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마음의 순종, 행위의 순종

입력 : 2018.04.13 09:41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순종으로 말하면, 이신칭의 반대자들에게 믿음을 행위로 곡해하여 '이신칭의'교리를 공격할 빌미를 줄 수 있다며, 그 말의 사용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실제로 그 우려대로 신인협력주의자들이나 유보적 칭의론자들은 '신앙의 순종'을 '행위의 순종'으로 왜곡시켜, 성화적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우려에도 우리가 여전히 믿음을 순종으로 말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그것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 두 구절에서 '믿음'을 '마음의 순종'으로, '불신'을 '복음을 복종치 않음'으로 말합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이처럼 믿음은 복음에 대한 순종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라는 복음을 듣고 "아멘"하고 믿으면, 그 사람은 복음에 순종한 것이고 그는 그 순종으로 구원받습니다. 여기서 순종은 '행위의 순종(obedience of act)'이 아닌 '믿음의 순종(obedience of  faith, 롬 16:26)'입니다. 반면 제시된 복음을 안 믿으면 불순종하는 것이고 그는 그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살후 1:8).

그 외에도 '믿음'과 '순종'을 동의어로 혹은, 상호 교호적으로(interactively) 사용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8-19)".

앞에는 '순종치 아니하던'이라 했고, 뒤에는 '믿지 아니하므로'라고 하여, 순종과 믿음을 동일시했습니다. 순종해서 믿고 불순종해서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순종의 표시이고 불신은 불순종의 표시입니다.

이 외에도 믿음이 순종이어야 하는 이유는, 불신이 불순종으로 규정되기 위해섭니다. 만일 불신이 불순종이 아니면 불신을 죄로 규정할 수가 없으며, '불신 지옥'이라는 전도 구호는 거짓말이 됩니다.

물론 성경도 '믿지 아니하는 것'을 '악심'으로 말하며, 불신을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히 3:12)" 죄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불신이 죄로 규정되려면 불신이 불순종이 돼야 할 뿐더러, 불신을 불순종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성경도 죄를 죄로 규정하는 것이 오직 율법이며,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고,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롬 7:7-8)". 그리고 율법이 불순종이라고 정죄하는 경우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은 어기는 것이다(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제 14문)".

일견 믿음이 율법의 판단을 받게 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 교호(interaction)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차원의 두 실체를 섞여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레 19:19)"는 혼종(混種, hybridism) 금지를 어기는 것과 같고, 믿음과 율법을 섞는 이신행칭의론(以信行稱義論)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과 율법을 섞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지위를 약화시키지도 않습니다.   

사실 '믿음'과 '율법'은 별개가 아닙니다. 또한 믿음이 율법의 판단을 받는다 해서 믿음의 의(義)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손상을 입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누가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는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아직 충분히 이해한 것이 못됩니다. 오히려 율법이 믿음의 의를 세워줍니다.

"예수를 믿어 율법에서 해방됐다(롬 8:2)" 혹은 "믿는 자는 율법에 대해 죽었다(갈 2:9)"는 말을, 믿는 자와 율법은 전혀 무관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믿음으로 율법을 완성시켜 율법이 더 이상 그를 시비할 것이 없게 됐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의롭게 되기 위해 다시 율법의 요구를 받거나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 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율법의 해방 선언(롬 8:2)"이며, 이는 율법이 충족된 결과입니다.

믿는 자를 의롭다 하고, 불신자를 불의하다고 선언하는 것도 율법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믿음으로 율법을 이룬 때문이고, 불신자가 지옥 가는 것도 불신으로 율법의 요구를 못 이룬 때문입니다.

부연하자면,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율법을 완성했고, 불신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못해 율법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행위로 율법을 완성시키려는 율법주의자들이 정죄 받는 것 역시, 믿음으로 율법적 의를 이루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믿음은 율법을 그 기저로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한 말은, 믿음이 율법을 완성시켜 "도리어 믿음이 율법을 굳게 지킨다(호크마)" 혹은 "율법이 믿음을 굳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는 유보적 칭의론자들의 주장처럼,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어도 계속해서 율법적(성화적) 의를 충당시켜야 한다며, 칭의의 모호성과 불안을 부추기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태까진 불신이 "율법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죄가 된다"는 것을 말했다면, 이제부터는 "은혜의 구원을 거부함"이 "완악한 죄가 됨"을 말하고자 합니다.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전혀 자기의 노력이 들어가지 않은, 말 그대로 '수용(acceptance)'일 뿐입니다.

이는 구원의 수동성(passivity)을 특정짓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은혜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에는 의지적인 완고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성경이 '불신'을 거부(rejection)를 뜻하는 '완악함, 완고함'으로 표현한 것은 같은 맥락입니다.

비유컨대, '은혜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밀려오는 밀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비한다면, '은혜의 구원을 거부하는 불신'의 완고함은, 밀려 들어오는 밀물을 기어코 밀어 내는 것과 유사합니다. 밀물을 막아내는 일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듯이, 불신에는 그만큼 완악함이 깃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불신을 완악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3-25)."

현대인의 성경은 이 '완악함'을 직접 '불신앙(롬 11:25)'으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도 불신과 마음의 완고함을 동일시했습니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요 12:39-40)".

나아가 '은혜의 구원'을 거부하는 '불신(완고함)'의 죄가 '율법적 불순종'보다 더 악하다는 점도 말하고자 합니다. 물론 원리적으로 둘 다 율법을 충족시키지 못한 불순종이지만, 둘은 차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둑질, 간음 같은 도덕적 죄를 범한 세리, 창기 같은 이들에게는 관대했지만, 바리새인의 불신 죄에 대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지독히 정죄한데서도 나타납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불신은 "은혜의 구원을 거부한 완악함의 죄"였기 때문입니다.

'행위적 불순종'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의 약함(마 26:41)"에서 연유된 것도 있기에 정상참작이 될 수 있지만, 은혜의 구원을 거부하는 '불신'은 의도적인 마음의 완악함에서 나온 것이기에 정상참작이 없습니다. 무엇을 행하라는 것도 보태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노력이나 댓가의 요구 없이 값없이 제공하는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니, 불신은 지독한 완악입니다.

오늘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내미시는 구원의 손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그 완악함입니다(Harrison).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롬 10:21)".

마지막으로 유보적 칭의론자들이 그들의 이신행칭의(以信行稱義)을 옹호하기 위해, 순종은 단지 '마음의 순종'이 아닌 '행위의 순종'이라고 강변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손과 팔의 움직임이 '육체의 행위'이듯이, 의식이나 생각은 단지 '뇌(육체)의 행위'이므로, 육체와 무관한 의식만의 활동은 불가능하다"는 유물론자들이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순전한 '마음의 순종' 같은 것은 없고 반드시 '행위의 순종'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 없이 존재하는 영혼을 믿고 순수한 영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믿는 기독교는, 믿음을 '마음의 순종(obedience from the heart, 롬 10:16)'으로 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3층천으로 올라간 것이나(고후 12:4), 육체와 뇌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나사로가 사후에 낙원으로 이끌려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어 위로를 받고, 부자가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것은(눅 16:23-25) 그것의 생생한 실례들입니다. 의식, 생각, 믿음을 뇌의 활동으로만 보는 유무론자들로서는 이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인 일인 믿음은 행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믿습니다. 영과 육은 불가분리이기에, 영적 활동인 '믿음의 순종'은 '행위의 순종'을 유발하고,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신앙을 단지 마음만의 신앙으로 남게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믿음'을 '마음의 순종'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은밀하게 일으켜진 초자연적 역사이고, 그것이 반드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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