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지난 시간에 무조건적으로 주는 사랑이 어떻게 채무의식을 남기는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주는 사랑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건 중 하나가 성찬이라는 것도 나누었습니다.

성찬과 십자가만큼 분명하게 사랑의 크기를 드러낸 사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성찬의 축복이란 우리가 사랑에 사로잡힐 때, 무한한 빚 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 13:8)."

그렇다면, 누가 사랑의 빚을 지는 걸까요? 일반적으로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의 빚을 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서 누가 사랑의 빚을 지겠습니까? 당연히 자녀가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이라 말할 겁니다. 그러나 이 경우, 조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빚을 갚는 것에 해당합니다. 자녀는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장부 정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사랑의 빚을 졌으니 한 번에 갚을 수는 없고, 수십 년간 할부로 갚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할부로 갚아야 하다니! 이런 사랑은 선물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계산하고 있고 여전히 거래 관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이 빚을 진다면, 언제나 "사랑하는 자"가 무한한 빚을 집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빚는 사랑 받는 자가 지는 빚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채무의식을 느끼죠. 놀랍죠!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최고의 것인 사랑을 주고도 여전히 빚을 지고 있어야 하다니!

따라서 사랑의 뚜렷한 특징은 사랑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사랑을 줌으로써 무한한 빚을 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겸손한 이야기입니까! 사랑을 하는 자가 사랑을 함으로써 무한한 빚을 느낀다면, 그는 모든 것을 주고도 공로를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주고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심지어 행위조차도 은혜이죠!

옛날에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화창한 날에 호숫가로 놀러가기로 했죠. 두 남녀는 조그만 배를 타다 사고로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애인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랑하는 애인을 구하기 위해 남자는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간신히 애인은 살렸으나,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죠.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적같이 깨어났습니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옆에 있는 애인에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내가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당신을 구했으니 사랑의 빚을 갚은 것이오."

여러분, 만약 이 남자가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어떻습니까?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 않나요? 저런 식으로 말한 것에 대해 살아남은 애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계속 사랑의 빚을 진 상태로 제 옆에 남아 있으면 안 될까요?"

혹은 이 남자가 저렇게 말하지 말고 "나는 당신께 부탁할 것이 있소. 내가 이런 식으로나마 일부 빚을 갚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계속 사랑의 빚을 진 상태로 남아 있고 싶소"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렇듯 사랑의 빚이란 언제나 사랑하는 자 쪽에서 무한한 빚을 진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는 채무의식입니다. 이 채무의식이 우리에게 생겨날 때, 언제나 빚을 져야 하는 의무가 생겨납니다. 법의 의무, 윤리의 의무가 일종의 강제라면, 이렇게 탄생한 의무는 자발이죠.

다시 말해, 사랑의 선물은 강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법과 윤리가 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죠. 사랑을 선물로 줄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한한 빚 가운데 탄생한 이 의무는 무언가 좀 이상합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의무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빚을 갚는 것이 의무일까요, 빚을 지는 것이 의무일까요?

세상에서 누군가 빚을 지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미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세상의 생각은 빚을 갚는 것이 의무이지 빚을 지는 것이 의무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에서 모든 빚을 갚으라고 먼저 말한 다음, 사랑의 빚을 지라고 한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다른 모든 빚은 갚기 바랍니다. 세상의 규칙은 세상에서 돌아가게 하시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러나 사랑의 빚만큼은 지십시오! 빚지기가 의무가 되어야 한다면, 물론 이것은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빚지는 것이 의무라 한다면, 아마도 해야 할 최소한의 것도 하지 않은 아주 파렴치한 놈으로 몰릴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빚을 갚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도 당신은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세상이 빚을 지기 위해 노력하는 당신을 보고 미쳤다고 말하든, 당신은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당신이 지난 주에 성찬을 참여한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이 길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당신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채무의식이 싹이 텄으니까요.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이루듯이, 당신 안에 싹튼 작은 채무의식이 큰 사랑의 선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법이 그림을 그릴 때 하나의 스케치에 불과하다면, 사랑은 색을 채우는 것과 같죠. 그때 그림이 완성되는 거니까(롬 13:10).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법의 종말이죠(롬 10:4). 성찬에서 이 사랑의 채무의식을 선물로 받은 자에게 또한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