시작되었다.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有田俊夫) 중위 등 일본 헌병 30명이 몰려왔다. 아리타는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 20여 명을 교회당에 모이도록 했다. 장날에 너무 심한 매질을 하여 사과하고자 왔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21명의 남자 신도가 모이자 헌병들은 밖으로 나가 교회 출입문에 못질을 하고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교회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일본 헌병들은 비참하게 죽어가는 남편을 살려 달라고 밖에 서서 애원하는 두 아낙의 목을 베어 볏짚으로 불을 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총검으로 찔러 모두 다 죽였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이 사건으로 모두 23명이 살해되었다. 만행을 저지른 헌병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30여 가구의 초가집이 불에 타버렸다. 불길이 너무 어마어마해 멀리서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해 누구도 희생자의 유해를 찾아 장례를 치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